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영민칼럼]문재인 정부와 가야사 … ‘절제’가 정치권력의 성숙함이다

입력
2020.01.06 04:40
28면

 

 [한국이란 무엇인가] <6>역사와 정치 

 ※ ‘칼럼계의 아이돌’이라 불리는 김영민 서울대 정치외교학부 교수가 한국의 정체성, 역사, 정치, 사상, 문화 등 한국에 대한 근본적 물음을 찾아 나섭니다.‘한국일보’에 3주 간격으로 월요일에 글을 씁니다. 

지난 3월 경북 고령 지산동 고분군 무덤 발굴 현장에서 나온 대가야 흙방울 사진. 유적을 발굴한 대동문화재연구원은 ‘구지가’로 대표되는 가야 김수로왕 건국신화의 이야기를 그림으로 풀어낸 유물이라 주장했으나 학계에선 억지주장이라고 일축해 논란이 이어지고 있다. 학계에선 문재인정부가 가야사 복원을 국정과제로 지정하면서, 연고 유적이 있는 지방자치단체들이 제대로 된 검증 없이 ‘가야사 만들기’에 매달리고 있다고 우려하고 있다. 문화재청 제공
지난 3월 경북 고령 지산동 고분군 무덤 발굴 현장에서 나온 대가야 흙방울 사진. 유적을 발굴한 대동문화재연구원은 ‘구지가’로 대표되는 가야 김수로왕 건국신화의 이야기를 그림으로 풀어낸 유물이라 주장했으나 학계에선 억지주장이라고 일축해 논란이 이어지고 있다. 학계에선 문재인정부가 가야사 복원을 국정과제로 지정하면서, 연고 유적이 있는 지방자치단체들이 제대로 된 검증 없이 ‘가야사 만들기’에 매달리고 있다고 우려하고 있다. 문화재청 제공

대한민국 헌법 제3조에 따르면, 대한민국 영토는 한반도와 그 부속 도서로 한다. 한반도에 사는 이들이 그럭저럭 같은 부류의 사람들이라는 생각은 언제부터 생겼을까? 한반도 사람들이 포괄적인 집단 정체성을 가지기 시작한 것은 언제부터일까? 676년 신라의 삼국통일 이전에 신라 고구려 백제 간에 자신들이 하나의 민족이라는 의식이 있었을까? 역사가들 사이에 이런 문제들에 관한 확고한 합의는 아직 없다.

삼국통일 이후에, 신라의 엘리트들이 자신이 삼한(三韓)을 통일했다는 의식, 이른바 “일통삼한”(一統三韓) 의식을 가졌던 것은 분명해 보인다. 그러나 그 의식이 언제부터 누구에게 어느 정도 공유되었는지 정확히 알기는 어렵다. 삼국통일을 소재로 한 이준익 감독의 영화 ‘황산벌’의 주인공 “거시기”는 민초(民草)이기에 그저 살아남는 것이 관심일 뿐. 삼한을 통일하는 중인지 여부는 중요하지 않다. 집단 정체성과 같은 사안은 당시 민중들의 관심사라기보다는 지배 엘리트의 관심사였을 공산이 크다.

많은 이들이 여전히 “삼한”을 국가라고 여기지만, 사학자 기경량의 최근 연구에 따르면, “일통삼한”에 나오는 “삼한”(마한 진한 변한)이란 표현은 국가나 민족의 명칭이 아니라 지역의 명칭이었다. 게다가 그 “삼한”은 신라가 자신의 영역이라고 여기고 싶어 한 것만큼이나, 수나라와 당나라 역시 자신의 영역이라고 주장하고 싶은 지역이었다. 그래서 수, 당나라 사람들은 한반도에 군사원정을 하면서, 한때 자신들의 영토였던 “실지”(失地) 회복이라고 주장하였다. 그들은 “삼한”을 “과거 위대한 한(漢) 제국의 영향력 아래 있었지만 지금은 이역이 된 특정 지리적 공간”이라고 보았던 것이다. 마치 오늘날 한국인 중 상당수가 만주를 한때 고구려 땅이었기에 되찾아야 할 공간으로 생각하듯이.

삼국통일을 다룬 이준익 감독의 영화 ‘황산벌’의 한 장면. 전투에 참가한 민초들은 그저 살아남는 게 중요했을 뿐, 삼국통일로 하나의 정체성을 가지게 됐는지는 의문이다. 한국일보 자료사진
삼국통일을 다룬 이준익 감독의 영화 ‘황산벌’의 한 장면. 전투에 참가한 민초들은 그저 살아남는 게 중요했을 뿐, 삼국통일로 하나의 정체성을 가지게 됐는지는 의문이다. 한국일보 자료사진

신라가 삼국통일을 했다는 것은 초등학교 교과서에 나올 정도로 자명한 사실인데, 새삼 무슨 이야기냐고? 그러나 역사적 사실은 정치 권력이 군침을 흘리는 교과서 내용보다 항상 더 복잡하다.

