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만한 당신] 보갈레치 게브레, 에티오피아 여성 반란의 지도자

입력
2019.12.30 04:10
28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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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티오피아 여성 인권운동가 보갈레치 게브레는 1990년대 말부터 불과 10여년 만에 에티오피아 여성 성기 절제-훼손(FGM)관습과 신부 납치-강간-결혼 관행을 근절하다시피 한, "에티오피아 여성 반란의 지도자"다. 그 혁명적 성취의 요인은 당연히 복합적이고 섣불리 일반화할 수도 없겠지만, 세계는 보갈레치의 탁월한 리더십에 주목했고, 보갈레치 자신은 모두 후원금 덕이었다고 말했다. Martin Dixon, kmgethiopia.org
에티오피아 여성 인권운동가 보갈레치 게브레는 1990년대 말부터 불과 10여년 만에 에티오피아 여성 성기 절제-훼손(FGM)관습과 신부 납치-강간-결혼 관행을 근절하다시피 한, "에티오피아 여성 반란의 지도자"다. 그 혁명적 성취의 요인은 당연히 복합적이고 섣불리 일반화할 수도 없겠지만, 세계는 보갈레치의 탁월한 리더십에 주목했고, 보갈레치 자신은 모두 후원금 덕이었다고 말했다. Martin Dixon, kmgethiopia.org

에티오피아의 여성 인권은 무척 열악하다. 가정 폭력과 조혼, 일부다처, 모성 사망률, 교육 차별 등 극복해야 할 난관이 한둘이 아니다. 세계경제포럼(WEF) 2018년 글로벌 젠더 격차 지수 순위에서 에티오피아는 149개국 중 117위였다

하지만 젠더 이슈에 관한 한 세계에서 가장 역동적인 국가도 에티오피아다. 에리트레아와의 오랜 전쟁을 협상으로 종식한 공로로 올해 노벨 평화상을 수상한 아비 알리(Abiyyii A. Alii, 1976~) 총리 내각은 2018년 4월 출범하면서 22개 부처 장관의 절반을 여성으로 구성했고, 10월에는 유엔 사무부총장을 지낸 여성 외무 관료 살레 워크 제우데(Sahle Work Zewde, 1950~)를 의회 만장일치로 대통령으로 뽑았다.

1999년 유니세프 조사에서 무려 97%가 ‘여성 성기절제(FGM)가 필요하다’고 응답했던 에티오피아 시민들은 10년 뒤인 2008년 조사에서는 단 3%만이 FGM을 긍정했다. 에티오피아는 역사가 ‘약탈혼’이라 부르는 ‘신부 납치(Bride-napping)’ 즉, 여성 납치-강간-결혼을 전통처럼 용인해온 국가 중 하나다. 에티오피아 국가전례위원회 조사 결과 2003년 혼인 건수의 69%에 달했던 신부납치 결혼은 유니세프의 2010~13년 조사에서는 가장 열악한 지역도 10~13% 선으로 줄었다.

저 짧은 기간 사이 에티오피아가 이룬 젠더 문화ㆍ제도의 혁명적 변화를 2010년 영국 언론 인디펜던트는 ‘에티오피아 여성들의 반란”이라 명명했다. 그 반란의 지도자 보갈레치 게브레(Bogaletch Gebre)는 자신들이 이루고자 한 바를 ‘젠더 아파르트헤이트의 철폐’라 말했다. “힘센 여성이 강한 공동체를 만들고, 힘센 여성이 강한 국가를 만들고, 힘센 여성이 마침내 아프리카를 강하게 만들 것”이라고 믿었던 ‘보게이’(애칭), 보갈레치 게브레가 11월 6일 별세했다. 향년 66세.

‘보게이’의 고향 켐바타(Kembata)는 에티오피아 11개 광역단체 가운데 가장 빈곤한 주 중 하나인 남수단-케냐 국경의 ‘남부국가민족주(SNNPR)’ 마을이다. 2004년 세계은행 집계, 전기가 보급된 가구가 전체의 2%에 불과할 정도였다.

납치결혼 전국 비율이 69%이던 2003년 당시 SNPPR의 납치혼 비율은 92%였고, FGM은 거의 100%였다. 에티오피아의 종교는 정교회와 가톨릭, 개신교, 전통종교가 혼재돼 있지만, FGM은 종교와 무관한 아니 모든 종교가 합심해서 강제해온 ‘관습’이어서, 6~12세 전후 여성은 FGM으로 ‘오물을 제거(Cleaning the dirt)’해야만 결혼할 수 있는 여성으로 ‘대접’ 받았다. 그건 다른 말로, 언제 어느 때건 납치-강간-결혼을 하거나, 아버지의 결정으로 조혼-매매혼 당할 수 있게 된다는 의미였다. 물론 그나마도 출혈과 감염 등 FGM 후유증을 이겨 살아남아야 가능한 일이었다. 모두 FMG 탓은 아니었겠지만, 보게이는 14남매중 둘을 뺀 나머지를 모두 어려서 여의었다. 그도 출생신고를 하지 않아 생일을 몰랐고 편의상 1953년을 출생연도로 밝혀왔다.(kmgethiopia.org)

