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아리] 홍콩 시민을 응원한다

입력
2019.11.13 18:00
수정
2019.11.13 19:00
30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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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찰이 시위대에 총질하는 홍콩의 오늘

문명사회 어쩌다 이 지경까지 이르렀나

자유 상실에 대한 저항 의지, 결실 보길

12일 홍콩에서 경찰이 쏜 총에 시민이 맞는 사건이 발생하면서 홍콩 시위는 동시다발 교통방해 시위, 지하철 운행 중단 등의 형태로 계속 확대되고 있다. 연합뉴스
12일 홍콩에서 경찰이 쏜 총에 시민이 맞는 사건이 발생하면서 홍콩 시위는 동시다발 교통방해 시위, 지하철 운행 중단 등의 형태로 계속 확대되고 있다. 연합뉴스

2000년대 초 출장 길에 들른 체코 수도 프라하. ‘벨벳 혁명’의 중심지 바츨라바 광장은 이렇다 할 기념비나 동상조차 눈에 띄지 않았다. 1989년 말 공산 독재를 무너뜨리는 시민혁명이 벌어질 당시 한 명의 희생자도 없었던 때문이었을까. 당시 현지 가이드의 설명에 ‘참으로 복 받은 민족’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나치 독일 항거와 프라하 대학 폐쇄 50년을 기념한 학생 집회에서 곤봉을 든 경찰의 과잉 진압과 폭력 행사로 촉발된 시위가 전국으로 확산되면서 시위 6주 만에 공산 독재자 후사크가 권좌에서 물러났다. 이보다 앞선 1968년 대학생의 분신 저항에도 소련군 탱크에 짓밟혀 실패로 끝난 ‘프라하의 봄’을 겪었던 이 나라가 천만다행으로 20년 뒤엔 유혈 사태 없이 민주적인 정부 수립의 길로 들어선 걸 보고 그리 생각했다. 개혁개방 노선에 따른 공산 종주국 소련의 영향력 약화와 동유럽 공산 정권의 잇따른 붕괴 속에 마지막 남은 후사크 정권마저 시민의 저항 의지에 무너졌으니 대학 시절 귀가 따갑게 들었던 구절이 떠올랐다. ‘민주주의가 피를 먹고 자라기만 하는 건 아니구나….’

반면 시위 23주 동안 뜻밖의 전개를 거듭하고 있는 홍콩 사태는 안타까움과 착잡함을 더한다. 지난 11일 백주 대낮에 벌어진 진압 경찰의 총격으로 한 시위대원이 쓰러지는 영상은 충격적이다. 젊은 시위자가 달려들 듯한 기세를 보이자 진압 경찰이 바로 젊은이의 상부에 총질을 해댔다. 불과 1, 2m 거리다. 처참한 광경이다. 21세의 청년은 돌 몽둥이 같은, 무기가 될 만한 것도 갖고 있지 않았던 맨몸인지라 홍콩 경찰의 의도는 분명해 보인다. 위협에 대한 우발적 대응이 아니라 필요할 경우 시위대를 향해 쏘겠다는 명백한 의사 표시. 문명사회 홍콩이 어쩌다 이 지경이 되었나 싶다.

지난 8일엔 시위 현장에서 추락사하는 사고가 있었고, 시위 참가자의 의문사 숫자가 늘고 있다는 소식도 들린다. 체포된 시위자만 3,000명이 넘고, 이 가운데 500명 가까이가 기소됐다고 한다. 경찰의 진압 강도는 도를 더해 성당과 대학 구내까지 최루탄을 쏘며 시위대를 체포하고 있는 실정이다. 검은 마스크와 복면, 피투성이가 된 얼굴까지 홍콩 시위 양상은 과거 대한민국의 모습이다. 86세대에겐 전혀 낯설지 않은 광경이다. 연민과 연대의식을 느낄 수밖에 없는 홍콩의 암울한 현실이다.

6개월 전 정치적 자유에 대한 위협으로 간주한 송환법 반대 시위는 홍콩 당국의 철회 선언으로 한풀 꺾이는 듯 하더니, 최근 경찰의 강경 진압은 사그라들던 불씨에 기름을 끼얹는 형국이다. 여기에는 중국 입김이 큰 영향을 미쳤을 터다. 지난달 말 열린 중국 공산당 중앙위원회 4차 전체회의는 국가 안보를 운운하며 홍콩 시위에 대한 강경 대응을 주문했다. 중국은 홍콩 시위를 외세 개입에 의한 국가 분열 행위로 규정하고 있다. 시진핑 주석은 민심을 잃은 캐리 람 홍콩 행정장관을 재신임 했다. 역사적으로 모든 시위가 그러하듯 진압이 강경해질수록 저항은 더 격해지기 마련이다. 중국 전문가인 장정아 인천대 교수는 한 라디오 인터뷰에서 “홍콩인의 정부가 시민들의 입장에서 대변했더라면 이 지경까지 오지 않았을 거라는 점에서 홍콩 시민의 불만과 분노, 슬픔이 큰 상태”라고 했다.

평화로웠던 홍콩 시민에게 족쇄를, 굴레를 씌우려는 중국과 홍콩 당국의 거대한 힘에 홍콩의 미래, 자유의 항로가 그다지 밝아 보이진 않는다. 고립주의에 물든 트럼프 미국 행정부마저 오락가락 미온적인 태도라 적극 개입 의지가 없는 듯하다. 그럼에도 저항을 멈추지 않는 홍콩 시민의 의지와 정신이 경이롭다.

자유는 상실했을 때, 상실의 위기에 놓였을 때 그 가치를 제대로 이해할 수 있다는 어느 철학자의 말이 실감나는 지금이다. 이 나라도 오랜 시간 빛이 보이지 않던 시절이 있었다. 무수한 피를 흘렸다. 그럼에도 버티고 버틴 끝에 빛이 찾아왔다. ‘노예의 길’을 거부하고 있는 홍콩 시민을 응원한다.

정진황 뉴스1부문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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