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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능범죄, 당신을 노린다] <19> 돌려막기 수법 쓰는 ‘허니문 사기’ 
최근-보도된-여행사-사기-사건들. 그래픽=강준구 기자

“원하시는 방이 마침 하나 남아 있어요. 완납 기간은 지났지만 현금으로 바로 입금하시면 환율 우대로 싸게 해드릴게요.”

김수정(가명ㆍ31)씨가 신혼여행 전문 여행사인 ‘H’사로부터 이런 제안을 들은 것은 지난해 10월, 결혼을 두 달 앞둔 시점이었다. 4년 연애 동안 서로 일에 바빠 여행 한번 제대로 못했다. 이왕 가는 거 분위기도 낼 겸 몰디브 리조트에서 가장 좋은 방을 찾던 중이었다.

국내외 여행 상품을 두루 비교하고, 후기를 꼼꼼히 검색하고, 전화 상담도 하던 중 H사의 제안을 받았다. 신혼여행 정도면 두 달 전쯤에는 예약이 끝나 있어야 한다는 얘기를 들었던 터였다. 환율 우대로 싸게 해준다고 해봐야 다른 여행사보다 15만원 싼 정도였지만, 어떻게 구해볼 수 없을까 애태웠던 방이 바로 눈 앞에 있었다. 그날 바로 900여만원을 입금했다.

10월 말 H사는 리조트 바우처를 보내왔다. 뭔가 이상했다. 예약이 끝났으면 표기돼야 할 방 호수가 없었다. ‘예약 완료’ 비슷한 표현을 묘하게 비껴가는 느낌이 역력했다. 몇 번 확인 전화를 해도 응답이 없더니, 다음달 초에야 “폐렴으로 입원해서 이제야 확인했다”, “원래 일단 그렇게 나가고, 출국 일주일 전에 더 자세히 소개한다”고 했다.

 ◇예약? 모두가 거짓이었다 

설마 뭔 일 있으랴 싶었다. 결혼식 열흘을 앞두고 여행사 사람이 전화를 했다. “죄송합니다. 부도 났습니다.” 설마, 싶었다. 계약서도 받아뒀으니 그래도 항공권이나 리조트 자체는 예약이라도 되어 있는 게 아닐까. 여행사 직원은 “예약도 안되어 있다”고만 하더니 전화를 끊었다. 신혼의 단꿈은 악몽이 됐다.

부랴부랴 몰디브 현지 리조트에 전화를 걸었더니 “두 분 이름으로 된 예약은 없다”고 대답했다. H여행사 피해자모임에 가입한 뒤 들은 실상은 이랬다.

몰디브 현지 리조트와 직거래를 하는 총판 격인 여행사가 있고, H사는 여행객을 모아 이 회사를 통해 몰디브 현지와 예약을 진행했다. 문제는 H사 경영사정이 악화됐다는 것. 그러니 생각해낸 방법은 여행객들에게 ‘선결제’를 유도한 뒤 이 돈을 그에 앞서 예약받은 손님들 비용을 쓰는 것이었다. 일종의 ‘돌려막기’인 셈이다.

그래서 몰디브, 칸쿤, 발리 등을 꿈꾸던 피해자들이 여행사에게 들은 얘기는 얼추 비슷했다. 예약금을 냈더니 “잔금을 미리 내면 선결제 프로모션으로 할인이 가능하다”는 말이었다. 피해자들은 ‘어차피 낼 돈, 할인이나 받자’는 생각에 응했다. 자기 돈이 앞선 여행객들의 여행비로 쓰인다는 생각은 못했다.

이 때문에 피해자 모임에서는 기이한 증언들이 흘러 나왔다. 신용카드 내역을 뒤늦게 확인해보니 자기 신용카드로 결제한 돈이 다른 여행객 항공권 결제에 쓰였다던지, 이미 신혼여행지에 도착해 실컷 잘 놀고 퇴실할 때가 돼서야 리조트 비용과 왕복 항공권 결제를 요청 받고 황당했다거나 하는 이야기들이었다.

손님들을 안심시키기 위해 H사가 보내준 ‘리조트 바우처’라는 것도 알고 보니 똑같은 디자인에 문구만 몇 자 새로 고쳐서 자기들 마음대로 보내는 것이었을 뿐이다.

신혼여행 사기 사건. 그래픽=강준구 기자
 ◇돌려막기 수법에 신혼부부 132쌍이 피해 

H사에 대한 수사 결과, 2018년 초부터 피해자는 신혼부부 132쌍, 피해액은 약 7억 2,000만원에 달했다. 적게는 300만원, 많게는 신혼의 단꿈을 꾸며 1,300만원 짜리 상품을 예약한 경우도 있었다.

사실 이런 사건은 신혼부부에겐 충격일지 몰라도, 경찰에겐 좀 ‘뻔한 사건’이었다. 중소 규모 여행사들이 이런 방식으로 버티다 망하는 경우가 드물지 않아서다. H사 사건을 맡아 처리했던 홍영길 구로경찰서 경제2팀장도 피해자들이 한두 명씩 찾아오면서 어떤 기시감을 느꼈다.

고소만큼 수사도 예상대로였다. H사 사무실은 이미 폐쇄됐고, 압수수색한 계좌를 들여다보니 돌려막기가 뻔히 보였다. 7억여원의 범죄 수익금은 이전 예약자의 상품을 결제하고 업체와 개인 빚을 갚는데 쓰이고 있었다.

