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과 문화] 김 한 첩의 골목길

입력
2019.12.06 04:40
31면
옛날엔 참김 한 첩 사는 게 소원이었던 사람도 많았다. 자르르 윤기 흐르는 참김에 소금 술술 뿌려 밥반찬 내는 집은 부자였다. ©게티이미지뱅크
옛날엔 참김 한 첩 사는 게 소원이었던 사람도 많았다. 자르르 윤기 흐르는 참김에 소금 술술 뿌려 밥반찬 내는 집은 부자였다. ©게티이미지뱅크

겨울에 심부름으로 동네 가게에 다녀오는 날은 바람이 정말 찼다. 70년대였다. 의복이 부실했던 것인지, 날씨가 요즘보다 추웠던 것일까. 그때 애들은 볼과 손등이 갈라지고, 발갛게 동상이 드는 게 흔한 일이었다. 그렇게 종종걸음으로 다녀온 가게 심부름은 더러 김을 사오는 것이었다. 김도 그때는 철이 분명했다. 찬바람 불면 김을 먹겠구나, 이런 생각이 어릴 때도 들었다. 산지에도 냉장저장 시설 같은 게 부실했을 테니, 겨울 지나 봄까지 먹고 끝내는 게 김이었다. 한여름에 먹었던 기억은 별로 없다. 절절 끓는 방, 교자상에 둘러앉은 가족, 구운 김, 그리고 할머니와 할아버지, 그리고 아버지. 김은 주인공인 적이 없던 반찬이지만, 상에 올라오면 인기가 좋았다. 귀했고, 맛있었다. 참기름간장을 찍어서 말이다.

가게 심부름이래 봐야 김 한 첩, 딱 열 장이었다. 김밥 싸는 철이 아니면 비싸서 두 첩은 못 샀던 것 같다. 엄마는 꼭 김을 한 장씩 열어보며 숫자가 맞는지, 부실한 김은 없는지 살펴보라고 일러주셨다. 아닌 게 아니라 더러 김 숫자가 맞지 않거나, 귀퉁이가 찢겨 나간 것도 있었다. 귀한 김이니, 검수(?)도 까다로웠다. 김을 봉지에 제대로 넣어주지도 않았던 것 같다. 그냥 김 한 첩을 손에 쥐고 덜렁덜렁 바삐 집으로 달렸다. 골목길 바람은 어찌도 그리 볼을 차갑게 때리던지.

80년대 들어 서해안에서 완도에 이르는 김 주산지에 농사 기술이 늘고, 투자가 되면서 김 가격은 뚝뚝 떨어졌지만, 과거에는 정말 귀했다. 자르르 윤기 흐르는 참김에 소금 술술 뿌려 밥반찬 내는 집은 부자였다. 언젠가부터 이미 구워 나오는 ‘양반김’이 식탁을 차지했지만, 오랫동안 김은 어머니가 직접 굽는 책임자였다. 연탄불에 앞뒤로 슬쩍, 구우시면 냄새가 얼마나 고소하게 집 안에 퍼졌던가. 그때 김 굽는 수고를 덜어주는 아이디어가 신문에 실리곤 했는데, 양은 도시락통에 김을 재워 넣고 은근한 연탄불에 올리면 한 번에 구워진다는 것이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한 장씩 불에 직접 굽는 맛을 이겨낼 수는 없었다. 요즘엔 입맛 없으면 사철 아무 때나 김을 꺼내고, 간편한 구이 김을 밥상에 올리며, 심지어 급식에서 그 ‘식탁용 김’이 오르면 그다지 성의 있어 보인다는 말을 못 듣는 세상이 됐다. 언젠가 김 농사를 보러 갔다. 그들은 김도 농사라고 한다. 바닷물에서 하는 일이지만, 씨 뿌리고 거두는 과정이 농사와 같다. 더구나 김도 빛을 쬐고 질소와 인을 먹고 자라는 작물이다. 김 농사를 ‘해의(海衣)한다’고도 한다. 옛 우리말이다. 말은 멋진데, 일은 고되다. 그래서 김 농사철을 앞두고, 주산지에서 가까운 인력사무소에는 해의할 사람 구하는 요청이 빗발친다. 이 역시, 이주노동자 손을 빌리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 돼버렸을 것이다. 다 자란 물김을 크레인으로 건져 올려 공장에서 씻고 펴 말려 시장에 나온다. 금속탐지기 같은 게 동원되는 공장도 많다. 김에 이물질이 있는지 살피는 것이다.

옛날엔 참김 한 첩 사는 게 소원이었던 사람도 많았다. 그 돈이 없어 가장 싼 파래김을 샀다. 파래는 김밭에서는 훼방꾼이었다. 김과 파래는 서로 사는 물이 다른 법인데, 더러 섞이는 경우가 많다. 그걸 없애려고 김 하는 사람들은 머리를 싸매기도 했다. 이젠 파래김이 맛이 각별하다 해서 더 비싸기도 한 시절이 됐다. 세상 알 수 없다는 건 김도 그런 셈이다. 김을 세는 단위는 100장이 한 톳이다. 김 한 톳 들이는 집은 큰 살림이었을 것이다. 이젠 김을 10장, 즉 한 첩씩은 잘 팔지도 않는다. 흔해도 너무 흔해졌다. 김 좀 많이들 드시길. 몸에도 유별나게 좋다고 하니. 그 겨울, 김 사들고 돌아오던 골목에 밥하는 열기가 빠져나가는 굴뚝이 도열해 있던 풍경만 생각난다.

박찬일 요리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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