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전 갈등 못 풀고 정부 뜻대로 표결 반복하는 원안위

입력
2020.01.17 04:40
수정
2020.01.17 10:47
1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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합의기관 취지 무색 표결 의존, 설득ㆍ대안 없이 충돌 악순환

지난달 월성1호기 영구정지 결정도 위원들 반목으로 얼룩

안전ㆍ경제성 등 편향 시각 뚜렷… 5년전 朴정부 때와 판박이

박근혜 정부와 문재인 정부의 원전 갈등 쟁점. 사진은 경북 경주시 월성 원자력발전소 전경. 왼쪽부터 차례로 1~4호기다. 그래픽=김대훈 기자
박근혜 정부와 문재인 정부의 원전 갈등 쟁점. 사진은 경북 경주시 월성 원자력발전소 전경. 왼쪽부터 차례로 1~4호기다. 그래픽=김대훈 기자

원전 정책을 둘러싼 갈등이 5년 넘게 이어지면서 문재인 정부의 갈등 조정 능력이 도마에 오르고 있다. 지난 2015년 수명연장으로 결정된 경북 경주시 월성 원자력발전소 1호기가 다시 영구정지로 뒤집어지면서 ‘친원전-반원전’ 대립은 이념과 진영 대립으로 굳어졌다. 사용후핵연료(원전에서 전기를 생산한 뒤 남은 고준위 방사성폐기물) 문제도 정책 수립은 커녕 대안 없는 비판만 되풀이되고 있다. 원전 정책과 관련, 접점 찾기에 실패한 문재인 정부의 조정 역량은 박근혜 정부 때와 판박이란 지적까지 나오는 배경이다.

의견차 좁혀지지 않는데 표결 되풀이

지난 12월 원자력안전위원회의 월성 1호기 영구정지 의결에 대해 친원전 성향의 교수들로 구성된 ‘에너지 정책 합리화를 추구하는 교수 협의회(에교협)’는 최근 성명과 함께 의결 철회를 촉구했다. 에교협과 야당에선 “한국수력원자력이 정부의 탈원전 정책에 맞춰 월성 1호기의 경제성을 과소평가해 영구정지를 신청했는지에 대해 감사원이 감사 중인데도 원안위가 결정을 밀어붙였다”고 비판하고 있다. 반면 반원전 측은 “경제성은 영구정지 심의 대상이 아니다”라고 맞서고 있다. 지난달 원안위 회의에서 찬반 의견은 의결 직전까지도 전혀 좁혀지지 않았지만, 원안위는 표결을 선택했다.

이런 분위기는 2015년 2월 월성 1호기에 대해 원안위가 수명연장 의결을 결정했던 시점에도 비슷했다. 당시 시민단체에선 성명을 내고 월성 1호기에 적용된 안전기술기준이 미흡하다며 결정 철회를 외쳤다. 반대로 친원전 측은 안전성은 충분히 확보됐다고 주장했다. 양쪽 의견 대립은 평행선을 달렸지만, 원안위는 최종 결정을 표결에 부쳤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원안위의 역할론에 대한 회의적인 시각도 나온다. 불과 5년여만에 동일한 원전에 대한 정반대의 결정을 극심한 찬반 대립에도 불구하고 표결로 통과시킨 원안위의 설립 취지가 무색하단 평가에서다. 합의제기관으로 설립된 원안위가 심의 대상 사안에 대한 상반된 이해를 조정하고 충분한 토론이 이뤄질 수 있도록 해야 하는데, 민감한 안건을 합의가 아닌 표결로 정하는 상황을 되풀이하고 있기 때문이다. 한 원안위 위원은 “정말 중요한 결정이 표결로 가는 현실이 안타깝다”며 “상대를 설득시켜 합의를 이끌어내는 기술과 훈련이 필요한 시점”이라고 말했다.

원안위 위원 구성에서 재현 중인 반목도 비슷하다. 5년 전, 수명연장 결정 당시 원안위 회의에는 당연직 공무원 2명과 비상임위원 7명이 참석했는데, 비상임위원 7명 중 4명이 원자력 관련 전공자였다. 영구정지를 결정한 최근 회의에선 당연직 2명과 비상임위원 5명이 표결했고, 5명 중 원자력 관련 전공자는 2명이었다. 5년 전엔 반원전 측이 “원안위 구성은 친원전 인사 중심이다”며 편파적이라고 비난했고, 이번엔 친원전 측이 “원안위에 원자력 전문가가 없다”며 정반대로 날을 세웠다. 원안위법은 다양한 분야의 전문가들이 위원에 포함돼야 한다고 규정하고 있다.

