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호기의 굿모닝 2020s]“거짓과 진실 싸움 넘어 거짓과 거짓 싸움” SNS 자화상

입력
2020.01.07 04:40
28면

 <3> 포스트 트루스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가 포스트 트루스 시대의 핵심 미디어다. 게티이미지뱅크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가 포스트 트루스 시대의 핵심 미디어다. 게티이미지뱅크

신문ㆍ방송으로 대표되는 공론장이 근대 민주주의의 보루였음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공론장은 공적 여론이 형성되는 공간이다. 이 공적 여론은 현대사회를 움직이는 두 힘인 권력과 자본을 감시하고 비판하며, 나아가 대안을 모색한다. 권력과 자본 없는 현대사회를 상상하기 어렵듯, 공론장 없는 인류의 사회적 삶 역시 상상하기 어렵다.

 ◇포스트 트루스의 등장 배경 

21세기에 들어와 공론장이 처한 상황을 가장 적절하게 보여주는 개념이 ‘포스트 트루스(post-truth)’다. 포스트 트루스가 지구적으로 관심을 모은 것은 2016년이었다. 그 해 옥스퍼드 영어사전은 이 말을 올해의 단어로 선정했다. 포스트 트루스란 ‘여론을 형성할 때 객관적 사실보다 개인적 신념과 감정에 호소하는 것이 더 큰 영향력을 발휘하는 현상’을 말한다. 우리말로는 ‘탈진실’이라고 번역된다.

포스트 트루스는 가짜뉴스와 동전의 양면을 이룬다. 포스트 트루스가 급부상한 데는 가짜뉴스의 범람이 결정적 영향을 미쳤다. 2016년 지구적 차원에서 가장 큰 뉴스는 영국 브렉시트와 미국 대통령선거였다. 특히 미국 대선에서 워싱턴 정치사회의 아웃사이더였던 도날드 트럼프 공화당 후보는 큰 화제를 불러일으켰다. 그는 자신의 트위터를 통해 가짜뉴스를 유포하는 동시에 기성 언론을 가짜뉴스를 생산하는 거짓말쟁이라고 공격했다.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이 트위터에 올린 동영상 중 한 장면. ‘CNN은 가짜뉴스’라는 의미인 해시태그 ‘#FraudNewsCNN’(가짜뉴스 CNN), ‘#FNN’과 함께 게재한 28초 분량의 이 영상에는 트럼프가 프로레슬러처럼 미국 CNN방송을 상징하는 인물을 들어 메치는 내용을 담고 있어 논란이 됐다. 유튜브 캡처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이 트위터에 올린 동영상 중 한 장면. ‘CNN은 가짜뉴스’라는 의미인 해시태그 ‘#FraudNewsCNN’(가짜뉴스 CNN), ‘#FNN’과 함께 게재한 28초 분량의 이 영상에는 트럼프가 프로레슬러처럼 미국 CNN방송을 상징하는 인물을 들어 메치는 내용을 담고 있어 논란이 됐다. 유튜브 캡처

역사학자 유발 하라리의 지적처럼, 인간은 늘 포스트 트루스 시대를 살아왔던 것으로 보인다. 호모 사피엔스 특유의 힘은 허구를 만들고 믿는 데서 나오기 때문이다. 그런데 문제는 21세기 현재 가짜뉴스의 위험성이 그 어느 때보다도 심각하고 치명적이라는 데 있다. 오늘날 범람하는 가짜뉴스는 민주주의를 위협하고 사회통합을 훼손하며 우리의 마음까지 피폐화시킨다.

포스트 트루스의 등장 배경으로 철학자이자 논픽션작가인 리 매킨타이어는 ‘포스트 트루스’에서 사회심리학적 인지 편향, 전통 미디어의 쇠퇴와 소셜미디어의 출현, 과학부인주의와 포스트모더니즘의 영향을 제시한다. 이 가운데 인지 편향과 소셜미디어와 포스트모더니즘은 특별한 주목을 요한다.

첫째, 인지 편향은 진실에 대한 사회심리적 태도에 관한 것이다. 예상하지 못한 불편한 진실과 마주했을 때 인간은 합리적 방식이 아니라 비합리적 방식으로 대응하는 경향을 보인다. 매킨타이어는 포스트 트루스와 연관된 인지 편향으로 ‘인지부조화’, ‘집단 동조’, ‘확증 편향’, ‘역화 효과’, ‘더닝-크루거 효과’를 들고 있다. 그 가운데 최근 널리 알려진 것은 확증 편향이다. 확증 편향이란 새로운 사실을 접했을 때 자신이 갖고 있는 원래의 생각이나 신념을 확인하려는 경향을 보이는 것을 말한다. 가짜뉴스는 이 확증 편향을 타고 유포됐다.

