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자 크기 설정

 <3>일본인의 못 말리는 스포츠 사랑 
일본에서 아베 내각을 둘러싼 각종 정치스캔들이 터져 나오고 있지만, 신문들은 도쿄 올림픽 특집판을 내며 올림픽 열기를 띄우는 데만 여념이 없다. 박철현 제공

“왜 고쿠가쿠인(國學院) 대학은 2위나 했는데 아무도 말을 안 해?!”

2020년 1월 2일 오후 아내의 짜증내는 목소리에 눈을 떴다. 전날 아이들과 밤 늦게까지 놀았다. 아이들 재운 뒤 밀린 원고를 쓰느라 새벽 늦게야 잠이 들었다. 조금 더 자고 싶었지만 아내가 몇 번이나 큰 소리로, 정말 화를 내길래 일어날 수밖에 없었다. 왜 그래, 라고 물으며 그의 시선을 따라가니 제96회 도쿄-하코네 에키덴(駅伝, 역전) 마라톤 중계가 막 끝나고 해설자들의 전망이 나오고 있었다.

 ◇모교 마라톤 대회 성적에 울고 웃는 일본인들 

아내가 졸업한 고쿠가쿠인 대학 선수가 도쿄-하코네 구간을 전체 2위로 끝마쳤는데, 방송을 중계한 니혼TV의 해설자들은 1등을 한 아오야마가쿠인(青山学院) 대학과 3위인 도카이(東海) 대학 선수에만 포커스를 맞추고 있었던 것이다.

아내의 주장은 자신의 모교 선수가 첫날 2위를 했으니, 다음날 1월 3일 하코네-도쿄 구간에 대해서는 2위 선수가 1위를 할 수 있을지에 대해 얘기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해설자들이 3위인 도카이 대학 선수가 1위 아오야마가쿠인 대학 선수를 이길 수 있을까에만 주목하는 게 부당하다는 얘기다. 학교 졸업한 지 20년도 넘었는데 뭐 저런 것에 신경 쓰나 싶었는데, 큰딸까지 가세했다.

“확실히 말도 안돼. 저건 고쿠가쿠인 대학에 대한 따돌림 아닌가?”

“그렇지? 너도 그렇게 생각하지?”

아내 말에 맞장구 치는 큰딸 미우의 손에는 알루미늄 배트가 들려 있다. 방금 막 배트 휘두르기 연습을 끝내고 오던 참이었다.

미우가 속한 미나미중학교 소프트볼부 코치는 겨울방학 되기 전 메뉴 하나를 건넸다. ‘자율연습’이라고 적힌 그 종이에는 ‘배트 휘두르기 1만번을 달성할 것’이 명시돼 있다. 배트 스피드의 향상을 위해서라고 한다.

방학 전 코치는 전 부원들에게 각자의 목표를 물었고, 미우가 매 게임마다 홈런을 치고 싶다고 하자 “그러기 위해서라면 배트 스피드가 빨라야 한다”며 자율연습을 명했다 한다.

어차피 올해는 중3 수험생이라 5월 대회까지만 하고 관둘 소프트볼인데 굳이 그렇게까지 해야 하나 싶었지만, 본인이 원하니 말릴 수 없다. 소프트볼뿐만이 아니다.

미우는 다음달 2일 열리는 도쿄중학교 에키덴 마라톤 대회에도 출장한다. 5월이 지나면 빼도 박도 못하는 고입 수험생인데 이래도 될까 싶다. 겉으로는 아무 말도 않지만 속으로는 걱정이 된다. 그런데 미우는 무사태평이다. “다 비슷하니까 괜찮아. 5월부터 공부하는 게 보통이니까.”

일본 중학생들은 고교 입시가 코앞에 닥쳐도 운동 서클 활동이 먼저다. 일본인들의 스포츠 사랑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박철현 제공
 ◇고교 입시 준비는 뒷전, 운동 서클이 먼저 

출발점은 똑같단 얘기다. 물론 명문 사립고등학교에 들어가려고 미리 공부하는 친구들도 있지만 대개는, 특히 스포츠부 활동을 하는 학생들은 3학년 5월, 혹은 7월 여름방학 전까지 시합에 출전하고 그 이후부터 수험공부를 한다.