사기 혐의를 적용하기 위해서는 ‘이런 식으로 사업을 진행해나갈 능력이 있는지’ 여부였다. 그럴 리가 없었다. H사 직원은 대표 김모(38)씨, 영업이사 김모(47)씨 단 두 명이었다. 2014년 함께 여행사를 차렸는데, 2016년 이미 자본금 9,000만원을 날려 먹은 상태였다. 지난해 4월부터는 사무실 임대료도 제대로 못 내고 있었다.

이런 구조 아래서는 경영이 어려워질수록 더 파격적인 할인가를 내세워 적극적인 현금 확보전에 돌입할 수 밖에 없었다. 가만 내버려두면 피해자가 눈덩이처럼 불어나는 구조였던 셈이다.

 ◇’허니문’이 아니라 ‘트라우마’ 

서울남부지법은 지난 7월 김 이사에게 징역 3년, 그의 지시를 받아 실무를 맡은 김 대표에게는 징역 2년의 실형을 선고했다. 하지만 피해 보상의 길은 쉽지 않다.

H사가 그나마 여행보증보험, 기획보증보험 등에 가입해 있었지만 보증한도가 2억3,000만원이라 총 피해액에 미치지 못한다. 피해자들끼리 뭉쳐서 형사배상명령 신청에 나섰지만 H사 직원들의 재산 규모가 마땅히 확인되지도 않은 마당이라 배상도 미지수다.

돈보다 마음의 상처가 더 크기도 하다. 900만원으로 몰디브 여행을 예약했던 김수정씨는 결국 다른 여행사를 통해 700만원짜리 상품으로 몰디브 신혼여행을 다녀오긴 했다. 신혼여행을 망칠 수 없어 그렇게 하긴 했지만, 그 여행이 달가울 리 없다.

김씨는 “결혼을 눈 앞에 두고 당한 일이라 ‘결혼 못할 것 같다’며 한참을 울기도 하고 결혼식 당일까지도 제정신이 아니었다”며 “결혼에 대한 기대로 한참 설레야 할 때인데, 남편이나 저나 H사를 고소해야 한다며 휴가 내고 여기저기 이런저런 서류 떼러 다녔던 기억 밖에 없다”고 말했다.

신혼여행을 포기한 이들도 있다. 이민우(33ㆍ가명)씨는 “H사 사건 뒤 작은 여행사를 못 믿겠으니 그 위에 총판 업체라는 곳을 통해 직접 예약했는데, 재수 없게도 그곳마저 폐업했다”며 “잇따른 고소에, 보상 신청에 지쳐 결국 신혼여행을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고 말했다.

폐업직전 여행사 관련 소비자불만 증가 현황. 그래픽=강준구 기자
 
 ◇이게 여행업계 ‘관행’이라고? 

하지만 이런 수법은 여행업계 ‘관행’이라는 게 대체적인 평이다. “H사 사람들은 처음부터 작정하고 사기를 치려 한 사기범이라기보다 평범한 여행업계 사람들로 봐야 한다”는 게 이 사건을 수사한 홍 팀장의 평이다.

중소업체가 난립하는 여행업계의 특성상 자본금이 충분하지 않은 상태에서 무리한 운영을 하는 이들이 있게 마련이고, 그러다 보면 ‘현금을 바로 입금하면 할인해주겠다’는 식의 영업 방식을 꺼내 들게 되고, 그러다 보면 어느 순간 범죄의 나락으로 떨어진다는 얘기다.

실제 H사 같은 사건은 비교적 흔한 편이다. 다른 신혼여행 전문 여행사의 실제 운영자 김모(36)씨도 지난달 15일 수원지법에서 징역 2년을 선고받았다. 지난해 5월부터 올해 3월까지 수원, 안산 등에서 열린 웨딩박람회 등을 통해 모집한 신혼부부 54쌍에게서 여행경비 1억7,000여만원을 받아 빼돌린 혐의다. 이 사건에서도 김씨의 수법은 돌려막기였다.

지난달 28일에도 제주지역 한 여행사 대표 김모(42)씨가 여행상품 예약금을 숙박업체나 렌터카업체 등 거래처 미수금을 갚는 데 이용하다 구속됐다. H사의 영업이사 김씨는 H사 이전에 이미 비슷한 방식으로 영업을 하다 처벌받은 전력도 있다.

실제 한국소비자보호원 자료를 보면 2018년 폐업한 탑항공 등 4개 여행사의 경우 폐업한 그 해 소비자불만 접수가 크게 늘었다.

영세한 중소 여행사들 사이에서 신혼여행 상품이 주된 범죄 타깃이 되는 건, 상품의 특성 탓이다. 신혼여행이니까 예약 시기와 실제 납부 시기에 몇 달씩 차이가 나고, 거기에다 비교적 비싼 액수라 해도 거부감 없이 받아들이는 경우가 많다.

그래서 피해를 당한 신혼부부들은 더 불만이다. 신혼여행 사기의 경우, 개인에겐 치명적이지만 법률적으론 소액 사건인 경우가 많아 유야무야 넘어가는 경우도 많다. H사의 피해자 중 한 명이자 피해자모임 변호인을 맡았던 변호사 이모(31)씨는 “신혼여행이기 때문에 다소 부담스러운 거금일지라도 내는 것인데, 여행업계에서는 그게 ‘관행’이라고 변명한다”며 “보증보험 강화 등 실질적인 대처방안이라도 좀 나왔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이 변호사는 물론, 다른 피해자들도 한데 입을 모아 내는 목소리다.

정준기 기자 joon@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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