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6.5℃] 아프리카돼지열병이 남긴 것

입력
2019.11.28 04:40
30면

※ 36.5℃는 한국일보 중견기자들이 너무 뜨겁지도 너무 차갑지도 않게, 사람의 온기로 써 내려가는 세상 이야기입니다.

농림축산식품부와 환경부의 방역대책 및 살처분 정책에 반대한 강원 철원지역 한돈농가 주민들이 지난 5일 세종시 정부세종청사 농림축산식품부 앞에서 집돼지들의 살처분 과정을 재현하고 있다. 세종=연합뉴스
농림축산식품부와 환경부의 방역대책 및 살처분 정책에 반대한 강원 철원지역 한돈농가 주민들이 지난 5일 세종시 정부세종청사 농림축산식품부 앞에서 집돼지들의 살처분 과정을 재현하고 있다. 세종=연합뉴스

이쯤 되면 ‘재난’이다. 일단, 유·무형적인 손실이 적지 않다. 환경 오염과 인근지역 농가에 파생된 부작용도 심각하다. 지난 9월 중순, 100% 치사율로 무장하고 국내에 잠입한 아프리카돼지열병(ASF)의 흔적이다. 다행히 발생 2개월여 만에 잠잠해졌지만 남겨진 과제는 여전히 많다.

우선, ASF 수습 과정에서 불거진 관계당국의 고질적인 ‘뒷북 행정’은 곱씹어 볼 대목이다. 사실, 돼지 살처분은 어제 오늘 일이 아니다. 한국농촌경제연구원에 따르면 올해 살처분된 돼지는 현재까지 38만968마리다. 이는 사상 최악의 구제역 사태가 벌어졌던 지난 2010년 매몰된 347만9,962마리에 이어 두 번째로 많다. 그 사이에도 크고 작은 구제역 등으로 돼지는 꾸준하게 살처분됐다. 선행학습은 충분했단 얘기다. 지난 11일 경기 연천군 내 매몰된 돼지 사체에서 흘러나온 핏물 등의 침출수 유출을 납득하기 어려운 이유도 여기에 있다. 이 사고는 많은 비 속에 당시 민간인출입통제선 내 트럭에 쌓아 뒀던 4만7,000여마리의 돼지 사체에서 시작됐다. 연례행사처럼 살처분이 진행됐지만 예상 가능했던 우천으로 인해 침출수 사고가 벌어졌단 관계당국의 무책임한 설명은 직무유기에 가깝다. 그 사이 피해는 고스란히 인근지역 주민들에게 돌아갔다. “침출수가 스며든 물을 어떻게 마시고 농사까지 지으란 말이냐”는 지역 농민들의 볼멘소리도 곳곳에서 터져 나왔다. 사고지점에서 약 16㎞ 떨어진 임진강으로의 유입 가능성까지 제기됐다. 임진강은 연천군 주민들의 상수원이다. 지하수 오염 가능성 역시 배제할 순 없다. 김현수 농림축산식품부 장관은 “관리에 미흡한 점이 있었다”면서도 “현장을 방문해 점검한 결과, 하천 수질엔 문제가 없었다”고 사고 발생 이후 이틀이나 지나서야 뒤늦게 사과했지만 초라한 변명으로 들렸다.

살처분 처리 방식 또한 풀어야 할 숙제다. 연천군 침출수 사고도 매몰지가 확보되지 못한 가운데 급하게 살처분을 서두르면서 발생했다. 문제는 ASF 재발 우려에 있다. “야생 맷돼지에서 계속적으로 ASF 바이러스가 발견되고 있기 때문에 안심할 순 없다”는 게 전문가들의 공통된 진단이다. ASF를 포함해 매년 되풀이되는 구제역이나 조류인플루엔자(AI)까지 감안하면 살처분 매몰 처리 방식엔 한계가 있다. 실제 지방자치단체와 농가에선 “살처분된 돼지나 닭 등을 더 이상 묻을 곳이 없다”며 아우성이다. 농림축산식품부에 따르면 2010년부터 최근까지 구제역이나 AI, ASF 등으로 조성한 매몰지는 약 6,000여 곳에 달한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각 지자체에선 매몰지 확보의 어려움 등을 호소하면서 선진국처럼 매몰 방식이 아닌 살처분 전용 처리시설 도입에 주목하고 있다. 스위스나 독일 등 유럽연합(EU) 국가의 경우엔 자연친화적인 비매몰 방식을 법제화하고 있다.

실의에 빠진 양돈농가 구하기는 가장 시급한 현안이다. 특히 인근지역에 ASF가 발생했단 이유로 감염 여부와 무관하게 자식 같은 돼지를 살처분한 양돈농가는 현재 말 그대로 패닉 상태다. 정부 보상금에서 이미 선지급한 사료값 등을 제외하면 남는 게 없다. 축사시설 개선 등에 사용한 은행 대출과 이자를 생각하면 앞은 더 캄캄하다. 최근 대한한돈협회가 수도권 농장 179곳을 전수 조사한 결과, 1개 농가당 약 11억원 상당의 빚으로 축사 시설을 개선했다. 정부에서 2009년부터 축사 신축 비용과 관련, 저금리 융자에 나섰지만 지원 대상에서 밀려난 양돈농가가 제2금융권 등으로부터 돈을 빌린 탓이다. 양돈농가에 합리적인 보상 대책이 절실한 까닭이다. 아직도 현장에선 “ASF 전염 경로는 야생 맷돼지인데, 애꿎은 집돼지 농가만 피해를 봐야 하느냐”는 양돈농가들의 절규가 절절하다. ASF는 수면 아래로 가라앉았지만 양돈농가의 파산 공포는 여전히 현재진행형이다.

허재경 지역사회부 차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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