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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국일보가 만난 우리나라 대표 명문종가 종부들] 
 떡국ㆍ전만으로 차례… 자식들 대 잇는 문제도 대화로 해결 
 하회마을 류성룡 15대 종손 “이젠 빈집 늘고 주민들도 줄어” 
경북 안동 하회마을 충효당에서 종손 류창해 씨가 설에 쓸 명태를 손질하고 있다. 이용호 기자
경북 안동 학봉종택 이점숙 종부가 22일 설에 올 자녀들과 손님들에게 줄 육개장 재료를 버무리고 있다. 이용호 기자
경북 예천 춘우제고택의 권창용 종손과 조동임 종부가 22일 종택 안방에서 마주앉아 집안의 설 풍습을 이야기하고 있다. 이용호 기자

설을 사흘 앞둔 22일 오전 10시 양반의 고장으로 불리는 경북 안동의 하회마을. 서애 류성룡(1542∼1607) 선생의 15대 종손이 살고 있는 충효당에는 음식 냄새가 전혀 나지 않았다. 차례와 제사상에 고등어와 방어, 가오리, 소고기, 닭고기 등을 익히지 않고 생물(생고기) 그대로 쓰는 가풍 때문이다. 종가(宗家)인데도 동생과 두 가족만 설을 같이 지낸다.

문어와 돼지고기는 미리 삶고 떡국과 과일, 동치미, 마른명태, 소머리눌림 등은 차례상에 오르지만 야채나 전은 빠진다. 한복을 입은 채 400년 고택에 혼자 있던 종손 류창해(64)씨는 “예전에는 명절이면 하회마을에 사람이 너무 몰려 외지인의 접근을 막기 위해 금줄을 치기도 했는데 이제는 빈집이 늘고 주민들이 줄어들어 걱정”이라고 말했다.

그는 “집 안채에 300년된 ‘제사유래도’가 걸려 있었는데 단오와 추석만 명절로 기록돼 있어 옛날에는 설에 차례를 지내지 않은 것으로 짐작된다”고 말했다.

민족 최대의 명절인 설을 맞아 한국일보가 들여다본 명문 종가 풍경이 뜻밖에도 차분하다. 흔히 선대의 음덕을 기리며 자손들이 모여 앉아 서로 안부를 묻고 덕담이 넘쳐나는 그런 고향마을…. 차례상 준비와 손님맞이에 분주할 것이란 예상은 보기 좋게 빗나갔다. 제사도 대폭 줄였다. 한국의 대표적 종가들이 달라지고 있다.

이날 안동시 서후면 소재지 길목에 자리한 학봉 김성일(1538∼1593) 선생의 종택에는 종부(宗婦) 이점숙(80)씨가 설에 찾을 자식 다섯 남매 가족의 음식을 혼자 장만하고 있었다. 명절이 닥치기 전에는 그를 도울 일손이 없기 때문이다.

종부의 노고를 잘 알고 있는 학봉종택에는 설 아침 차례를 지낸 후 종부와 문중 어른들이 맞세배를 하는 독특한 풍습이 올해도 이어진다. 이씨는 “문중에서 ‘도배’라고 부르는 이 풍습은 서로 가르침을 구하고 격려하는 의미를 담고 있다”며 “설이 많이 간소화됐지만 이 풍습은 내려온다”고 말했다.

예천 춘우재고택의 차례 음식은 더 소박했다. 예천문화원장인 종손 권창용(74)씨와 종부 조동임(71)씨는 “떡국과 전, 소고기로 차례를 지낸다”며 “3년 전부터 간소화했더니 이웃으로 전파되고 있다”고 전했다. 종손을 기준으로 8촌까지 친척만 66명인 이 가문도 달라진 설 풍속도를 피부로 느끼고 있다.

제사 문화가 대표적 사례다. 한해 제사를 13번 지내던 학봉종택은 10년 전인 2010년부터 조부와 조모를 같이 모시는 방식으로 제사를 8번으로 줄였다. 나라에 공을 세우거나 학문이 높은 어른의 신주를 사당에 두고 영구히 제사를 모실 수 있도록 한 불천위 제사는 예외다.

충효당도 고조까지 4대 조상의 제사를 한 해 8번 지내다 5년 전부터 부부를 같이 모시면서 4번으로 줄였다. 유교의 뿌리가 깊은 경북 북부지역에도 제사 간소화 추세가 보편화하고 있었다.

이는 자식과 젊은이들이 큰 도시로 떠나고 70~80대 노인들만 고향의 고택을 지키는 현실이 큰 요인이다. 이들 종손에게는 종가를 대물림하는 것도 숙제다. 제사를 간소화하지 않으면 도회지에 사는 아들 내외가 선뜻 종택으로 유턴하지 않는 것이다.

춘우재고택 조동임 종부는 대물림 문제를 큰며느리와 직접 담판으로 해결했다. 서울서 직장생활하는 40대 중반의 장남이 퇴직하면 종택으로 내려와 종손의 의무를 다하도록 하겠다는 것이다. 큰며느리는 제사 때마다 예천으로 내려와 일을 돕는 등 종부의 계보를 이을 각오다.

학봉종택 김종길 종손은 “자식 5남매 모두 외지에 사는데, 아들이 나중에 종택에 들어와 산다고 해서 한시름 덜었다”고 말했다. 이 곳 이점숙 종부는 “종가로 시집오다보니 평생 남의 조상 제사를 위해 사는 것이 당연하다는 생각에 힘들다고 느끼지는 않았다”면서도 “그래도 자식 세대들을 위해 간소화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환하게 웃었다.

도시화 추세가 가속화되면서 종가와 고택이 현대인에게 전통문화를 체험하는 추억의 공간으로 탈바꿈하고 있다. 종가로서의 권위 보다 방문객의 맞춤형 편리성에 무게를 두기 시작했다. 학봉종택은 6,600여㎡ 터에 사당, 사랑채, 안채, 대문채, 풍뢰헌, 운장각, 학봉기념관 등을 갖추고 체험객들을 맞고 있다. 사람들은 이곳에서 한지를 만들고 텃밭의 채소도 캐다 종부의 손맛이 담긴 안동식혜를 맛보는 호사를 누리게 된다.

220년 역사의 하회마을 북촌댁도 72칸 한옥이 온전한 옛모습 그대로 자리하고 있어 투숙객의 문의가 끊이지 않고 있다.

지방자치단체는 이 같은 고택의 가치에 눈을 뜨고 있다. ‘전통한옥체험 사업’이란 이름으로 체험프로그램에 예산을 지원하며 관광객 모시기에 나서고 있다. 경북에만 400여 고택에서 전통음식, 공예, 한복, 차, 예절, 놀이, 음악회를 선보이며 한옥체험업을 하고 있다.

퇴계 이황 선생의 17대 종손 이치억(44)씨는 “농경사회에서 산업사회로 세상이 바뀌고 있어 종가와 고택에서도 변화를 거부하는 것은 시대정신에 맞지 않다”며 “고택 체험관광도 좋고 제사 당일 대신 주말에 가족들이 모여 조상을 모시는 것도 괜찮은 것 같다”고 ‘신세대 종손’의 달라진 생각을 털어놓았다.

안동ㆍ예천=글ㆍ사진 이용호기자 lyho@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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