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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가 그 동안 ‘공무원 만들기’에 공모한 것은 아닌지 돌아봐야 한다. 열악한 근무 환경을 방치하고, 유연한 노동 시장을 바꾸려고 하지 않고, 노동 시장 밖으로 떠밀린 사람들에게 무관심하지 않았는지. 사진은 서울 동작구 노량진 학원가에 한 공무원 준비생이 전단지 위를 걸어가고 있는 모습. 류효진 기자

한 사람이 평생 몇 번의 직업을 바꾸고, 진로를 전환할까. 저마다 자신이 지닌 자원에 따라 방법도 전략도 다르겠지만 한 직장에서 평생 일하는 풍토는 불가능해지고 있다. 그렇다면, 사람들은 어떤 경로로 진로를 탐색하고 일자리를 찾을 수 있을까.

일자리 센터나 고용지원 프로그램에 참여하면서 직업 교육을 받더라도 취업이 보장되지 않는다. 취업을 하더라도 저임금, 야근, 불안정한 고용 상태로 인해 다시 취업 시장에 내몰린다. 그러다 보니 고등학교 졸업 전부터 공무원 시험을 준비하는 것이 대안이라고 여기는 사람이 늘고 있다. 혹은 40대가 넘어서도 공무원 시험을 준비하는 사람들이 있다. 이제는 노량진, 신림동뿐만 아니라 전국 도서관에서 공무원 시험을 준비하는 사람을 쉽게 볼 수 있다. 공무원이 되려는 사람들이 사는 나라, ‘고시 공화국’이 되어 버린 상황은 역으로 노동 시장이 얼마나 불안정한지 보여 준다.

공무원이 되기 위해서는 긴 시간 시험 준비를 해야 하고, 그만큼 자원이 필요하다. 1년에 한두 번 있는 기회에 모든 것을 걸어야 한다. 기회만 보면 다른 진로에 비해 선택의 폭이 좁다. 불안감에 여러 직렬의 시험을 동시에 준비하거나 사회적 관계를 단절하며 시험 준비에 매진한다. 이런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공무원이 되는 과정이 비교적 공정하고, 기회의 평등이 남아 있는 곳이라고 여긴다. 취업 과정에서 경험한 학력, 계급, 지역, 성별에 따른 차별을 극복할 수 있고, 안정적인 소득을 보장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알지 않는가. 수학능력시험 제도가 기회의 평등이나 공정성을 담보하지 않았던 것처럼, 공무원 시험 제도 또한 기회의 평등을 제공하지 않는다. 이미 가족 자원과 학력에 따라 선택할 수 있는 직급은 달라지고, 결과도 다르게 나타난다. 대입 시험 자체가 대학 서열화를 부추긴 것은 아니지만, 그 장치를 활용하는 사람들은 자원을 통해 계급 재생산에 기여하는 결과를 초래했다. 공무원 시험 준비 과정도 그 수순을 밟고 있다. 마치 대학처럼, ‘공무원 만들기’가 새로운 가족 재생산 전략으로 떠오르고 있다.

불과 이십 년 전만 하더라도 사람들은 대학에 진학하면 안정적인 일자리와 신분 상승의 기회를 보장받을 수 있을 거라고 믿었다. 자녀가 좋은 대학에 가면 좋은 일자리를 얻을 수 있고, 가족 경제도 재생산될 수 있을 것이라고 기대했다. 이런 기대는 이제 공무원 만들기로 이동한 듯 보인다. 노동 시장이 불안정하고, 사회적 안전망이 부족할수록 사람들은 안정성을 추구하기 마련이다. 이를 깨달은 사람은 대학을 중퇴하거나 일찍 공무원 시험을 준비하는 것이 실패를 덜할 수 있는 전략이라고 생각한다.

물론 시험을 준비하는 사람들도 모든 응시자가 공무원이 될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다. 해마다 채용 인원은 줄어들고 지원자가 늘어나는 상황에서 경쟁률이 높아지고 있음을 체감한다. 응시자들 사이에서 변별점을 찾기 위해 시험 문제는 더 어렵고 이상하게 출제된다. 그래도 여전히 포기할 수 없다. 다른 출구가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유일하게 다른 삶을 꿈꿔볼 기회라고 여긴다. 그런 사람들에게 무작정 공무원 시험 준비를 포기하라고 할 수 있을까?

사회가 그동안 ‘공무원 만들기’에 공모한 것은 아닌지 돌아봐야 한다. 열악한 근무 환경을 방치하고, 유연한 노동 시장을 바꾸려 하지 않고, 노동 시장 밖으로 떠밀린 사람들에게 무관심하지 않았는지. 살면서 자신의 진로를 모색하기 위해 충분한 시간과 기회를 제공한 적은 있는지, 적어도 개인이 어떤 삶을 선택하고 준비하는 과정에서 최소한 인간답게 살 수 있게 하는 사회적 보호망은 있었는지. 새해에는 보다 다양한 삶을 실험하고 시도할 수 있는 가능성이 열린 사회에 한 걸음 더 나아갈 수 있기를 바라본다.

천주희 문화연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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