리 매킨타이어의 '포스트트루스' 책 표지.
리 매킨타이어의 '포스트트루스' 책 표지.

둘째, 페이스북 등 소셜미디어의 출현이 미친 영향 또한 중요하다. 한 여론조사에 따르면, 2016년 미국 성인 중 62%는 소셜미디어에서 뉴스를 확인하고, 그 가운데 71%는 페이스북에서 확인한다고 응답했다. 이 조사는 이제 자신의 견해와 일치하는 뉴스만 선택적으로 읽고 믿는 사람이 증가하고 있음을 함의한다. 이러한 경향은 이른바 뉴스의 ‘사일로화’를 강화시킨다. 사일로화란 외부와의 소통을 차단한 채 밀폐된 공간에서 선택적으로 정보를 수용하는 것을 의미한다. 포스트 트루스 경향은 소셜미디어의 성장과 비례해 분명해졌다.

셋째, 20세기 후반 포스트모더니즘의 등장 또한 중대한 영향을 미쳤다. 포스트모더니즘의 핵심 메시지는 상대주의 세계관, 즉 이 세상에 진리는 부재하고 각자의 이야기들만 존재한다는 담론에 있다. 포스트모더니즘에 따르면, 누군가가 어떤 진실을 제시하더라도, 그것은 그 사람의 정치적 이념을 드러내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이러한 세계관 아래서 진실과 허위의 경계는 무너지고, 결국 포스트 트루스 시대가 열린 셈이다.

 ◇2020년대와 포스트 트루스 시대 

포스트 트루스 시대의 도래가 상징하듯, 오늘날 어느 나라든 가히 가짜뉴스와의 전쟁 상태에 놓여 있는 것으로 보인다. 언론학자 하재식은 ‘가짜뉴스 전쟁’에서 이 가짜뉴스 전쟁이 복합적이라고 진단한다. “우리 내면뿐만 아니라 페이스북, 트위터, 유튜브, 포털 사이트, 인터넷동호회, 언론사 홈페이지, 심지어 사적 카카오톡까지 여론전이 시도 때도 없이 발발한다.” “때로는 거짓과 진실이 싸우고 때로는 거짓과 거짓이 싸우는” 게 오늘날 지구적 공론장의 자화상이다.

사실과 허위가 혼재돼 있는 게 오늘날 공론장의 현주소다. 게티이미지뱅크
사실과 허위가 혼재돼 있는 게 오늘날 공론장의 현주소다. 게티이미지뱅크

2020년대에 포스트 트루스 시대는 그렇다면 계속되는 걸까. 나는 그럴 가능성이 높다고 본다. 그 까닭은 포스트모더니즘과 소셜미디어의 힘에 있다.

먼저 포스트모더니즘은 죽지 않았다. 사회사상으로서의 포스트모더니즘은 영향력을 상실했더라도 사유방식으로서의 포스트모더니즘은 외려 그 영향력을 강화해 왔다. 오늘날 인문ㆍ사회과학에서 진리의 절대성은 승인되지 않는다. 누구나 자신의 이념 및 세계관의 프리즘으로 현실을 분광(分光)시켜 이해한다. 너도 옳고 나도 옳고, 우리 모두 각자 다 옳다는 극단적 다원주의는 2020년대 시대정신을 이룰 것으로 보인다.

한편 소셜미디어가 갖는 힘의 원천은, 사회학자 마누엘 카스텔이 명명했듯, ‘네트워크화된 개인주의’에 있다. 다시 말해, 소셜미디어는 개인주의와 공동체주의를 모두 강화하는 속성을 가진다. 예를 들어, 우리가 페이스북에 수시로 접속하는 것은 자신의 생각을 발신하기 위해서인 동시에 외로워서 공동체적 유대감을 확인하기 위해서다. 소셜미디어가 인간의 본질적인 인정 욕망에 부응하는 한, 그것이 포스트 트루스에 미치는 영향은 쉽게 쇠퇴하지 않을 것이다.

“인터넷은 원심력을 만들어낸다.” 이 말을 남긴 사람은 공론장 연구의 선구자인 철학자 위르겐 하버마스다. 공론장의 구심력이 아닌 원심력이, 진리의 단수성이 아닌 복수성이, 사회의 코스모스가 아닌 카오스가 더 힘을 발휘하는 포스트 트루스 시대에 인류는 이미 진입해 있다고 봐야 한다.

