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자 크기 설정

※ 36.5℃는 한국일보 중견기자들이 너무 뜨겁지도 너무 차갑지도 않게, 사람의 온기로 써 내려가는 세상 이야기입니다.

고위층 성매매 알선업자 고모씨가 다른 포주와 성매매 여성들을 품평하고 성매수 남성의 상황을 주고받은 텔레그램 메시지.

찬바람이 꽤 거셌던 지난 18일 오후 서울 마포구의 한 아파트단지에서 한참 헤맸다. 그 아파트 상가동의 10~45호를 쓴다는 R사의 사무실은 도통 찾을 수가 없었다. 상가동은 1~9호가 끝이었다. 사무실 임대업체 관계자에게 “R사는 사업자등록만 여기로 해놓은 것”이란 설명을 듣고서야 유령업체를 찾아 헤맨 걸 알았다. 개인은 한해 39만원, 법인은 44만원이면 사업자등록 주소지를 빌릴 수 있다.

R사는 유튜브 크리에이터, 온라인ㆍ쇼핑몰 모델을 발굴ㆍ관리하는 회사다. 홈페이지 설명에 따르면 그렇다. 홈피에는 창작공간으로 쓰이는 사무실 사진들도 많다. 나처럼 발품을 팔아야만 그런 공간은 없다는 걸 알 수 있다.

이 업체를 찾은 건 고위층 성매매 알선업자 고모씨가 이 업체 대표를 맡게 됐다는 소식을 접하고서다. 고씨는 단역 여배우나 모델 등에게 영화ㆍ방송 등 캐스팅을 미끼로 회유ㆍ협박해 고위층에 성매매를 알선한 혐의(본보 4월 4ㆍ5일자)가 짙다. 한 회 수백만원의 성매매 대금 중 30% 정도를 그가 챙겼다고 한다.

여성이고 40대로 추정되는 고씨(고○○라는 이름도 가명 추정)는 계속 접촉을 피하더니 첫 보도를 보고 내게 전화 했다. 떨리는 목소리로 이름만 말하면 전국민이 알 만한 고객들을 언급하고, 화를 내면서도 두려워했다. 이런저런 ‘딜’을 시도하며 만나자고 했다. 그의 요구는 무리했고 나는 범죄 혐의자에게 거짓 보호를 확약하며 정보를 빼내고 싶지는 않아 거절했다. 고씨는 내가 알고 있는 전화번호 두 개를 해지하고 잠적했다.

8개월이 흘렀다. 보도가 수사로 이어졌다면 내 짐을 내려놓을 수 있었을 텐데, 나 빼고 아무도 관심이 없으니 진척 없는 취재를 놓지 못했다. 지난번에 만남을 거부했던 것을 후회하며, 더 설득하고 사건을 파고들어갈 생각으로 고씨를 찾았다. 그는 다시 ‘그 일’을 하고 R사의 대표가 됐다는 소문이 들렸다. R사 관계자를 찾아서 고씨와의 만남을 요청했으나 실패했다. R사 홈피의 ‘모델 모집’이라는 문구는 나를 슬프게 한다. 고씨의 소개로 성매매에 나선 적이 있는 무명 모델, 배우 출신 여성 두 명과 통화한 적이 있다. 한 여성은 고씨의 이름을 듣는 것 만으로 바들바들 떨며 두려움을 호소해 전화한 게 미안할 지경이었다. 다른 여성은 정신과 치료를 받고 있으며 이상할 정도로 “죄송하다” “감사하다”는 말을 많이 했다. 이들은 성매매 상대는 말하지 않았고, 더 추궁할 수는 없었다.

고씨가 ‘고위층’과 거래한 덕에 검경은 그의 편이며, 좌절은 취재기자의 몫이다. 공소시효 저편으로 넘어가 버린 장자연 사건, 김학의 사건이 그랬듯. 성매매 여성이 제출한 자술서를 확보하고도 검경이 수사하지 않았다는 기사를 신문에 실은 지난 4월, 기사로 알렸으니 수사가 이뤄질 지도 모른다는 기대를 잠시 했었다. 그러나 다음날 검찰 관계자가 내게 전화해 한 말은 “제 이름을 기사에 쓰시면 어떻게 하냐”는 항의였다. ‘검사 이름을 쓰면 취재 협조 받기가 어렵다’는 불문율을 떠올리며, 잘못을 나에게로 돌리고 온라인 기사에서 그의 이름을 빼줬다. 돌이켜보면 그 검찰 관계자에게 고씨가 썼던 휴대폰 번호들을 전달하며 “수사에 참고해 달라”고 했던 내가 한심하다. 고씨가 고객들에게 협박당할까 두려워할 때 그의 신변을 걱정했던 나도 한심하다. 한때 고씨를 고발하는데 관심을 보이던 한 시민단체에게 기대를 했던 나는 더 한심하다. 그 단체도 관심을 거둬들였다.

이쯤 되니 이상한 건 나인가 싶다. 단역 여배우나 모델들도 어쨌건 자발적으로 ‘성매매’한 것이고, 그런 상황에서 ‘고위층’을 겨냥하기에 성매수는 너무 ‘별거’ 아닌 범죄인가 보다. 그 사이에서 활보하며 돈을 끌어 모으는 고씨는 그냥 ‘수완이 좋은 사람’인가 보다. 검경은 다른 중요한 수사가 정말 많은가 보다. 고위층 성범죄는 절대 처벌할 수 없게 돼 있는데, 한심한 내가 철없이 기대를 했다.

이진희 기획취재부 차장 river@hankookilbo.com

web_cdn

공감은 비로그인 상태에서도 가능합니다

저작권자 © 한국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