납치결혼으로 아내 6명을 둔 한 40대 남자는 2010년 인디펜던트 기자에게 “여자는 우리의 공장”이라고 말했다. “그들은 남편을 위해 밭을 갈고, 도기를 굽고, 가축의 가죽을 손질한다.(…) 그리고 무조건 내게 복종해야 한다. 설사 내가 불구자가 돼도 마찬가지다. 그게 여자이고, 그들의 삶이다.” 유년시절 보게이의 집 실내는 두 구역으로 나뉘어 있었다고 한다. 남자들이 기거하는 구역과 여성과 가축이 함께 기거하는 구역. 보게이는 “에티오피아의 여성은 젖 짜는 소와 별로 다르지 않은 존재였다”고 말했다. 학교 교육은 언감생심이었다.

보게이는 6살 무렵부터 글공부를 시작했다. 미션스쿨 교사였던 큰아버지와 사촌들의 영향이었다. 그는 새벽 6시면 물 길러 가는 척 물동이를 이고 집을 나서 학교에서 도둑 수업을 들었다. 그렇게 그는 에티오피아 공식어인 암하라어(Amharic) 알파벳 268개를 익혔고, 선교사들의 도움으로 장학금을 받아 수도 아디스 아바바(Addis Ababa)의 에티오피아 유일 여성 기숙학교에 진학했다. 그의 한 고향 친구는 “우리 마을에서 4년 넘게 학교를 다닌 여학생은 보게이가 처음”이라고 말했다. 그는 이스라엘 예루살렘대학서 미생물학을 전공했고, 미국 풀브라이트 재단 장학금으로 메사추세츠대에서 석사를 받은 뒤 LA 캘리포니아대학서 전염병학 박사과정에 진학했다. 장학금을 아껴 모아 고향 어머니에게 송금, 그 돈으로 집을 지어 “여자가 돈 벌어 집에 보탠” 일로 마을 주민들을 놀라게 했다고도 한다.

보게이 역시 12세에 FGM을 당했고, 수년간 후유증에 시달린 끝에 살아남았고, 2차례 납치-강간 위기를 기적적으로 모면했다. 그러니 그의 삶 자체가, 저 험한 세월을 살아낸 에티오피아 여성들의 존재 자체가 사실 기적이었다.

보게이(애칭)는 12세에 FGM을 당했고, 두 차례 납치-강간의 위험을 모면했다. 아버지의 감시를 피해 6살 무렵부터 글 공부를 해낸 것부터 사실 행운이고 기적이었다. 그는 평생 독신으로 살며 에티오피아 여성 인권을 위해 헌신했다. kmgethiopia.org
보게이(애칭)는 12세에 FGM을 당했고, 두 차례 납치-강간의 위험을 모면했다. 아버지의 감시를 피해 6살 무렵부터 글 공부를 해낸 것부터 사실 행운이고 기적이었다. 그는 평생 독신으로 살며 에티오피아 여성 인권을 위해 헌신했다. kmgethiopia.org

70년대 중반부터 90년대까지, 자신이 나고 자란 곳과는 전혀 딴판인 환경에서 유학하면서, 가뭄과 기아, 쿠데타 뉴스로 접하던 고국 소식과 그 기사들의 이면에 가린 여성들의 삶을 그는 외면하지 못했다. 1980년대 가나 출신 영국인 간호사 에푸아 도케누의 폭로로 시작된 유엔과 국제 사회의 FGM 실태 고발도 그에겐 결코 남의 일이 아니었을 것이다.