아내도 그랬다고 한다. 중학교 때 검도부 소속이었던 아내 역시 중3 춘계대회를 끝내고 수험공부를 했고, 고등학교에 가서는 지겨워진 검도 대신 합기도를 배웠다. 고2 때까지 학업과 합기도부 활동을 병행하다가 고3 때부터 본격적인 수험생 생활을 했다.

어렸을 때부터 이런 생활을 스스로 하니 일본 사람들은 스포츠를 무척 좋아한다. ‘고시엔’이라 불리는 하계전국야구대회가 열리면 모든 관심이 여기에 쏠린다. 졸업한 지 수십 년이 지난 아저씨들도 모교가 본선에 오르면 버스를 대절해 응원하러 간다.

덴노배 전일본축구대회 결승전은 반드시 1월 1일에 열리고 NHK가 중계방송을 한다. 올해는 빗셀 고베가 이겼다. 도쿄-하코네 에키덴 마라톤 대회는 1920년, 덴노배 축구대회는 1921년 시작된 역사가 어마어마한 대회다. ‘문무양도’는 메이지 시대 이래 일본에서는 당연한 교육이념으로 자리잡았기 때문에 더 그런지도 모르겠다.

 ◇벚꽃 스캔들도 덮어버린 올림픽 열기 

그래서 나는 도쿄올림픽에 대한 일본사회의 과도한 관심과 기대를 약간은 이해하는 편이다. 새해 첫날 배달된 아사히신문은 도쿄올림픽 특집판을 실었다. 과거 올림픽에서 활약했던 스포츠 선수들 인터뷰는 물론, 도쿄올림픽의 유망주들을 다뤘다. 일본의 종합일간지 가운데 상대적으로 진보적, 양심적이라는 아사히신문마저 올림픽 광풍에 휩쓸리나 싶다. ‘아사히신문마저’라는 이유는 있다.

먼저 올림픽 대회 자체의 문제다. 야구경기가 열리는 종합경기장은 인근 지역에 방사능폐기물을 모아둔 쓰레기가 있었다. 지금은 쓰레기를 치웠지만, 토양오염 여부는 여전히 알 수 없다. ‘올림픽의 꽃’이라 할 마라톤은 무더위 문제 때문에 홋카이도 삿포로에서 연다. 도쿄만 수질오염 문제 때문에 철인 3종 경기를 정상적으로 치를 수 있을지도 의문이라 한다.

지난해 8월 방사능올림픽이라는 이유로 도쿄 올림픽을 반대하는 시민단체 회원들이 서울 일본대사관 앞에서 시위를 벌이고 있다. 한국일보 자료사진

더 큰 문제는 올림픽 때문에 여러 정치적 스캔들이 묻히고 있다는 점이다. 아베 신조 총리가 지난해 4월 개인적으로 개최한 1만 8,000명 규모의 ‘벚꽃을 즐기는 모임’에 내각부 예산을 사용하고 극우인사는 물론 조직폭력단 출신 간부마저 초대했다던 ‘벚꽃 스캔들’. 아키모토 쓰카사(秋元司) 참의원 등 자민당 중진 의원들의 카지노 종합 리조트 관련 불법 뇌물 수수 스캔들. 여전히 남아 있는 개헌 강행의 불씨. 최근 부쩍 늘고 있는 ‘아베노믹스’에 대한 부정적 평가. 이 모든 문제를 도쿄올림픽으로 덮는 것 아니냐는 얘기다. 특히 이 문제를 집요하게 추적해온 아사히신문이 갑자기 도쿄올림픽 특집판을 선보였으니 어리둥절할 수도 있다.