공론장 연구자의 선구자인 철학자 위르겐 하버마스. 프랑크푸르트대 홈페이지
공론장 연구자의 선구자인 철학자 위르겐 하버마스. 프랑크푸르트대 홈페이지

포스트 트루스 시대가 열렸다고 해서 가짜뉴스의 범람을 이대로 놓아둘 순 없다. 매킨타이어는 진실 문제를 모호하게 만들려는 어떤 시도에도 의문을 제기해야 하고, 그 어떤 거짓에도 맞서 싸워야 한다고 제안한다. 하재식은 가짜뉴스 현상을 이념 또는 진영 문제로 치부해선 안된다고 주장한다. 가짜뉴스는 결국 자유ㆍ평등ㆍ정의ㆍ평화ㆍ공존ㆍ인권ㆍ행복ㆍ민주주의를 위험에 빠트리기 때문에 가짜뉴스와의 전쟁에서 반드시 이겨야 한다고 그는 강조한다. 가짜뉴스에 맞서는 제도개혁과 일상적 실천이 갈수록 중요해지는 까닭이 바로 여기에 있다.

 ◇한국사회와 포스트 트루스 

가짜뉴스가 우리 사회에 미치는 영향은 어떠할까. 언론진흥재단이 2017년 조사한 자료에 따르면, 전체 응답자의 83.6%는 가짜뉴스로 우리 사회의 분열이 더 심해지고 있다고 답했다. 우리 사회에서 언론에 대한 신뢰는 매우 낮다. 미국 여론조사기관 퓨리서치센터가 2017년 전세계 38개국 국민을 대상으로 조사한 자료에 따르면, 뉴스 매체가 정치적 사안을 공정하게 보도하는지를 묻는 항목에서 우리나라는 응답자의 27%만이 ‘그렇다’고 답했다. 그리스에 이어 뒤에서 두 번째를 차지했다.

가짜뉴스 논란이 이어지자 페이스북은 '가짜뉴스' 표시기능을 만들었다. 페이스북=AP 연합뉴스
가짜뉴스 논란이 이어지자 페이스북은 '가짜뉴스' 표시기능을 만들었다. 페이스북=AP 연합뉴스

저널리스트 문소영은 우리 사회 가짜뉴스 소비자들의 경우 자신들이 지지하는 정치인과 정당의 발언에 열광한다고 지적한다. “이들에게 진실은 ‘카톡’에서 지인이 전달해주는 정보인데, 진실인지를 따져보지도 않는다. (...) 1인 미디어 시대에는 ‘언론이 숨긴 진실을 들려주겠다’는 거짓 선지자 같은 인물이 한 둘이 아니다. 팟캐스트와 유튜브가 통로인데, 그 성향에는 좌우가 따로 없다.” 우리 사회에서 가짜뉴스를 생산하는 데는 ‘레거시 미디어’와 ‘뉴 미디어’ 사이에 큰 차이가 없다. 사실과 주장, 정보와 오락, 진실과 허위가 혼재되고 결합돼 있는 게 오늘날 우리 공론장의 현주소다.

포스트 트루스의 급부상에는 가짜 뉴스의 범람이 큰 영향을 미쳤다. 게티이미지뱅크
포스트 트루스의 급부상에는 가짜 뉴스의 범람이 큰 영향을 미쳤다. 게티이미지뱅크

현재 언론이 처한 상황을 주목할 때 2020년대 우리 사회에서도 포스트 트루스 시대가 계속될 것으로 보인다. 앞서 말했듯, 가짜뉴스는 민주주의와 사회통합을 훼손시킨다. 특히 선거 국면에서 가짜뉴스가 기승을 부릴 것은 불을 보듯 명확하다. 포스트 트루스 시대에 대처하는 데에 지름길은 없다. 가짜뉴스 근절에 대한 제도개혁과 미디어 리터러시 교육을 통한 민주적 공론장 형성을 꾸준히 추구해야 한다. 건강한 공론장 없이 건강한 민주주의 없다고 나는 여전히 굳게 믿고 있다.

김호기(연세대 사회학과 교수)

 ‘김호기의 굿모닝 2020s’는 2020년대 지구적 사회변동의 탐색을 통해 세계와 한국의 미래를 생각하는 <한국일보> 연재입니다. 매주 화요일에 찾아옵니다. 다음주에는 ‘100세 인생’이 소개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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