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혈세가 투입된 공공 캐릭터가 외면 받고 있다. 울산 중구가 대표 브랜드로 내세운 ‘울산큰애기’의 경우 많은 예산을 들여 조형물을 설치하고 홍보물을 제작하고 있지만 대다수 주민은 존재 자체를 모른다. 젊음의거리에 설치된 큰애기 캐릭터
12일 젊음의거리 맨홀 뚜껑에 울산큰애기 그림이 그려져 있다.
문화의거리에 설치된 조형물. 2m가 넘는다.

"궁핍하던 시절에도 상대적으로 경제 형편이 좋았던 곳. 이에 이 지역 처녀들은 유난히 피부가 곱고 성품이 상냥하여 외지인들이 울산큰애기로 불렀다."

‘울산큰애기’는 울산 중구를 대표하는 캐릭터다. 그런데 ‘큰애기’라는 명칭부터 가부장적인 느낌을 준다. 국어사전에서 큰애기는 ‘다 큰 처녀’ 또는 ‘맏며느리를 정답게 부르는 말’ 정도로 풀이된다. 소개 문구 또한 여성을 외모로 평가하거나 전근대적 여성상을 미화하는 듯한 표현이 등장한다. 경제력에 따른 차별적 요소도 눈에 띈다. 울산 중구 문화의 거리에 설치된 울산큰애기 조형물 안내문에 그렇게 쓰여 있다.

울산 중구는 2016년 9월 빨간 원피스 차림에 머리를 두 갈래로 딴 울산큰애기를 지역 대표 캐릭터로 정하고 홍보에 적극 활용하고 있다. 유동인구가 많은 시내 중심가에 울산큰애기 조형물 40여개를 설치하고 맨홀 뚜껑에도 그려 넣었다. 주제가와 뮤직비디오는 물론 2억 7천만원짜리 드라마까지 제작해 온라인에서 방영하고 있다. 관련 홍보, 시설물을 따져봤을 때 중구가 ‘2019 올해의 관광도시’로 선정돼 배정받은 국비와 시비 30억 원 중 많은 부분을 ‘울산큰애기 키우기’에 투자한 것으로 보인다.

12일 시계탑거리에 설치된 조형물 옆으로 시민들이 지나가고 있다.
주정차단속 장치에 매달려 있는 조형물.
큐빅광장에 설치된 조형물.

들인 예산에 비해 주민의 반응은 싸늘하다. “한 기당 1,000만원 정도 드는 조형물 설치 요청이 빗발치는데도 예산 확보를 못 해 행복한 고민에 빠졌다”는 중구의 입장과 달리 대다수 주민이 존재 자체를 몰랐다. 주민 박상일(41)씨는 12일 “울산에서 20년째 살고 있는데 ‘큰애기’라는 표현 자체를 잘 안 쓰는 것 같다”고 말했다. 문화의 거리 인근 식당 종업원 김모(23)씨도 울산큰애기에 대해 “처음 듣는 이름”이라며 “이 캐릭터가 관광객 유치에 도움이 되는지는 모르겠다”고 말했다.

데이터로 살펴본 온라인상의 반응은 더 참담하다. 15일 현재 2개의 유튜브 채널을 통틀어 구독자 수는 두 자릿수에 머물러 있고, 22건의 동영상 조회 수는 모두 합해도 6,000회가 채 안 된다. 이런 상황에도 일부 영상엔 ‘세금 낭비’를 지적하는 댓글이 달렸다.

더 이상한 일도 있었다. 지난해 10월 문화체육관광부가 주최하고 한국콘텐츠진흥원이 주관한 ‘우리동네 캐릭터 대상’에서 울산큰애기가 대상을 받은 것이다. 이 행사에는 총 85개 공공기관 및 지방자치단체가 참가했다. 대회 자체에 대한 일반인의 인지도가 낮다 보니 실제 인기보다 기관의 동원력이 결과에 영향을 미친 것으로 보인다. 실제로 울산 중구는 구청장이 직접 나서 투표를 독려하고 지역 언론 등 다양한 홍보 채널을 동원한 것을 대상 수상의 요인으로 꼽는다. 중구 관계자는 “울산큰애기 스토리가 요즘 정서와 맞지 않는 부분이 있지만 아껴 주시며 좋아하시는 지역 주민 분들도 많다”며 “부족한 예산에도 캐릭터를 개선하고 발전시키기 위해 노력하는 중”이라고 밝혔다.