 ◇잘 나가던 시절 향수 올림픽에 투영 

그런데 생각해보면 2002년 한일월드컵 이후 일본에서 열리는 세계적 규모의 대회는 도쿄올림픽이 처음이다. 2011년 동일본대지진 이후 후쿠시마 발전소 문제가 여전한 가운데, 그래도 어느 정도 괜찮아졌다고 알리고 싶어하는 일본사회의 자존심일까. 아니면 쇼와 시대 고도성장기를 이끈 1964년 도쿄올림픽의 기억을 다시 되새겨보고 싶은 것일까. 성장동력이 보이지 않는 고령화된 일본사회를, 도쿄올림픽을 계기로 다시 한번 일으켜 세우고 싶은 것일까.

하긴 일본은 종종 스포츠를 통해 일본사회의 단합을 꾀하긴 했다. 럭비 월드컵, 피겨 그랑프리, 세계육상 선수권, 세계수영 선수권, 프리미어12 등등 이 굵직굵직한 단일 종목 스포츠 대회들은 비록 그것이 일시적인 자극에 불과하다 할지라도 일정한 역할을 담당했다. 그 단일종목들을 총망라한 올림픽이니 이 정도 흥분은 이해해 주고 싶다.

[저작권 한국일보] 지난해 10월 첫 선을 보인 2020 도쿄올림픽 개막식이 열릴 메인스타디움. 도쿄= 고영권기자

제96회 도쿄-하코네 에키덴 마라톤 종합 순위는 결국 니혼TV 해설자들 예상대로 1위 아오야마가쿠인 대학, 2위 도카이 대학, 3위 고쿠가쿠인 대학 순으로 결정됐다. 해설자들은 아마 돌아오는 구간(하코네-도쿄)에 출전하는 선수를 종합적으로 분석해 첫날 2위인 고쿠가쿠인 대학이 아니라 3위인 도카이 대학을 거론했고, 실제 결과도 그렇게 나왔다.

처음엔 억울해했던 아내가 이내 마음이 풀렸는지 “와! 그래도 3위야. 내년 시드권도 획득했고, 정말 어떻게 저렇게 강해졌지?”라며 하루 종일 활짝 웃으며 지냈다. 20년 전 졸업한 모교가 꼴찌를 하든 1위를 하든 도대체 무슨 상관이냐 싶지만, 일시적인 만족이 하루치 가정의 안녕을 가져다 준다면 대단히 만족한다.

하지만 도쿄올림픽은 솔직히 걱정이다. 지금 일본은 올림픽 단 하나만 보고 있는 중이다. 폐회식이 열리는 8월 9일까지 일본 사회 전체가 이대로 뜨거워질 것이다. 그런데 올림픽이 끝난 뒤 찾아올 게 뻔한 사회적 허무감은 어떻게 극복할 생각인지 잘 모르겠다.

정치권은 물론, 언론조차 도쿄올림픽 이후는 논하지 않는다. 뭐 알아서 잘 하겠지. 도쿄올림픽이 잘되든 못되든 우리 가족과 무슨 상관이겠는가. 중3 수험생인 미우가 그 동안 각종 스포츠를 통해 갈고 닦은 강건한 체력을 바탕으로 자신이 가고 싶어하는 좋은 고등학교에 들어가는 게 훨씬 더 중요하지. 오늘도 미우는 알루미늄 배트를 휘두른다.

 박철현 작가 
박철현 작가.

박철현 작가는 중앙대 영화학과를 졸업한 후 2001년 일본으로 건너갔다. 저널리스트를 비롯해 게임플래너, 술집 주인 등 다양한 직업을 경험하다 현재는 인테리어 업체 대표로 일하고 있다. 일본인 아내와 결혼해 네 명의 아이를 뒀다. 일본 생활 이야기를 담은 ‘일본 여친에게 프러포즈 받다’ ‘어른은 어떻게 돼’ ‘이렇게 살아도 돼’ 같은 에세이를 냈다. ‘화이트리스트-파국의 날’을 쓴 소설가이기도 하다.

web_cdn

공감은 비로그인 상태에서도 가능합니다

저작권자 © 한국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