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자 크기 설정

김상조(맨 오른쪽) 정책실장 등 청와대 참모진이 지난 10일 청와대 춘추관에서 문재인정부 반환점을 맞는 소회와 집권 후반기 계획을 밝히고 있다. 뉴스1

김상조 청와대 정책실장(전 공정거래위원장)이 검찰과 법원에서 모두 ‘까였다’. 공정위는 김상조 위원장 시절이던 작년 2월, 1,000여개 대리점에 ‘부품 강매’ 갑질을 한 혐의로 현대모비스와 전현직 임원을 검찰에 고발했다. “공정 질서를 어지럽히는 기업에 강력 대응하겠다”는 김 위원장의 엄포에 이은 첫 조치였다. 하지만 검찰은 조사 뒤 무혐의 처분을 내렸다. 최근 법원도 같은 맥락의 행정소송에서 무죄를 선고했다.

죄가 없어서가 아니었다. ‘증거’가 부족했다. 현대모비스의 갑질에 당한 대리점 피해자들은 검찰에도, 법원에도 출석하지 않았다. 억울해도, 그들은 계속 현대모비스에 기대 살아야 할 생활인이었다. 겉으론 정의를 외쳐도, 때론 밉지만 떡을 주는 사람이 훨씬 소중한 법이다. 시장은 그렇게 돌아간다.

애초 사건은 다르게 해결될 수도 있었다. 현대모비스는 갑질 피해를 자진 시정하고, 100억원의 상생기금을 출연할 테니 사건을 종결해 달라고 먼저 공정위에 제안했다. 공정위는 이를 거부하고 검찰 고발을 강행했다. 세상의 ‘갑’들에게 본때를 보이고, ‘을’들의 어깨를 펴 보이겠다는 심산이었을 것이다.

김상조 위원장이나 공정위 공무원들이 진짜 을의 현실을 제대로 알았다면 다른 방법을 썼을 거란 생각이 든다. 매년 발표되는 중소기업중앙회의 실태조사에 따르면, 올해도 하도급 대금을 깎인 경험이 있는 중소기업의 60%는 어떤 대처도 하지 못했다. ‘거래 단절이 우려되어서’(89%)가 대부분 이유다. 교수로, 관료로 대개 남에게 꿀리지 않는 위치에서 세상을 지내온 이들에게 갑을 관계의 복잡미묘한 구조는 잘 눈에 들지 않은 것이다.

집권 이후 문재인 정부는 과거 10년 보수정부에서 외면했던 문제를 해결하겠다며 여러 정책을 쏟아냈다. 최저임금 인상, 노동시간 단축이 대표적이다. 공공기관 비정규직 제로화도 선언했다. 약자를 향한 ‘선의’로 치자면 나무랄 데가 없다.

하지만 선의는 철저히 외면당하고 있다. 시장은 뜻대로 되지 않는다. 을들이 을들을 해고하며 생계를 걱정한다. 중소기업과 신산업 벤처들은 아예 경쟁력을 잃을까 노심초사다. 없애겠다던 비정규직은 오히려 2년 전보다 더 늘었다. 뭔가 급하게 삼킨 것처럼, 경제 곳곳이 숨을 헐떡인다. 갑을 구조의 표면만 보았지, 현실은 깊이 고민하지 않은 결과다.

을에 대한 연민의 강도로 치면 노무현ㆍ문재인 정부가 이명박ㆍ박근혜 정부보다 훨씬 강할 것이다. 하지만 권력을 잡는 순간, 어느 정부든 갑이 된다. 이들의 손에 광범위한 행정과 정책이 달렸다. “국민이 주인”이라 말은 하지만, 정책의 대상인 국민은 집권세력에게 늘 을이다.

갑에겐 갑질이 잘 보이지 않는다. 스스로의 갑질은 물론, 주변 을들의 복잡한 사연도 좀체 눈에 띄지 않는다. ‘갑의 안경’을 쓰고 있기 때문이다. 문재인 정부가 스스로를 갑으로 여기는 증거가 공공기관 낙하산이다. 현 집권세력은 지난 10년간 보수 정부의 낙하산 인사를 통렬히 비판해 왔다. 지금 그보다 결코 적지 않은 낙하산을 전방위로 뿌리면서도 쏟아지는 비판에는 한 마디 언급조차 없다. 세상을 향해 이러쿵저러쿵 하면서도 내 허물은 외면하는 자세, ‘내로남불’은 진정한 갑질의 기초다.

문재인 정부의 후반기가 막 시작됐다. 노영민 청와대 비서실장은 10일 “전반기가 대한민국의 틀을 바꾸는 시기였다면, 후반기엔 성과로 평가 받아야 한다는 걸 잘 알고 있다”고 다짐했다. 적폐청산, 공정, 상생 등의 가치를 앞세워 을의 눈물을 닦아주겠다며 출발한 정부다. 부디 성공하길 바란다.

다만 이것만은 기억해줬으면 한다. 조금 늦더라도, 복잡하고 미묘한 시장을 을의 입장에서 세심히 살핀 뒤에 움직여 달라는 것. 당위를 앞세워 경제를 실험 대상에 내몰지 말라는 것. 2년반 뒤 다시 갑의 자리를 내놓고 싶지 않다면 말이다.

김용식 경제부장 jawohl@hankookilbo.com

web_cdn

공감은 비로그인 상태에서도 가능합니다

저작권자 © 한국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