1985년 11월 29일자 LA타임스는 한 에티오피아 여성의 ‘명분을 건 마라톤’ 기사를 게재했다. “지난 주말 열린 컬버시티 서반구 마라톤에 참가한 보게이 게브레란 여성이 ‘내 동포들은 맨발로, 병들고 굶주린 몸으로 400마일씩도 걷는데, 그들을 돕기 위해서라면 26마일쯤이야 나도 달릴 수 있습니다. 에티오피아의 어린이들을 도와주세요’라는 문구를 새긴 T셔츠를 입고 달렸다”는 뉴스였다. 고국 고아들을 돕는 ‘에티오피아 국제부모재단’ 공동설립자 겸 보건 플래너로 기사에 소개된 그는 마라톤 풀코스를 3시간대에 완주했다. 87년 큰 교통사고를 당해 의사로부터 정상적인 육체활동이 어려울 수 있다는 진단을 받았지만, 그는 97년 귀국할 때까지 다섯 차례나 더 기금모금 마라톤에 출전했고, 그렇게 모금한 돈으로 에티오피아 여성 직업교육센터, 여성도서관 및 지역정보센터, 피임ㆍ보건 상담소 등을 개설했고, 모자 보건 서비스와 FGM 근절 캠페인 등을 벌였다. 박사 학위를 딴 직후라는 기록도 있고 학위 과정을 중단했다는 기록도 있지만, 어쨌건 그는 97년 종자돈 5,000달러를 들고 영구 귀국, 동생 피키르테(Fikirte)와 함께 비영리단체 ‘KMG에티오피아’를 설립했다. ‘KMG(Kembatti Mentti Gezzimma-Toppe)’는 ‘함께 일하는 켐바타 여성들(Women of Kembatta working together)’이란 의미의 현지어 머릿글자였다. 97년은 유엔이 FGM 배격운동을 본격화한 해이자, 보게이가 쌍둥이를 출산하던 동생을 잃은 직후이기도 했다. FGM은 감염 등 1차 후유증과 정신적 외상 외에도 질 근육 손상과 흉터 굳은살 등으로 출산 과정에 태아와 산모의 목숨을 위협한다. 보게이는 한 인터뷰에서 “단 한 명의 소녀라도 그 공포로부터 구해낼 수 있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그런 희망으로 모든 걸 시작했다”고 말했다.

기혼 남성은 ‘(장남) OO의 아버지’, 여성은 ‘XX(장녀)의 어머니’라 불리는 게 켐바타의 전통이라고 한다. 미국서 박사 공부를 하고 집 지을 돈까지 부친 딸을 둔 그의 아버지를 마을 사람들은 예외적으로 ‘보갈레치의 아버지’라 불렀다. 보게이는 40대의 미혼인 데다 여느 여자들과 여러모로 달랐지만, 마을 원로들 입장에서 보자면 그래도 FGM의 전통을 따른 내부자였다. 보게이와 ‘KMG’도 급진적이고 전투적인 노선이 아닌 대화를 통한 점진적 개혁을 추구했다. 영향력을 확보하는 최선의 방책은 마을에 실질적인 도움을 주는 존재가 되는 거였다. 맨 먼저 한 일도 종잣돈 5,000달러로 철근과 시멘트를 사들여 주민들과 함께 작은 협곡을 잇는 다리를 건설한 거였다. 훗날 그는 “그 다리를 통해 나와 마을 원로들의 마음도 이어졌다”고 말했다.

에이즈는 당시 에티오피아의 가장 큰 사회문제였다. 전체 인구의 1/10이 HIV 감염/AIDS 환자라는 데이터가 있을 정도였다. 하지만 주민들은 AIDS란 말 자체를 금기시했고, 성(性)과 관련된 문제를 여자인 보게이가 들추기는 더 힘든 일이었다. 유엔개발계획(UNDP)이 아프리카 에이즈 문제에 개입하기 위해 도입한 마을-공동체 단위의 일종의 반상회 조직을 보게이도 활용했다. 50명 안팎의 모임을 꾸려 각각 남녀 1명씩 대표를 뽑고, 그들 대표단이 매주 모여 협의하고 의사를 결정하는 방식. KMG는 남녀가 공적인 자리에 함께 앉는 작은 변화에서부터 여아도 남아처럼 학교를 다니도록 하는 일, 여성이 원로회의에 참석해 공동체의 주요 의사 결정에 참여하게 하는 일까지 점차 여성의 요구를, 영역을 넓혀갔다. 보게이는 탁월한 대중 활동가였다.

보게이가 1997년 설립한' KGM 에티오피아(에티오피아의 함께 일하는 켐바타 여성들)'은 남부 24개 지부에 1,000여 명의 상근 활동가를 둔 든든한 여성 인권운동 조직으로 자리잡았다. 그는 강한 여성이 강한 공동체와 국가를 만든다고 믿고 주장했다. kmgethiopia.org
보게이가 1997년 설립한' KGM 에티오피아(에티오피아의 함께 일하는 켐바타 여성들)'은 남부 24개 지부에 1,000여 명의 상근 활동가를 둔 든든한 여성 인권운동 조직으로 자리잡았다. 그는 강한 여성이 강한 공동체와 국가를 만든다고 믿고 주장했다. kmgethiopia.org

