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자 크기 설정

우울한 기분을 치유하는 최고의 힘은 바로 자기 안의 억눌린 잠재력을 쓰는 것, 창조적 일을 해내는 것이다. 영화 ‘웨어 유고 버나뎃(Where’d You Go, Bernadette)’ 예고편 영상 캡처

예전에는 그토록 반짝반짝 빛나던 행복이 왜 이제는 빛 바랜 사진처럼 낡고 덧없어 보이는 걸까. 함께 있기만 해도 주변을 환하게 밝혀주던 커플이 어느 날 갑자기 헤어진다는 소식을 듣거나, 천재적인 재능으로 세상을 깜짝 놀라게 하던 예술가가 심한 우울증을 앓고 있다는 소식을 들으면, 우리가 행복이라 믿었던 것들의 무상함을 뼈저리게 느끼게 된다. 나이 들수록 스펙이나 커리어를 쌓는 능력은 커지더라도, ‘행복을 느끼는 능력’은 자꾸만 감퇴하기 쉽다. 탄소 반감기로 지구의 나이를 측정하는 것처럼, 인간도 ‘행복의 반감기’로 마음의 나이를 측정할 수 있지 않을까. 처음에는 그토록 반짝이던 것들이 살다 보면 자꾸만 빛 바래고, 낡아 버리고, 더는 아름다워 보이지 않게 되어버린다. 기쁨을 발견하는 능력, 설렘을 느끼는 능력이 자꾸만 떨어지는 것이다. 싱그러운 젊음과 뛰어난 재능을 지녔어도 본인이 행복을 느끼지 못한다면 마음이 늙어버린 셈이고, 백발이 성성한 노인일지라도 사소한 일에조차 행복을 느끼는 사람이라면 더없이 싱그럽고 젊은 마음을 지닌 사람이다.

영화 ‘웨어 유고 버나뎃(Where’d You Go, Bernadette)’은 이렇게 행복을 느끼는 능력이 감퇴하는 현상을 디스카운팅 메커니즘(discounting mechanism)으로 설명한다. 다이아몬드목걸이를 선물받은 날은 뛸 듯이 기쁘지만, 며칠 지나면 뇌는 그 목걸이에 더 이상 놀라움도 행복도 느끼지 않게 된다는 것이다. 기쁨이나 설렘을 느끼는 빈도가 너무 쉽게 줄어들어버리고, 위험을 감지하는 기능이 커지면, 행복을 느낄 수 있는 힘은 점점 감퇴하게 된다. 뇌는 생존을 위해 ‘지금의 행복’보다는 ‘미래의 위험’을 감지하는 데 더 큰 에너지를 쏟게 되는데, 그러다 보면 뇌는 생존을 더 중요시하여 기쁨이나 설렘 같은 소중한 감정에 둔감해지게 된다. 미래에 대한 막연한 불안 때문에 지금 눈앞의 행복조차 반감시켜버리는 인간의 마음은 끊임없는 걱정과 불안으로 가득 차게 된다. 주인공 버나뎃이 바로 그런 사람이다. 남극으로 떠나는 가족여행 한 번 준비하는 데도, 너무 많은 잠재적 위험 요소를 고려하며 온갖 물건을 사들이고, 여행을 떠나기도 전에 이미 지쳐버리는 사람. 행복할 수 있는 기회가 눈앞에 널려 있는데도, 자꾸만 과거의 상처나 미래의 불안만을 생각하다가 수면 중에도 공황발작을 일으키는 사람.

버나뎃은 원래 뛰어난 재능을 인정받은 건축가였지만, 자신의 야심작이자 건축상까지 받았던 건물을 돈 많은 부동산업자가 사들여 폭파시켜버린 엄청난 사건으로 인한 트라우마로부터 벗어나지 못한다. 이후 네 번의 유산을 거치며 몸과 마음에 더 큰 상처를 입게 된다. 남편은 아내가 숨겨둔 수많은 약병을 바라보며 망연자실하고, 어떻게든 아내의 우울을 치유하기 위해 상담사를 고용하지만 상담사는 아내에게 더 큰 상처를 주고 만다. “극심한 불안장애와 지나친 자신감을 갖고 계시네요.” 엄마가 단지 예민하고 우울한 상태일 뿐, 절대 병자가 아니라는 것을 아는 것은 오직 딸뿐이다. 아내가 실종되자 자살을 의심하는 아빠와 달리, 딸은 전혀 걱정하지 않는다. “엄마가 나 없는 세상을 선택할 리 없어요.”

버나뎃은 알고 있다. 자신의 우울을 치유할 단 하나의 방법은 ‘다시 내가 가장 사랑하는 일을 시작하는 것’뿐임을. 버나뎃은 딸과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떠난 남극이라는 머나먼 장소에서 비로소 자신의 잃어버린 꿈을 발견한다. 새롭게 건설하는 남극기지를 건축하는 일을 따낸 것이다. 샤워도 스트레칭도 할 수 없는 공간에서 살아야 한다 해도, 버나뎃은 아랑곳하지 않는다. 새로운 창조적 활동을 할 수 있다는 것만으로, 가장 사랑하는 일을 되찾았다는 것만으로, 그녀는 비로소 행복할 수 있는 능력을 되찾은 것이다. 우울한 기분을 치유하는 최고의 힘은 바로 자기 안의 억눌린 잠재력을 쓰는 것, 창조적 일을 해내는 것이다. 경력이 단절되었다는 이유로, 도대체 나의 꿈이 무엇인지 잊어버렸다는 생각 때문에 괴로운 이들에게 이 영화를 보여주고 싶다. 우리 안의 뮤즈는 아직 죽지 않았다. 당신이 결코 포기하지만 않는다면, 당신 안의 뮤즈는 반드시 깨어나 당신이 지닌 가장 눈부신 날개를 펼쳐 보일 것이다.

정여울 작가

web_cdn

공감은 비로그인 상태에서도 가능합니다

저작권자 © 한국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