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아리] 검찰총장도 수사 대상이 맞다

입력
2020.01.05 18:00
30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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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수처, 정권 만능검 될까 우려 사실이지만

검찰을 성역에서 끄집어내는 것이 더 우선

이젠 청와대의 시간…조국 연결고리 끊어야

'고위공직자범죄수사처법(공수처법)' 본회의 표결을 앞두고 지난달 30일 국회 본회의에서 자유한국당 의원들이 문희상 국회의장석 주변에서 경위들이 실랑이를 벌이고 있다. 연합뉴스
'고위공직자범죄수사처법(공수처법)' 본회의 표결을 앞두고 지난달 30일 국회 본회의에서 자유한국당 의원들이 문희상 국회의장석 주변에서 경위들이 실랑이를 벌이고 있다. 연합뉴스

여러 해 전 얘기다. 당시 떠들썩했던 사건의 참고인으로 잘 나가던 경제관료 J가 검찰에 소환됐다. 젊은 수사관은 다짜고짜 J에게 B4 용지 두 장을 건넸다. 다섯 가지 질문을 주고는 종이를 꽉 채워 작성하라고 했다. 그러고는 심드렁한 표정으로 옆 소파에 몸을 눕힌 채 눈을 붙였다.

J를 당혹스럽게 한 건 첫 번째 질문이었다. ‘초등학교 시절부터 지금까지 어떻게 살아 왔는지 상세히 쓰시오.’ 피의자도 아닌 참고인 신분이었고 설령 피의자라고 해도 이런 기술이 왜 필요한지 묻고 싶은 마음이 굴뚝 같았지만 꾹 억눌렀다.

40분쯤 지났을까. 젊은 수사관은 예상보다 훨씬 빨리, 그리고 잘 작성된 글을 읽다 미간을 잔뜩 찌푸리며 J의 눈을 똑바로 노려봤다. 그때 수사관이 한 말을 J는 토씨 하나 하나 또렷이 기억한다. “저기요, 우리는요. 마음만 먹으면 추기경도 구속시킬 수 있어요. 왠지 알아요? 태어난 게 죄니까요.” 참고인이라고 까불지 마라, 내 심사가 뒤틀리면 언제든 피의자로 둔갑시킬 수 있다, 이런 섬뜩한 경고로 엄습했다고 한다.

적잖은 시간이 흘렀지만, 달라진 건 없을 것이다. 검찰이 지닌 힘은 더 커졌으면 커졌지 줄어든 것은 없으니까. 문재인 정부가 ‘조국 = 청와대’라는 등식에 끝까지 매달리며 검찰에 일일이 맞대응하는 볼썽사나운 모습을 연출하고 있지만, 검찰 개혁이라는 취지만큼은 동의하지 않을 수 없다.

솔직히 고위공직자범죄수사처(공수처) 설치 법안은 우려가 되는 점이 많은 게 사실이다. 다 제쳐두더라도, 적폐 청산이라는 게 정권마다 되풀이된다면 공수처는 이를 위한 정권의 만능검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지금은 자유한국당이 결사 반대하지만, 혹여 정권을 잡는다면 과연 그때도 공수처에 적대적이겠는가. 문재인 정부의 발등을 찍는 괴물로 변신하지는 않겠는가.

그렇다 해도 살아 있는 권력의 횡포를 방치할 순 없다. 최근 5년간 검찰의 처분이 이뤄진 검사에 대한 고소ㆍ고발 사건 9,903건 중 기소가 이뤄진 사건은 딱 14건이다. 기소율 0.14%다. 일반 형사사건 평균 기소율은 무려 34.8%다. 검찰은 사건의 성격이 다르기 때문이라고 강변하지만, 그것만으로는 설명될 수 없는 통계다. 검찰의 기소독점권이 무서운 건 기소를 남용하는 것보다 기소를 하지 않는 것에 있다는 얘기는 그래서 나온 것일 테다.

고소장 바꿔 치기 수사를 위한 부산지검에 대한 경찰의 압수수색 영장 청구를 검찰이 무려 세 번이나 뭉갠 건 이 통계의 행간을 읽게 해준다. “풍문에 지나지 않는다“는 석연찮은 이유를 경찰에 댔다고 하는데, 그런 검찰이 자신들이 청구한 송병기 울산 부시장의 영장이 법원에서 기각되자 곧바로 기자들에게 뿌린 문자 메시지는 ‘사안이 매우 중한 점 등에 비춰 납득하기 어렵다’는 내용이었다.

한 보수 언론은 공수처법 통과 직후 해설기사에서 ‘공수처가 설립되면 개별 검사들에 대해 수사를 진행할 수 있게 된다. 극단적으로 보면 윤석열 검찰총장, 김명수 대법원장도 수사 대상에 올려놓을 수 있게 되는 것이다’라고 비판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게 왜 문제라는 건지 모르겠다. 대통령도 예외일 수 없는 마당에, 그때 수사관의 말처럼 검찰은 마음만 먹으면 추기경도 구속시킬 수 있다고 여기는 마당에, 왜 검찰총장은 안 된다는 말인가.

이제는 청와대의 시간이다. 7월이면 공수처가 닻을 올릴 것이고, 검경 수사권 조정법 역시 조만간 국회를 통과할 것이다. 문재인 대통령은 “헌법적 권한을 다하겠다”고 했고, 그 총대를 ‘추다르크’에게 맡겼다.

검찰이 칼자루를 쥐었던 지금까지와는 다르다. 이젠 청와대 스스로 조국과 검찰 개혁의 연결고리를 끊어내야 한다. 조국을, 또 청와대를 검찰로부터 지키기 위한 인사권 행사가 헌법적 권한이라고 여기지도 말길 바란다. 공수처가 괴물로 변질되지 않게 보완하는 작업 역시 청와대의 의지가 중요하다. 국민들은 청와대와 검찰 어느 한쪽이 아니라, 검찰이건 공수처건 청와대건 그 어느 곳도 성역이어선 안 된다는 원칙을 지지할 뿐이다.

이영태 디지털콘텐츠국장 ytlee@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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