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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를 읽는다는 건 시인이 발견한 하나의 세계를 읽는 일이다. 그 세계는 독자가 전혀 상상하지 못한 충격적인 세계일 수도, 어렴풋이 느꼈으나 미처 언어화하지 못한 세계일 수도 있다. 시와 만나며 독자의 세계는 확장되고, 정밀해지고, 뒤엎어진다.

한눈에 훑어 읽을 수 있는 짧은 시 한 편에 하나의 세계가 담겨 있고, 그 세계를 만난 독자가 변화한다는 사실은 대단한 사건이다. 단 하나의 언어와 빛과 소리와 몸짓이 보는 이를 움직이게 한다는 건…. 예술은 감각의 손끝으로 들어와 존재를 뒤흔든다. 수용자의 감수성뿐 아니라 인식과 행동까지 변화시킨다.

이 시 역시 독자의 감수성을 흔들어 시를 만나기 이전과 이후를 가른다. ‘풀’과 ‘멍’이라는, 전혀 다른 공간에서 지내던 두 단어가 ‘풀 멍’으로 만났다. ‘풀’도, ‘멍’도,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쉽고 흔한 단어인데 ‘풀 멍’으로 이어지니 갑자기 낯설어진다. 발음부터 익숙하지 않다. 가운데 구멍이라도 난 듯, 한 칸 띄어쓰기 한 채 나란히 놓인 두 글자도 처음 보는 것만 같다.

발음과 문자가 그토록 어색하다면 의미는 어떤가. 대체 ‘풀 멍’은 무슨 뜻이며 시인은 왜 ‘풀 멍’ 같은 언어를 만들어 내어 시를 썼을까. ‘풀 멍’의 세계는 무얼까.

시작은 ‘풀’도 ‘멍’처럼 푸르스름한 빛깔이라는 데 있을 테다. 하지만 그건 ‘발상’일 뿐 아직 ‘세계’가 아니다. 집을 만드는 주춧돌 하나에 불과하다. (주춧돌 하나만 덩그러니 놓인 동시가 점점 많아지지만) 이 시는 봄이 오자 잔디밭이 푸르러지는 풍경을 풀이 멍드는 걸로 보았다. 이 상상이 한낱 억지스러운 우스개에 그칠지 신선한 설득으로 독자의 감수성을 자극하며 새로운 세계를 만들어낼지는 발상이 아닌 시 전체에 달려 있다.

봄비, 햇살, 새, 고양이, 개, 아이들로 점층하는 무게에 따라 점점 푸르러지는 풀, 점층하는 무게와 흐르는 시간의 결말, ‘멍’이라는 단어에 어쩌면 깃들어 온 폭력성의 삭제, 폭력이나 억압이 아닌 두드림의 뜻을 지닌 누름과 그에 반응하는 일어섬, 작은 존재들이 함께 이루어내는 봄. 이 모든 것이 어우러져 비로소 ‘풀 멍’의 세계가 완성된다.

며칠 겨울비에 추적이다가 ‘풀 멍’을 읽고 잠시 보송해져 그래도 또 봄은 오겠구나 싶었으니, 이만한 선물을 어디서 받을 수 있을까.

김유진 어린이문학평론가ㆍ동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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