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과 문화] 진정한 공부와 열정의 행복

입력
2019.12.12 04:40
31면
붓다 역시 35세 때 ‘깨닫지 못하면 다시는 일어나지 않겠다’는 죽음의 도전 끝에 완전한 행복을 성취했다. 능력이 부족한 것은 어쩔 수 없지만, 열정이 부족한 것은 부끄러운 일이 아닐까! ©게티이미지뱅크
붓다 역시 35세 때 ‘깨닫지 못하면 다시는 일어나지 않겠다’는 죽음의 도전 끝에 완전한 행복을 성취했다. 능력이 부족한 것은 어쩔 수 없지만, 열정이 부족한 것은 부끄러운 일이 아닐까! ©게티이미지뱅크

중국 송나라의 주렴계는 신유학(新儒學)의 시원을 연 인물이다. 송나라 4대 시인 중 황정견은 주렴계에 대해 “가슴 속이 깨끗하고 속된 기운이 없어, 초목이 바람에 흔들려 빛나는 것 같고 비 갠 뒤에 환하게 드러나는 달과 같다”고 찬탄했다. 주렴계는 수양이 잘 된 훌륭한 인격의 도적인이자 교육자였던 것이다.

이 주렴계에게 수학하는 분이 정명도와 정이천 형제로, 이들에 의해서 성리학(주자학)과 심리학(양명학)이라는 신유학의 두 갈래가 확립된다. 그런데 ‘논어집주’에는 주렴계가 정씨 형제(二程)를 교육할 때, ‘언제나 공자와 안자가 즐거워한 것이 무엇인가를 찾게 했다’는 언급이 있다.

안자는 공자의 수제자인 안회인데, 31세에 요절한 비운의 천재이다. 공자는 안회를 극찬하여, “한 그릇의 대나무 밥과 표주박의 물(簞食瓢飮)로 좁고 누추한 곳에 살면, 사람들은 근심을 견디지 못한다. 그런데 안회는 그 속에서도 즐거움을 바꾸지 않는구나!” 하였다. 안회에게는 물질적인 궁핍을 넘어서는 행복한 공부인의 자세가 존재했던 것이다. 주렴계는 매양 정씨 형제에게 이 같은 행복의 공부를 환기시킨다. 이를 신유학에서는 ‘위기지학(爲己之學)’, 즉 자신을 위한 참된 공부라고 한다.

공부의 목적이 좋은 직업을 얻는 것일 수도 있다. 수단으로서의 공부인 셈이다. 이를 신유학에서는 ‘위민지학(爲民之學)’, 즉 타인을 위한 공부라고 해서 상대적으로 낮게 평가한다. 인간의 모든 수단이 지향하는 궁극적인 목적은 행복이다. 이런 점에서 행복을 직접 가리키는 공부야말로 가장 확실하고 본질적인 공부라는 강조인 셈이다.

‘논어’ ‘자한’에서 공자는 “아는 자는 좋아하는 이만 못하고, 좋아하는 자는 즐기는 이만 못하다”고 했다. 우리는 과연 공자가 말한 즐거움에 미쳐본 적이 있는가? 미쳐보지 않았다면 우리의 삶은 아직도 미진한 미성숙인 것은 아닐까?!

나 역시 불교를 교육할 때, ‘붓다는 왜 왕위권을 버리고 출가했을까?’라는 화두를 던지곤 한다. 공부에 대한 진지한 추구가 존재하지 않는다면, 학문은 허상이 되고 지식은 행복이 되지 못하기 때문이다. 즉 본질을 놓치고 마는 것이다.

붓다의 출가는 물질만으로 완성될 수 없는 인간의 행복을 정조준하고 있다. 출가를 영어로는 ‘위대한 포기(Great Renunciation)’라고 번역한다. 진정한 행복을 위해서 최고의 기득권을 내려놓는 선택이라는 의미가 출가에 내포되어 있기 때문이다.

안회가 단사표음(簞食瓢飮)으로 안빈낙도할 수 있었던 것은 붓다의 출가라는 진정한 행복 추구와 맞닿아 있다. 또 이는 공자가 “아침에 도를 들으면 저녁에 죽어도 좋다”고 말한 엄숙한 공부인의 자세와 통한다.

안회의 31세 요절은 거침없는 행복의 삶을 산 결과이다. 붓다 역시 35세 때 ‘깨닫지 못하면 다시는 일어나지 않겠다’는 죽음의 도전 끝에 완전한 행복을 성취했다. 능력이 부족한 것은 어쩔 수 없지만, 열정이 부족한 것은 부끄러운 일이 아닐까!

‘논어’ ‘자한’에는 “삼군을 지휘하는 장군이라도 능히 꺾을 수 있지만, 평범한 사람의 굳센 의지만큼은 빼앗을 수 없다”는 구절이 있다. 이런 ‘범부의 굳은 의지’가 없는 것은 너무나도 슬픈 일이다. 반성적 사유가 필요한 대목이 아닌가 한다.

행복은 선택이 아닌 모두가 향유해야 할 권리이다. ‘서경’ ‘홍범’은 오복의 첫째로 장수를 꼽는다. 그러나 안회를 보면 오래 사는 것이 복일지는 몰라도 행복은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오래 사는 것보다 ‘지금 여기에서 행복할 수 있느냐?’야말로 현대를 사는 우리에게 있어 가장 큰 의미가 아닐까?! 이런 점에서 진정한 공부에 대한 생각은 우리의 의식을 강하게 환기하고 있다.

자현 스님ㆍ중앙승가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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