결국 양측이 각자의 논리만을 앞세우면서 5년 전과 동일한 극단적 대립 상황을 재현하고 있는 꼴이다. 논점에서 벗어나 상대방을 폄훼하는 일부 위원들의 태도 역시 도돌이표다. 과거 수명연장 심의 회의에서 환경단체 출신 한 위원은 원자력 관련 전공자 위원들을 향해 “표결 외에는 관심이 없냐”며 비난 수위를 높였다. 지난달 영구정지 표결 회의에서 원자력을 전공한 한 위원이 안건 관련 내용을 설명하던 원안위 보고자에게 “무슨 자격으로 그렇게 길게 얘기하냐”며 핀잔을 준 것도 ‘묻지마 대립’의 연장선으로 보였다.

양측의 충돌은 상반기 나올 것으로 보이는 감사원 감사 결과와 내달 14일로 예정된 법원의 2심 판결에 따라 악화할 가능성이 다분하다. 감사 결과가 한수원이 월성 1호기 경제성을 축소했다고 나올 경우 친원전 측은 영구정지 결정의 부당성을 주장할 게 뻔하다. 또 월성 1호기의 수명연장 절차가 위법하다고 한 1심 판결이 2심에서 유지된다면 반원적 측은 영구정지의 당위성을 내세울 기세다. 5년 만에 결정을 뒤집은 원안위는 이런 상황 속에서도 한수원의 신청에 대해 절차대로 심의했을 뿐이란 입장만 고수하고 있다.

엄재식(맨 왼쪽) 원자력안전위원회 위원장이 지난 12월 24일 서울 광화문 원안위 회의실에서 112회 회의를 주재하고 있다. 이날 원안위는 월성 원자력발전소 1호기 영구정지안을 의결했다. 한국일보 자료사진
엄재식(맨 왼쪽) 원자력안전위원회 위원장이 지난 12월 24일 서울 광화문 원안위 회의실에서 112회 회의를 주재하고 있다. 이날 원안위는 월성 원자력발전소 1호기 영구정지안을 의결했다. 한국일보 자료사진

출범·탈퇴 반복하는 사용후핵연료 공론화

사용후핵연료 정책에서도 지난 정부의 실패가 반복될 지 모른다는 우려가 적지 않다. 박근혜 정부는 사용후핵연료 영구처분시설을 2053년 가동하겠다는 내용의 ‘고준위방사성폐기물 관리 기본계획’을 수립했지만, 일방적인 정책이라는 비판을 받았다. 문재인 정부는 다양한 의견을 수렴해 이를 재검토하겠다고 지난해 5월 ‘사용후핵연료 관리정책 재검토위원회’를 출범시켰다. 그런데 최근 재검토위 내 전문가검토그룹에 참여한 일부 인사들이 “재검토 과정이 겉핥기식 요식 행위에 불과한 헛발질”이라는 원색적 비판과 더불어 탈퇴를 선언했다. 산업통상자원부 관계자는 “나와 다른 생각은 잘못됐다는 식의 비판이 굉장히 아쉽다”며 “대승적인 차원에서 다시 참여해줄 것을 요청하고 있다”고 말했다.

박근혜 정부의 기본계획 수립 전 활동했던 ‘사용후핵연료공론화위원회’ 또한 구성이 편파적이라며 일부 시민단체 인사들이 참여를 거부해 ‘반쪽짜리’라는 평가를 받았다. 이를 의식해 제대로 된 공론화를 해보겠다고 문재인 정부가 만든 재검토위 역시 지난 정부와 비슷한 양상이 불거진 셈이다.

뜨거운 감자인 신한울 3·4호기에 대해서도 정부는 손을 놓고 있다. 박근혜 정부가 결정한 신한울 3·4호기 건설은 문재인 정부 출범 후 탈원전 기조와 함께 설계 단계에서 중단됐다. 원자력계에선 “신한울 3·4호기 건설 재개를 청원하는 국민 서명이 57만명을 넘었는데도 정부는 묵묵부답이다”며 각을 세우고 있다. 첨예한 원전 갈등이 이어지는데도 정부의 적극적인 조정자 역할이 보이지 않는다는 게 원자력계 안팎의 공통된 시각이다. 에너지 분야의 한 대학 교수는 “원전 정책은 정무적 판단에 매달려선 안 된다”며 “해야 할 일을 포기하는 무책임을 정부는 부끄러워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임소형 기자 precare@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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