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 아는 엄마 기자] 레깅스 입고 맨발로 뛰면 주체적 여성일까

입력
2019.12.13 15:10
수정
2019.12.13 18:54
16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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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 보면 대화에 못 낀다는 두 영화를 결국 보고야 말았다. ‘겨울왕국2’와 ‘82년생 김지영’ 말이다. 겨울왕국2는 아이와 함께 극장에 가서 관람했고, 82년생 김지영은 아이가 잠든 밤에 혼자 인터넷방송으로 봤다. 둘 다 호평이 대다수인 영화지만, 보기 전 짐작했던 대로 영 마음에 들지 않았다. 영화가 그리고 있는 여성의 모습은 너무 비현실적이거나 너무 비관적이었다.

겨울왕국2의 엘사도 전편에서처럼 화려한 마법을 쓴다. 손만 뻗으면 집채만한 파도가 꽁꽁 얼어버리고, 바다 위에서 맨발로 뛰며 말까지 타고 달린다. 디즈니 애니메이션이란 점을 감안해도 눈이 휘둥그래지는 능력이다. 일각에선 전통적인 성 이미지에 머물렀던 애니메이션 속 여성이 주체적인 인물로 그려졌다며, 성 평등 관점에서 이 영화를 긍정적으로 평가한다. 하지만 마법을 기반으로 한 비현실적 주체성에 선뜻 공감이 가진 않는다.

엘사의 의상이 분홍색이 아닌 파란색이라는 점도 호평을 받는다. 그런데 핑크건 블루건, 엘사가 입은 옷은 드레스다. 말 탈 때만 잠시 레깅스로 갈아 입었을 뿐. 영화 흥행과 함께 파란색 드레스와 레깅스는 불티 나게 팔리고 있다. 아이들에게 주체적 여성의 상징이 된 엘사의 의상은 부모의 지갑을 열게 하는 마케팅 수단으로 상품화했다. 드레스가 잘 어울리는, 긴 머리와 잘록한 허리를 가진 예쁜 공주 엘사의 겉모습은 과거 만화 속 전형적인 여성 캐릭터들과 크게 다르지 않다.

독박 육아와 경력 단절을 견디다 못해 빙의 증상까지 나타났다는 영화 82년생 김지영의 줄거리를 많은 전문가들이 ‘우리 사회 평범한 30대 여성의 이야기’라고 소개한다. 여성의 눈으로, 엄마의 눈으로 본 영화는 그러나 평범하지 않았다. 82년생 김지영은 답답할 정도로 무기력했다. 빙의가 아니면 말 한 마디 제대로 못하는 영화 속 김지영은 그가 처한 것과 비슷한 현실에서 분투 중인 엄마들을 맥 빠지게 한다.

김지영의 롤 모델로 등장한 영화 속 직장 상사는 육아는 오롯이 다른 가족에게 위임한 채 남성들과 치열하게 부대끼며 일에만 몰두하는 여성으로 묘사됐다. 세상에는 가족에게도, 직장에게도 부담이 되지 않으려 매일 이리 뛰고 저리 뛰는 엄마들이 훨씬 많다. 이도 저도 제대로 못하고 있다는 자괴감을 누르며 양쪽에 모두 최선을 다하리라 다짐하는 정말 평범한 엄마들에게 이 영화의 두 여성 캐릭터는 너무나 극단적이다.

대중문화 속 여성의 모습은 그 자체가 사실로 받아들여지는 경향이 있다. 좀더 현실적일 필요가 있고 좀더 공감돼야 하는 이유가 그래서다. 아이들이 쉽게 접하게 되는 대중문화 속 여성상은 오히려 성에 대한 고정관념을 강화할 수 있다. 사실 과학계 한편에선 이와 유사한 문제가 수년 전부터 제기돼왔다. 출간된 책이나 공개된 논문 등을 통해 대중들에게 알려진 성 관련 과학 연구와 이론들이 쉽게 일반화하며 자칫 남녀 차이에 대한 편견을 확대재생산할 가능성이 있다는 우려다.

한때 국내외에서 기능성 자기공명영상(fMRI)으로 뇌의 특정 영역을 분석하는 연구가 유행처럼 번졌다. 몇몇 피험자들을 모집해 언어나 공간, 공감, 수학 등과 관련된 과제를 내준 다음 이들이 과제를 수행하는 동안 뇌 fMRI 영상을 찍는 식이다. 영상 분석으로 뇌에서 활성화하는 부위나 정도, 시간 등을 알아내 이를 근거로 여성은 남성보다 언어 능력이 낫다거나 남성은 여성보다 공간 감각이 좋다는 등의 결론을 내리곤 했다. 남녀에 대한 고정관념을 과학이 증명했다는 식이다. 이 과정에서 성별간 차이가 크지 않은 연구는 묻히고, 뚜렷하게 나온 연구는 대중에 알려지기도 했다.

저명한 과학자들이 일반 대중을 대상으로 쓴 책도 마찬가지다. 서울대 연구진이 최근 한국과학기술학회에 발표한 연구논문에 따르면 국내외에 소개된 과학 대중서에선 특정 분야의 능력이나 선호도 등에 대한 남녀의 차이를 진화의 결과로 설명하는 경우가 적지 않다. 이는 남녀의 차이가 돌이킬 수 없는 것이라고 대중이 받아들이게 만든다고 논문은 지적했다. 특히 진화심리학을 다룬 대중 과학 서적에 이 같은 왜곡이 적지 않다고도 꼬집었다.

우리 사회는 남자 여자를 다른 관점으로 보는 데 여전히 관대하다. 레깅스 입고 말을 타고 마법으로 문제를 해결한다고 주체적인 여성이라 보는 시각도, 육아의 무게와 시월드의 차별에 못 견뎌 빙의에 이른 여성의 상황을 일반화하는 시각도 불편하다. 실험과 전문지식을 도구 삼아 대중의 성 편견을 일반화하던 과학의 행태가 불쾌했던 것처럼 말이다.

임소형 기자 precare@hankooki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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