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여울의 마음풍경] 더 쉽게 말해주시면 안 될까요

입력
2020.01.29 18:00
29면
아름다운 언어는 이렇듯 싱그러운 채소를 아삭아삭 씹어먹는 듯한 청량감을 선물한다. 복잡한 머릿속을 풀어주고, 불안한 마음을 다독여준다. 잘못 쓴다면 수많은 사람을 죽일 수도 있지만, 제대로 쓴다면 수천수만 명을 살릴 수도 있는 아름다운 언어들을 쓰자. 읽자. 듣고 말하자. ©게티이미지뱅크
아름다운 언어는 이렇듯 싱그러운 채소를 아삭아삭 씹어먹는 듯한 청량감을 선물한다. 복잡한 머릿속을 풀어주고, 불안한 마음을 다독여준다. 잘못 쓴다면 수많은 사람을 죽일 수도 있지만, 제대로 쓴다면 수천수만 명을 살릴 수도 있는 아름다운 언어들을 쓰자. 읽자. 듣고 말하자. ©게티이미지뱅크

심리학이나 고전문학 강의를 할 때마다 자주 듣는 부탁이 있다. “작가님, 더 쉽게 말해 주시면 안 될까요.” 최대한 쉽고 자연스러운 문장으로 말하려고 노력하지만, 그래도 ‘너무 어려웠다’는 말을 들을 때마다 낙담하기도 한다. 더 쉽게, 더 재미있게, 더 호소력 있게. 자꾸만 스스로 다그치지만, 그러다가 진짜 나 자신을 잃어버릴까 두려워지기도 한다. 앎의 형식에 마음을 쏟다가 앎의 내용을 잃어버릴까 두렵다. 쉽게 표현하는 것에 골몰하다가, 아무리 어려워도 내가 진정으로 말하고 싶은 것을 놓치게 될까 두렵다. 하지만 ‘더 쉽게’ 가르쳐 달라는 요구가 늘 맞아떨어지는 것은 아니다. 그 순간의 열정을 남김없이 쏟아붓는 강의를 하면, 결국 쉽고 어려움이 문제가 되지 않는다. 진심은 반드시 전해지게 되어 있다. 어쩌면 소통의 진정한 관건은 난이도가 아니라 친밀감이 아닐까. 우리가 작가나 강연자에게 요구해야 할 것은 ‘더 쉽게 말해 달라’는 것이 아니라, ‘더 내 얘기처럼, 진짜 내 인생처럼 이야기해 달라’는 것이 되어야 하지 않을까.

자신이 추구하는 지식, 자신이 만들어 내는 스토리, 자신이 경험하는 삶을 전달하는 모든 메신저의 숙명은 바로 이것이다. 독자들이 스스로 경험한 것이 아닐지라도, 마치 그들이 경험한 것처럼 느낄 수 있도록 생생하게 전달하는 것. 그리하여 모든 글쓰기는 단순한 전달이 아니라 싱그러운 창조의 몸짓이 되어야 한다. 그림이든 음악이든, 여행이든 사랑이든, 무언가를 체험하거나 감상한 뒤에는 반드시 ‘언어’로 해석하는 작업이 필요하다. 화가들은 그림에 대한 글을 쓰는 사람들을 믿지 않고, 음악가들은 음악에 대한 평론을 쓰는 이들을 싫어하지만, 그럼에도 사람들은 아름다운 작품을 아름다운 언어로 표현하는 이들을 필요로 한다. 평론이 불필요한 것이 아니라, 아름답고 창조적인 평론이 턱없이 부족한 것이다. 오감으로 받아들여진 체험이 아무리 소중한 것일지라도, 인간은 ‘언어’를 통해야만 자신의 느낌을 최종적으로 저장할 수 있기 때문이다. 첫사랑의 설렘도, 위대한 교향곡의 감동도, 행복한 여행의 체험도, 모두 ‘언어’를 통해 갈무리될 때 비로소 우리 마음속에서 완결된 스토리텔링으로 각인될 수 있다.

언어는 우리가 가진 가장 아름다운 무기이다. 언어는 악성 댓글처럼 사람을 죽이는 가장 무서운 흉기가 될 수도 있고 따스한 치유의 토닥임처럼 가장 아름다운 구원의 목소리가 될 수도 있다. 프로이트와 융은 언어의 치유적 힘을 믿었던 것이 아닐까. 그들은 모두 과학자이자 의사였지만, 결국 그들이 남긴 최고의 유산은 과학적 공식이 아니라 ‘치유의 언어들’이었다. 프로이트, 아들러, 융이 남긴 위대한 유산은 약물치료의 효율성이 아니라 ‘언어라는 최고의 치유제’였다. 아름다운 언어, 창조적인 언어는 돈이 들지 않는 최고의 치유법이다. 나는 더 많이 읽고 더 깊이 씀으로써 매일 스스로를 치유하고, 나의 독자들의 마음을 어루만지고 싶다. 읽지만 말고 씀으로써 앎을 되새김질하고, 읽지만 말고 이야기함으로써 앎을 증폭시키고 공명시켜야 한다. 인문학의 세계에서는 예습이 아닌 복습의 힘이 훨씬 강하다. 곱씹고 되새기고 반복하여 낭독하며 필사하는 사람들이 오래 살아남는다. 증폭과 심화의 과정을 거치지 않은 언어는 무력하다.

나는 오늘 정호승 시인의 시 ‘여름밤’을 읽으며 실타래처럼 복잡하게 얽혔던 마음의 매듭을 풀었다. “들깻잎에 초승달을 싸서 어머님께 드린다/어머니는 맛있다고 자꾸 잡수신다/내일밤엔 상추잎에 별을 싸서 드려야지.” 아름다운 언어는 이렇듯 싱그러운 채소를 아삭아삭 씹어먹는 듯한 청량감을 선물한다. 복잡한 머릿속을 풀어주고, 불안한 마음을 다독여 준다. 잘못 쓴다면 수많은 사람을 죽일 수도 있지만, 제대로 쓴다면 수천, 수만 명을 살릴 수도 있는 아름다운 언어들을 쓰자. 읽자. 듣고 말하자. 그 모든 오해와 상처에도 불구하고, 언어는 우리 인간이 가진 가장 아름다운 무기이므로. (ps: ‘정여울의 마음풍경’과 함께하는 시간, 제 깊은 속내를 어느 때보다도 마음껏 털어놓을 수 있어서 기쁘고 따스한 시간이었습니다. 제 글을 아껴주신 독자 분들께 깊은 감사의 마음을 전합니다.)

정여울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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