일단, 삼국통일이라니? 신라가 이른바 “삼한”을 통일하기 이전에, 민족의식은커녕 과연 삼국시대라는 것이 존재하기나 했을까? 대부분의 한국사 서적들은 기원전 1세기부터 7세기 중반까지를, 좁게는 4세기에서 7세기 중엽까지를, 삼국시대라고 부른다.

그런데 그 시기가 삼국시대라고 불린다고 해서, 당시 한반도에 세 나라만 존재했던 것은 아니다. 안라국(安羅國), 구야국(狗邪國), 목지국(目支國), 남가라(南加羅), 탁국(啄國), 다라(多羅), 탁순(卓淳), 가라(加羅), 비자벌(比自㶱), 반파국(伴跛國) 등 이름을 다 외우기 어려울 정도로 많은 소국이 당시에 존재했으며, 신라와 백제는 원래 그러한 소국들 중 일부에 불과했다.

장차 통일이 되어 하나의 나라로 살게 될 것을 미리 알고, 그 소국들이 사이 좋게 지냈으면 얼마나 좋았으랴. 국립중앙박물관에서 열리고 있는 ‘가야본성’ 전시에서는 그러한 소망을 담기라도 한 듯, 소국들의 “공존과 화합”을 강조하였다. “여러 가야가 함께 어우러져 살았고(공존), 수백 년간 공존을 지킬 수 있었던 이유가 철(칼)을 다루는 기술을 갖고 있었기 때문”이라고 안내한다.

그러나 칼은 무기이며, 전쟁 도구이다. 만약 칼을 들고 서로 싸우지 않고, 정말 공존과 화합에 주력하였다면 이른바 우리가 아는 삼국시대는 아예 시작도 할 수 없었을 것이다. 소국들이 전쟁 중이었기에, 신라와 백제가 다른 소국들을 병합해나갈 수 있었고, 그 결과 비로소 “삼국”이 존재하게 된 것이다.

3월까지 열리는 국립중앙박물관의 '가야본성-칼과 현' 특별전에 전시되는 국보 138호 가야 금관. 경북 고령에서 출토된 것으로 추정된다. 이번 전시에는 학술적 검증이 안 된 논란의 대가야 흙방울, ‘설화 속 인물’ 허왕후가 인도에서 가져 왔다는 ‘파사석탑’을 대표 유물로 전시해 논란이 커지고 있다. 국립중앙박물관 제공
3월까지 열리는 국립중앙박물관의 '가야본성-칼과 현' 특별전에 전시되는 국보 138호 가야 금관. 경북 고령에서 출토된 것으로 추정된다. 이번 전시에는 학술적 검증이 안 된 논란의 대가야 흙방울, ‘설화 속 인물’ 허왕후가 인도에서 가져 왔다는 ‘파사석탑’을 대표 유물로 전시해 논란이 커지고 있다. 국립중앙박물관 제공

‘삼국지 위서 동이전’에 따르면 3세기 때만 해도 한반도에는 적어도 78개의 소국이 존재했다. 아무리 일찍 잡아도 삼국시대라는 현실은 4세기부터나 시작된다. 4세기에 이르러도 그 소국들이 다 사라진 것도 아니었다. 존재감이 뚜렷했던 소위 “가야”는 백제보다 불과 98년 앞선 562년에 가서야 멸망한다. 이른바 삼국시대란 6세기 중반에서 7세기 중반까지 약 100년 정도에만 잘 적용될 수 있는 표현인 것이다.

사학자 김태식은 가야의 존재를 고려하여 아예 삼국시대가 아니라 사국시대라는 표현을 쓰자고 주장하기도 한다. 그런데 정작 숫자로만 따지고 들면, 78개의 소국이 있던 시절은 78국 시대라고 해야 하지 않을까? 강대국 숫자로만 따지고 들면, 4세기 후반에는 고구려와 백제라는 두 강국이 경쟁하는 구도였으니, 그때는 2국 시대라고 불러야 할지도 모른다.

이렇게 복잡한 역사적 사실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왜 삼국시대라는 것을 당연시하게 된 것일까? 일단, 오늘날 학자들이 가지고 있는 “국가” 개념에 고구려 신라 백제가 좀 더 잘 들어맞기 때문이다. 고구려 신라 백제에 비해 가야는 중앙집권 정도가 약해서 같은 수준의 국가로 부르기 어렵다는 견해가 있다. 그러나 반론도 있다. 신라도 6세기 전반에 이르기까지 중앙집권 정도가 약하기는 마찬가지였는데, 왜 가야만 차별하느냐는 것이다.

