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6.5˚C] 누가 착한 앤지 나쁜 앤지

입력
2019.12.24 04:40
수정
2019.12.24 11:54
30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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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6.5℃’는 한국일보 중견 기자들이 너무 뜨겁지도 너무 차갑지도 않게, 사람의 온기로 써 내려가는 세상 이야기입니다

패스트트랙 법안 등의 처리를 놓고 파행을 거듭해 온 20대 국회가 '성탄전 개혁법안 본회의 상정'을 목표로 분주하다. 배우한 기자
패스트트랙 법안 등의 처리를 놓고 파행을 거듭해 온 20대 국회가 '성탄전 개혁법안 본회의 상정'을 목표로 분주하다. 배우한 기자

# “우리가 뭘 몰라서 테레비 쳐다보고 있는 줄 알아요?”

거리에서 지인과 인사를 나누던 한 정치인의 어깨를 톡톡 치며 누군가 말을 건넸다. 고개를 돌리니 서너 살배기 아기를 등에 업은 한 할머니가 예사롭지 않은 눈빛으로 그를 지긋이 보고 있었다. 할머니는 그가 자주 출연하는 뉴스 분석 채널에 대한 자신의 감상평을 들려주고 싶어했다. “네네 어르신. 그럼요. 식사하셨어요?” 친근하게 말을 건네자 할머니가 살짝 눈을 흘기며 의미심장하게 말했다. “우리가 뭘 몰라서 댁네들 나와서 떠드는 거 종일 쳐다보고 있는 것 같죠. 세상 돌아가는 거 국민들도 빤해. 저 사람이 지금 거짓말을 하나 안 하나, 솔직하게 말하나 안 하나, 그거 확인하느라 열심히 보는 거야. 그러니까 잘해!”

내년 4월로 다가온 총선을 앞두고 지역에서 연일 표밭을 갈고 있는 한 원외 정치인이 전한 최근 경험이다. 그는 자신이 마주했던 이 장면을 잊을 수 없다고 했다. 그러면서 말했다. “우리가 정치권에 오래 있다 보면 착각하는 게 있어요. 이 안의 복잡하고 자세한 속사정을 국민들은 바빠서 다 모를 것이다. 적들의 거짓말에, 혹은 우리 거짓말에 표심이 속을 지도 모른다.”

여러 캠프에서 수 차례 총선을 지켜본 그의 결론은 이랬다. 국민을 속일 수 있다는 것처럼 바보 같은 착각이 없다. 하지만 대다수는 여의도라는 섬에서 그걸 까맣게 잊고 달리다 총선 결과가 나오고 나서야 ‘아, 그랬었지’ 하고 깨닫는다.

# “정치권의 예상이 꼭 들어맞은 총선은 한번도, 정말 단 한번도 없었다.”

최근 정국을 돌아보던 다른 정계 원로는 담담하게 말했다. 총선의 역사는 사실상 정치 고수들의 오판사(史)였다는 얘기다. 국민 개개인이 늘 옳은 말과 판단만 한다고 할 순 없지만, 투표로 종합된 민심의 선택은 늘 예상을 뒤엎는 것이되 절묘한 무엇이었다는 게 그의 설명이다.

돌아보면 매번 그랬다. 한때 지역투표 성향이 뚜렷하긴 했지만, 그 와중에 ‘유권자의 심판’이 촘촘히 가동되고 있다는 자국은 매 총선마다 어떤 식으로든 도드라졌다. 여당의 독주를 막겠다는 견제, 야당의 발목잡기를 못 봐주겠다는 심판, 불합리한 공천에 대한 윤리적 불만, 문제적 정치 지도자의 재기를 억누르려는 흔적, 당선은 따놓은 당상이나 다름없다고 마음 놓던 중진의 허를 찌르는 반전 등. 총선 이후 정치권의 언어가 반성문으로 가득 찼던 이유다.

파행을 거듭해 온 20대 국회의 최근 상황을 바라보고 있자면 정치권은 ‘여전히 국민을 속일 수 있다고 믿는 이’와 ‘이제 국민은 다 알고 계신다고 믿는 이’로 나뉜다는 생각이 자주 든다. 특히 민생법안 하나 처리하지 못하고 예비후보 등록일을 지나 보내고도 선거법안 하나 상정하지 못하는 개점휴업 상태를 놓고, 반성 없이 상대만을 원인으로 지목하는 책임론을 듣고 있다면 그렇다.

정말 국민들이 모른다고 믿는 걸까. 누가 민생법안 발목을 잡고도 “이게 다 저들 때문입니다”라고 외치는지. 누가 당의 패착을 지적하는 언론 보도를 놓고 ‘가짜 뉴스’, ‘오보’라고 주장하는지. 누가 상처받고 외로운 이들을 자기 정치에 동원 하는지. 누가 꼼수로 의회민주주의를 유린하는지. 교수신문 선정 올해의 사자성어 최종 후보 단어, 어목혼주(魚目混珠·가짜와 진짜가 마구 뒤섞인 것을 비유)가 최근 국회보다 더 어울리는 곳이 또 있을까. 가짜가 진짜를 나무라고 규탄하고 훈계한다.

특히나 때는 국회의 일거수일투족이 실시간으로 전국에 중계되는 세상이다. 적어도 성탄 전에는 본회의를 열어 국민 앞에 성과를 내놓아야 한다며 국회가 분주하게 움직이는 이 순간에도 눈 가리고 아웅하려는 잔꾀, 묘수, 억지가 넘치는 모습을 보고 있노라면 4개월여 앞으로 다가온 총선 이후가 연일 궁금해진다. 할머니 말씀대로라면 ‘누가 착한 앤지 나쁜 앤지’ 모든 것을 알고 계시는 분은 산타 할아버지뿐이 아닐 테니 말이다.

김혜영 정치부 기자 shine@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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