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6.5˚C]나는 젊어 봤고 머지 않아 늙을 건데!

입력
2019.12.26 04:40
수정
2019.12.26 10:46
30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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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6.5℃’는 한국일보 중견 기자들이 너무 뜨겁지도 너무 차갑지도 않게, 사람의 온기로 써 내려가는 세상 이야기입니다.

게티이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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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 ‘모든 구성원이 반말로만 대화하는’ 스타트업 두 곳을 찾았다. 직원 수 십 명이 너무나 자연스럽게 반말로 대화하는 모습을 지켜 보면서 적잖이 놀랐다. 그런데 분야가 다른 두 회사 사람들에게서 공통점 한 가지를 찾을 수 있었다. 수다스럽다는 것.

업무 얘기 하자고 모여서 회의 앞뒤로 어제 무슨 일 있었는지, 저녁에 무엇을 먹으러 갈지 까지 쉼 없이 재잘거리니 조용한 게 이상할 정도였다. 더구나 이들은 나이도, 학력도, 경력도 묻거나 따지지 않는다. 취재 때문에 확인했지만 ‘밀레니얼 세대’라 불리는 2030들은 물론 40대도 섞여 있었다. 서로를 부를 때는 ‘~씨’ ‘~님’은 붙이지 않고 이름(한글이나 외국어)만 말한다.

왜 반말이냐고 묻자 A업체 임원은 반말이 소통에 도움이 된다고 했다. 기업 입장에서 부족한 인원과 자본의 한계를 극복하며 경쟁에서 살아남으려면 내부 구성원의 능력치를 최대한 끌어내야 하고 그러기 위해선 소통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특히 밀레니얼 세대와 일하기 위해서는 더욱 그렇다. 15년 넘게 여러 벤처, 스타트업에서 일했다는 이 임원은 4050들은 내키지 않아도 조직을 위해 몸 바칠 수 있지만 2030들은 아무리 회사 일이라도 납득이 갈 만한 이유가 있어야 최선을 다한다고 했다.

보통 조직에 새 구성원이 들어오면 나이, 경력, 직급을 살피고 존댓말 쓸지 반말 쓸지를 고민하느라 시간과 에너지를 쏟기 마련이다. 하지만 이들 회사에서는 ‘호구 조사’ 대신 그 사람이 뭘 좋아하는지, 잘하는지를 파악하는데 공을 들인다. 서로를 더 많이 알게 되고 업무 관련 심각한 내용부터 사소한 일상까지 공유하다 보면 조금씩 가까워 지는데 그때 반말이 역할을 한다는 것이다. 처음엔 이래도 되나 싶었지만 익숙해지면 눈치 볼 필요 없고 세상 편하다고들 한다.

사실 여러 기업이 소통을 더 잘 해보겠다며 다양한 시도를 해 왔다. 주로 의사결정권을 쥔 윗사람들이 꼰대가 되지 않도록 하는데 초점을 맞췄다. 사원-대리-과장-차장-부장이라는 직급을 없애는 대신 ‘프로’나 ‘매니저’로 부르게 하고, 오직 존댓말 쓰기를 선언한 회사도 많다. 밀레니얼 세대를 공부하라며 특강도 운영한다. 하지만 잘했다고 인정 받을 만한 사례는 별로 없다. 표현에만 신경 쓰다 보니 정작 윗사람과 아랫사람의 관계를 수평으로 만드는데 실패했기 때문이다.

반말을 쓰는 B업체 대표는 대기업 신입사원 시절 겪은 ‘존댓말 공포’를 잊을 수 없다고 했다. 회의 때마다 부장이나 임원은 ‘자! 편하게 얘기해 봐요’라고 부추겼다. 그러다 신입들이 듣기 거북한 소리를 할라치면 처음엔 미소 짓던 윗사람들 표정은 굳어갔다. 과장, 차장들은 “이제 그만해도 되겠네요”라고 말을 끊으며 ‘분위기 파악 못하냐’는 뜻이 담긴 레이저를 보냈다. 회의실 공기는 무거워졌다. 존댓말은 도리어 마음의 벽만 만들게 했고 윗사람 눈치 보며 시키는 말만 해야 하는 갑갑한 분위기가 싫어서 회사를 그만두고 창업을 선택했다.

반말이냐 존댓말이냐는 형식 문제일 뿐이다. 반말 쓰는 업체들도 단지 반말을 써서 소통이 잘 되는 게 아니었다. 그 표현에 진심이 담겨 있느냐가 중요하다. 윗사람이 ‘내가 너희를 위해 존댓말을 써주는 거야’라며 자기 하고 싶은 말만 하고, 듣고 싶은 말만 들으려 한다면 아랫사람 입장에서는 달라질 게 없다. 그리고 한 걸음 더 물러서 버린다. ‘너는 늙어 봤냐. 난 젊어 봤다’ 식으로 비꼬아봤자 ‘나는 꼰대요’라고 이마에 써 붙이고 다니는 것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내년이면 40대 중반이고 조직에서 팀장을 맡은 입장에서 밀레니얼 세대와 소통은 큰 고민거리이다. 우선 모르면 모른다고 인정하고 후배에게 물어보고 그들 말을 찬찬히 듣는 것부터 해볼 참이다. 하고 싶은 얘기는 다 듣고 난 뒤 맨 마지막 차례다. 난 젊어 봤고 머지 않아 늙을 거니까.

박상준 이슈365 팀장 buttonpr@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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