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평선] 미치광이 정치의 ‘실존적 위험’

입력
2019.12.10 18:00
수정
2019.12.10 18:15
30면
보이콧 파행 강행 충돌 저지 삭발 단식 파국 등 살벌한 말만 오고간 올해 한국 정치는 ‘실존적 위험’이다. 그 주역들이 미치광이는 되지 말아야 한다. 사진은 4월29일 오후 자유한국당 나경원 원내대표와 의원들이 정치개혁특별위원회 전체회의장 앞 복도에 드러누워 선거제도 개혁법안의 패스트트랙 지정에 항의하는 모습. 배우한 기자 /2019-04-30(한국일보)
보이콧 파행 강행 충돌 저지 삭발 단식 파국 등 살벌한 말만 오고간 올해 한국 정치는 ‘실존적 위험’이다. 그 주역들이 미치광이는 되지 말아야 한다. 사진은 4월29일 오후 자유한국당 나경원 원내대표와 의원들이 정치개혁특별위원회 전체회의장 앞 복도에 드러누워 선거제도 개혁법안의 패스트트랙 지정에 항의하는 모습. 배우한 기자 /2019-04-30(한국일보)

니키 헤일리 전 유엔주재 미국 대사는 지난달 출간한 회고록 ‘외람된 말씀이지만(With all due respect)’에서 “트럼프 대통령이 2017년 ‘화염과 분노’ ‘완전 파괴’ 운운하며 북한 김정은 위원장과 벌인 설전은 철저히 기획된 미치광이 전략의 하나”라고 소개했다. “(군사적 대응 등) 모든 옵션이 테이블 위에 있다고 떠들어 북한이 나를 미쳤다고 생각하게 만들라”는 말도 했다고 한다. 후보 시절 그는 “미치광이(maniac)가 핵무기를 갖고 있다”고 김 위원장을 공격했는데, 정작 협상 국면에선 본인이 미치광이처럼 보이기 원했던 모양이다.

□ 북한이 미국에 새로운 비핵화 셈법을 요구하며 제시한 연말 시한이 다가오면서 양국 간의 말이 거칠어지고 있다. 트럼프의 ‘로켓맨’ 언급에 북한이 ‘늙다리 망령’으로 대꾸하고 “비핵화는 협상 테이블에서 이미 내려졌다”고 하자 트럼프는 “적대적 방식으로 나오면 모든 것을 잃을 수도 있다”며 군사 옵션을 꺼냈으며 이에 북이 “우린 잃을 게 없다”고 맞짱 뜨는 식이다. 지난해 2월 평창 동계올림픽 이후 남북ᆞ북미 간 역사적 만남과 “한반도에 전쟁은 없다”던 장담은 꿈인 듯하고 나라 전체가 무엇에 홀린 듯한 느낌마저 든다.

□ 미국 온라인 사전 딕셔너리닷컴(Dictionary.com)이 올해의 단어로 ‘실존적(existential)’을 선정했다고 한다. 단어도 어렵지만 “다양한 도전 속에서 우리가 누구인지, 삶의 목적이 무엇인지 등에 대해 큰 질문을 던질 것을 제안하고 그 질문에 어떻게 답하느냐에 따라 우리 삶의 방향을 선택할 수 있음을 상기시킨다”는 선정 이유는 더 어렵다. 그러나 “기후변화 문제의 심각성이나 민주주의 위기 등을 부추기는 트럼프의 미치광이 리더십이 인류의 ‘실존적’ 위험”이라는 문장을 보면 단어의 맥락이 쉽게 와닿는다.

□ 철학적 용어인 ‘실존적’이란 말에는 ‘사랑하는 사람과 우리 삶의 방식을 존속시키려고 노력한다’는 맥락이 담겨 있다고 한다. 맥락은 다르지만 이 말이 올해의 단어로 선정된 취지를 우리 정치에 대입시켜 보면 어떨까. 누군가는 ‘피아 구분’이 정치의 본령이라고 했지만 사실 정치의 존재 이유는 백성의 삶을 풍요롭고 여유롭게 하는 것이다. 그런 만큼 보이콧 파행 강행 충돌 저지 삭발 단식 파국 등 살벌한 말만 오고간 올해 정치는 실존적 위험이다. 그 주역들이 미치광이는 되지 말아야 한다.

이유식 논설고문 jtino57@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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