그는 2000년 스위스 브뤼셀 유럽연합 집행위원회에 편지를 썼다. 켐바타 FGM 근절 프로젝트 후원금을 요청하는 편지였다. 당시 집행위원 마리아 알바레스(Maria Alvarez)의 협조로 그는 50만 유로를 확보했다. 사실 보게이의 영향력은 상당 부분 그렇게 확보해온 돈의 힘이었다. 그는 성경이나 쿠란 어디에도 FGM에 대한 근거가 없다는 사실을 홍보하는 한편 마을 남자들을 다 모아놓고 면도칼로 맨 살을 찢고 탱자 가시로 외음부를 깁는 피범벅의 FGM 시술 동영상을 보여주기도 했다. 한 마을에서는 비디오를 보던 남자가 기절하고 네 명이 구토를 한 적도 있었다. 보게이는 “주민들이 비록 문맹이긴 해도 결코 어리석은 이들은 아니다”라고 말했다. 2002년 9월 켐바타 역사상 최초로 FGM을 당하지 않은 여성이 그 사실을 공개적으로 밝히며 신부로서 예식장에 섰다. 그 뜻을 지지하는 하객 2,000여 명이 예식에 참여했다. 켐바타 여성들은 2004년부터 FGM 전통 기념일인 10월 29일에 맞춰 FGM 근절 캠페인을 벌여오고 있다. 첫 해 ‘나는 온전하다 I am Whole”란 문구의 은색 펜던트를 목에 건 여성 10만여 명이 축구경기장 하나를 가득 채웠다고 한다.

여성 납치-강간 결혼은 문화 이전에 경제적 문제였다. 2007년 한 보도에 따르면 남자가 정식으로 결혼하려면 신부 ‘몸값(노동력)’과 결혼식 비용으로 약 1,800달러(2007년 기준)를 써야 한다. 1달러도 안 되는 돈으로 하루를 사는 이가 전체 인구의 50%에 달하는 지역에서는 쉽사리 감당하기 힘든 비용이다. 2005년부터 납치혼이 법으로 금지됐지만 완전히 근절되지 않는 이유 중 하나가 그거다. 납치혼 희생자는 대부분 18세 미만 미성년자이고, 다수는 10세 미만 어린이다. 2010년 인디펜던트지 기자와 인터뷰한 누라메(Nurame)라는 이름(가명)의 여성은 8살 때 10명도 더 되는 30대 남자들에게 납치돼, 남자 가족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남편이 될 남자로부터 강간당했다고 말했다. 사흘 뒤 간신히 도망쳐 온 그는 가족들로부터 외면당했다. “아버지는 내가 그와 성관계를 맺었으니 이제 아무도 원치 않을 망친 물건(ruined goods)이라고, 도로 그에게 돌아가 좋은 아내가 되라고 했다”고 말했다. 그런 그에게, 대부분 납치혼의 피해자인 나이든 이웃 여성들은 “5년만 참으면 된다”고 말했다고 한다. 그 5년은 경험을 통해 체득한 체념의 5년인 셈이었다. 하지만 만약 당신 딸이 납치당한다면 어떻게 할 거냐고 묻자, 지치고 주름진 얼굴의 누라메는 “끝까지 찾아내 데려올 것”이라고 웃음기 한 점 없는 결연한 표정으로 말했다고 기자는 썼다. 누라메가 사는 켐바타의 납치혼 비율은 2003년(SNNPR주 92%)에 비해 무려 90%가 줄었다.

“단 한 명의 소녀라도…”라는 희망으로 시작한 보게이의 반란은 그렇게 법과 관습과 문화를 바꾸어냈다. KMG의 활동 경비 대부분은 영국 자선재단 코믹릴리프(Comic Relief)가 댔다. 보게이는 “그들의 도움이 없었다면 아무 것도 하지 못했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렇게 에티오피아의 젠더 혁명은 기부(돈)의 가치를 극적으로 부각한 사례이기도 했다. 기부금이 넉넉하면 일손을 늘릴 수 있고, 그렇게 운동의 저변이 확산되고, 활동가의 일상도 상대적으로 여유로워진다. 덜 지치게 된다. 보게이가, 코믹릴리프가 에티오피아에서 한 일이 그거였다. 여동생과 단둘이 국토 변두리 마을에서 시작한 KMG에티오피아는 전국 24개 지부에 1,000여 명의 상근 활동가를 둔 든든한 조직으로 성장했고, FGM과 납치혼 외에도 조혼, 일부다처제, 가정폭력, ‘공중결혼’이라 불리는 과부의 형제 상속 관행(兄死娶嫂) 등의 근절ㆍ개선을 위해 활동해왔다. KMG는 그사이 다리 10개와 우물 7개, 저수지 5개를 건설했고, 900만 그루의 나무를 심었다. 마을 주민 모두가 혜택을 입을 일이지만, 특히 학교를 다녀야 하는 아이들과 물을 길어야 하는 여성들에게 직접 도움을 주는 일이었다. 그렇게 그가 구한 여성들의 삶만큼 에티오피아는 건강해졌다. 최윤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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