제작 목적이나 구체적인 활용 방안 없이 ‘복사 붙이기’식으로 캐릭터를 제작하게 되면 효과를 거두기 어렵다. 쉽게 구분하고 기억하기 힘든 캐릭터들. 왼쪽 위부터 차례로 해양수산부 해랑이, 기상청 기상이, 산업통상자원부 노잉, 법제처 새령, 국토교통부 통통, 코트라 글로비, 한국중부발전 에코미.
지역이나 기관의 특색, 문화와 상관 없이 제작되는 캐릭터도 주목 받기 힘들다. 거북이와 직접 관련 있는 기관이나 지자체는 거의 없다. 하지만 여러 기관들이 거북이를 캐릭터로 사용하고 있다. 왼쪽 위부터 차례로 한의학연구원 키오미, 안전보건공단 안젤이, 국민체육진흥공단 키키, LX국토정보공사 랜디, 충북 음성군 거돌이, 경남 김해시 해동이, 경기 시흥시 토로 , 충남 청양군 황금 복 거북이.
지난해 10월 한국콘텐츠진흥원이 부산 벡스코에서 개최한 ‘우리동네 캐릭터 대상’ 경연 대회에서 전체 공공 캐릭터가 포즈를 취하고 있는 모습. 이 대회에는 85개 공공기관과 지자체가 참가했다. 한국콘텐츠진흥원 제공

한국콘텐츠진흥원에 따르면 2018년 12월 기준 전국 공공 캐릭터는 총 525개에 달한다. 그러나 구체적인 목적이나 활용 방안 없이 ‘다른 기관이 하니까 우리도 한다’는 식으로 무작정 만들어 내는 경우가 많고 ‘복사 붙이기’에 의해 비슷비슷한 캐릭터가 쏟아지다 보니 캐릭터 인지도는 바닥 수준에 머물고 있다. 공공 서비스 이용자에 대한 배려보다 기관의 시각이 주로 캐릭터에 반영된 것도 외면을 받을 수밖에 없는 이유다.

기관의 장이 바뀌거나 조직이 개편될 때마다 캐릭터의 운명이 달라지는 점도 문제다. 캐릭터 도안에만 많게는 수천만 원의 비용이 들고 상품이나 이모티콘을 추가하면 더 많은 예산과 인력이 투입되지만 결정권자의 의지에 따라 한순간 사장되는 경우가 흔하다. 대표적인 예로 서울시의 ‘해치’를 들 수 있다. 오세훈 전 서울시장이 재임할 당시 만든 해치는 박원순 시장 취임 이후 그 흔적조차 찾기 어려워졌다. 해치는 오 전 시장 재임 당시 제작부터 홍보까지 50억 원이 넘는 예산이 들어갔다. 소방방재청이 2014년 9월 공모전을 거쳐 만든 민방위 캐릭터의 경우 두 달 뒤 조직이 국민안전처에 흡수되면서 사라지고 말았다.

브랜드 컨설턴트 최낙원 브랜딩리드 대표는 “공공기관과 지자체가 각자 처한 상황이 다른데도 ‘일단 만들고 보자’는 식이 대부분”이라며 “무조건 ‘예쁘고 귀엽게만 만들면 된다’는 접근을 벗어나 왜 만들어야 하는지, 어디에, 어떻게 사용할지를 구체적으로 설정하고 섬세한 스토리도 넣어야 한다”고 지적했다.

김주영 기자 will@hankookilbo.com

박지윤 기자 luce_jyun@hankookilbo.com

이동진 인턴기자

10일 오후 서울 중구 남산광장을 찾은 한 관광객이 해치 조형물에 기대어 휴식을 취하고 있다.
해치 조형물 뒤통수 부분에 낙서가 돼있는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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