과연 그뿐일까? 한 역사학 논문의 보고에 따르면, 홀수가 좋다는 단순한 이유 때문에 사국시대는 안되고 삼국시대 혹은 오국시대가 합당하다는 주장이 존재한다. 그뿐이랴. 사국시대는 죽을 사(死)자가 발음상 연상되어서 적절하지 않다는 주장도 존재한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삼국시대라는 틀은 김부식의 ‘삼국사기’의 영향을 받은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김부식의 관점은 보편적인 관점이라기보다는 고려 시대에 존재했던 하나의 관점에 불과하다. 조선 후기 한백겸의 ‘동국지리지’같은 책은 명시적으로 김부식의 삼국시대 틀을 버리고 가야를 포용하는 관점을 취하고 있다. 이렇게 복수의 관점이 존재하는데도 많은 이들은 어떤 이유에서인지 김부식의 관점을 수용해서 고구려 백제 신라를 보다 앞장세웠던 것이다.

권력자는 역사를 자기 입맛대로 재단하려는 유혹에 빠진다. 역사라는 상징자본을 내 편으로 만들면 권력의 정당성을 확보하기가 쉬워지기 때문이다. 지난 2015년 11월 서울 세종로 정부서울청사 앞에서 청소년단체 회원들이 박근혜정부가 추진해온 역사교과서 국정화 반대를 외치며 시위를 벌이고 있다. 한국일보 자료사진
권력자는 역사를 자기 입맛대로 재단하려는 유혹에 빠진다. 역사라는 상징자본을 내 편으로 만들면 권력의 정당성을 확보하기가 쉬워지기 때문이다. 지난 2015년 11월 서울 세종로 정부서울청사 앞에서 청소년단체 회원들이 박근혜정부가 추진해온 역사교과서 국정화 반대를 외치며 시위를 벌이고 있다. 한국일보 자료사진

역사적 단순화를 촉발하는 가장 큰 원인 중 하나는 역사에 대한 정치 권력의 지대한 관심이다. 정치 권력은 대개 무력으로 경쟁자를 진압하여 성립한다. 그러나 계속 칼부림을 하고 산다는 것은 강자 입장에서도 너무나 피곤하다. 빨리 싸움을 끝내고, 몸에 묻은 피를 씻고, “정당화”라는 이름의 아름다운 잠옷을 입고 낮잠을 즐기고 싶다. 그때 곧잘 동원되는 것이 종교이다. 종교의 권위를 빌어, 자신은 단순히 무력으로 집권한 것이 아니라, 신의 가호에 힘입어 권력을 쟁취했다고 주장한다. 신의 뜻이니 귀찮게 만들지 말고 알아서 기어달라고.

세속 국가에서 종교적 신념을 통해 정치 권력을 정당화하는 데는 한계가 있다. 종교 대신 동원할 수 있는 것이 역사이다. 역사는 결국 오늘의 사태에 의미를 부여하는 이야기이고, 누가 어떤 이야기를 하느냐에 따라 오늘의 사태는 달리 보인다. 그래서 정치 권력은 자신이 원하는 정치적 메시지를 역사서에 담고 싶어한다. 지난 정권에서 벌어진 한국사 교과서 국정화 사태가 그 비근한 사례이지만, 역사를 자기 식대로 먹어 치우고자 하는 정치 권력의 욕망은 어디서나 흔히 찾을 수 있다. 왕조 교체 이후 새로이 들어선 집권자들은 늘 자신에게 유리한 관점에서 지난 왕조사를 서술하고 싶어 했으며, 심지어 테러단체 IS조차도 자신의 권력을 정당화하고 외부세계에 대한 적개심으로 가득 찬 역사책을 편찬하려 들었다.

현 정부는 이른바 촛불혁명이라는 매우 극적인 과정을 통해 집권했다. 지난 정권의 과오가 분명한 만큼, 그 과오로부터 과감히 결별할수록 현 정부의 정당성은 강화된다. 그 과오를 어떻게 정의하느냐에 따라 현 정부의 정체성은 달라진다.

만약 역사 교과서 국정화를 둘러싼 지난 정권의 과오가 그 역사서에 집어넣고자 한 특정 메시지에 있었다고 생각한다면, 현 정부는 역사서에 그와는 다른 메시지를 집어넣으려 들 것이다. 만약 역사 교과서 국정화를 둘러싼 지난 정권의 과오가 역사를 정치적으로 과도하게 이용하려 든 시도 자체에 있었다고 생각한다면, 현 정부는 가능한 한 역사를 정치가가 아닌 역사가들의 몫으로 남겨두고자 할 것이다. 남의 음식까지 먹어 치우지 않는 태도가 나의 자제력을 나타내듯이, 역사가의 몫까지 건드리지 않으려는 태도가 정치 권력의 성숙함을 나타낸다.

 김영민 서울대 정치외교학부 교수 

세상을 보는 균형, 한국일보 Copyright © Hankookilbo

댓글 0

0 / 250
첫번째 댓글을 남겨주세요.
중복 선택 불가 안내

이미 공감 표현을 선택하신
기사입니다. 변경을 원하시면 취소
후 다시 선택해주세요.

기사가 저장 되었습니다.
기사 저장이 취소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