[김강석의 중동 오디세이] 이라크 종파 정치와 미군 철수 공방

입력
2020.02.03 04:30
29면
미군 철수를 요구하는 이라크 시위대가 24일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을 묘사한 다양한 시위 도구를 내세워 미군의 이라크 주둔과 주권 침해에 대해 항의하고 있다. 바그다드=로이터 연합뉴스
미군 철수를 요구하는 이라크 시위대가 24일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을 묘사한 다양한 시위 도구를 내세워 미군의 이라크 주둔과 주권 침해에 대해 항의하고 있다. 바그다드=로이터 연합뉴스

미국이 가셈 솔레이마니 이란 혁명수비대 쿠드스 군 사령관을 암살하고 그 보복으로 이란이 이라크 내 미군 기지에 대한 미사일 공격을 감행한 이후 5,000여명에 달하는 이라크 주둔 미군 철수를 둘러싼 논란이 부상되고 있다. 지난 1월 22일 스위스 다보스 포럼에서 바르함 살리흐 이라크 대통령은 트럼프 미국 대통령을 만나 철군 문제를 논의했고, 이어 24일에는 수도 바그다드에서 미군 철수를 촉구하는 ‘100만의 행진’이 개최되는 등 이제 철군 이슈는 이 지역 정치의 가장 ‘뜨거운 감자’로 불거지는 양상이다. 하지만 미군 철수 공방을 자세히 들여다 보면, 난마처럼 얽혀 있는 이라크 특유의 종파주의 정치가 작동하고 있음이 발견된다. 그만큼 해법도 예측도 쉽지 않아 보인다.

반미 부추기는 시아파의 속내

이라크는 인종과 종파적 이해관계가 정치현상에 투영되는 정치지형을 갖고 있다. 총리는 시아파, 대통령은 쿠르드, 그리고 국회의장은 수니파에서 등용하도록 하는 종파별 권력 분점체제를 유지하고 있다. 이라크 의회 내 최다 의석을 차지하고 있는 ‘사이룬 동맹’을 이끄는 무크타다 알 사드르 역시 시아파 정치 지도자로 분류된다. 미군 철수를 위한 ‘100만의 행진’은 그의 주도로 성사된 것으로, 대부분 같은 시아파 정치 지도자들이 이 행사를 후원했다.

그런데 ‘100만의 행진’을 단순한 반미주의적 미군 철수 운동으로 간주해선 곤란하다. 작년 10월부터 지속되어 온 이라크 내 반정부 시위를 잠재우기 위한 시아파 정치 지도자들의 교묘한 의도가 숨겨져 있다는 점을 더 주목해야 한다. 사실 무크타다 알 사드르는 미군이 철수하는 것만을 강조했지만, 그동안 이라크 시위대들은 ‘미국과 이란은 똑같다’라는 구호 아래 미국과 이란을 동시에 배격해 왔다. 이들의 외침 속에는 종파적 이해관계에 얽혀 부패할 대로 부패해 버린 이라크의 정치시스템을 완전히 청산해야 한다는 메시지가 담겨 있었다. 작년 11월 아딜 압둘 마흐디 총리의 사임 역시 이러한 반정부 시위의 결과로 나타난 것이었다. 이러한 관점에서 본다면, ‘100만의 행진’을 주도하고 후원했던 이라크 시아파 정치인들은 자신들을 겨냥했던 반정부 시위대의 구호를 차제에 반미ㆍ미군철수 슬로건으로 바꿈으로써 시아파 중심의 기득권을 계속 유지하겠다는 정치적 의도를 갖고 있는 것으로 평가된다.

수니파와 쿠르드의 우려

지난 1월 5일 이라크 의회는 긴급회의를 열고 외국 군대의 주둔을 끝내는 것을 골자로 하는 미군 철수 결의안을 채택하였다. 현재 이라크 내 주둔하는 미군은 오바마 행정부 시기인 2011년 12월 완전 철수했다가, 2014년 6월 ISIS와의 전쟁을 위해 다시 파병된 병력이다. 따라서 이라크 의회 정치인들은 2017년 12월 ISIS와의 전쟁에서 승리를 선포한 이후 미군의 임무는 끝났으므로 더 이상 미군이 이라크에 주둔할 필요가 없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종파주의 정치체제하에서 이러한 이라크 의회의 철군 결의안 채택은 사실상 반쪽자리에 불과했다. 당시 수니파와 쿠르드 출신 의원들은 보이콧을 선언하고 회의 참여를 거부했기 때문이다. 이들은 미국이 철수한 이후 정치적 진공상태가 만들어지면 결국 친이란 성향의 시아파 세력이 차지할 것이란 강한 우려를 갖고 있다.

쿠르드 출신 바르함 살리흐 대통령이 트럼프 대통령을 다보스 포럼에서 만나고자 한 배경에도 시아파 정치인들에 대한 경계심이 깔려 있는 것 같다. 실제로 다보스에서 미국과 이라크 간 정상회담이 추진되자 카타입 헤즈볼라를 비롯한 이라크 내 여러 시아파 무장단체들은 반대 의사를 표명하며 위협을 가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이라크 내부의 반발에도 불구하고, 바르함 살리흐 대통령은 미국과 이라크 간 안보 파트너십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행보를 보였다. 이는 시아파 정치 지도자들이 미군 철수를 강력히 요구하는 것과 상반된 모습이다. 이와 관련해 일부 중동 전문가들은 수니파와 쿠르드 출신 지도자들이 시아파 정치인들의 독주를 견제해 줄 균형자로 미군이 계속 남아주기를 내심 바라고 있다는 분석을 내놓기도 한다.

트럼프의 선택은

이미 트럼프 대통령은 이라크에서 철군은 고려하고 있지 않다고 밝힌 상태다. 만일 미군이 강제적으로 철수해야만 하는 상황을 맞게 된다면 이라크 정부에 대해 강력한 제재를 부과하고, 군사 기지 비용을 청구하겠다는 완강한 입장을 보이고 있다. 미국은 이란의 영향력을 봉쇄하고, ISIS 재건 가능성을 차단하며, 중동 내 세력균형 우위를 선점하는 등 이 지역의 다양한 전략적 목표를 이루기 위해 이라크 내 미군의 주둔 필요성을 느끼고 있다.

하지만 최근 이라크 내 정치불안정이 심화되면서 트럼프 대통령의 철군 불가 선언이 계속 지속될 수 있을지는 좀 더 지켜보아야 한다. 특히 종파별 이해관계를 달리하는 이라크 정치 지도자들의 행보는 워싱턴의 의사결정 과정에 영향을 미칠 개연성도 있다. 이라크 내부의 종파주의 정치를 면밀하게 관찰해야 하는 이유다.

김강석 단국대 GCC국가연구소 전임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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