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왕실의 취향] 망자 향한 애틋함에… ‘숭유억불’ 정책도 어찌하지 못했다

입력
2019.11.23 04:40
수정
2019.11.25 21:06
17면

※ 조선왕실이라 하면 치열한 궁중암투만 떠올리시나요. 조선의 왕과 왕비 등도 여러분처럼 각자의 취향에 따라 한 곳에 마음을 쏟았습니다. 문화재청 국립고궁박물관 학예사들이 그간 쉽게 접하지 못했던 왕실 인물들의 취미와 관심거리, 이를 둘러싼 역사적 비화를 <한국일보> 에 격주 토요일마다 소개합니다.

<6>안순왕후 등 왕실 인물들의 불서 간행

보물 제1,567호 ‘지장보살본원경’에 실린 변상도. 지장보살본원경은 정희대왕대비, 인수대비 등이 세상을 떠난 성종의 정비 공혜왕후 한씨의 명복을 빌기 위해 간행한 불서다. 국립고궁박물관 제공
보물 제1,567호 ‘지장보살본원경’에 실린 변상도. 지장보살본원경은 정희대왕대비, 인수대비 등이 세상을 떠난 성종의 정비 공혜왕후 한씨의 명복을 빌기 위해 간행한 불서다. 국립고궁박물관 제공

조선은 유교를 숭상하고 불교를 억제한다는 ‘숭유억불’을 기본 통치 이념으로 표명했다. 하지만 고려시대부터 이미 온 나라에 깊게 뿌리 내린 불교의 전통은 쉽사리 사라지지 않았다. 특히 사람의 힘으로 어찌할 수 없는 죽음의 영역에서는 불교 신앙이 절대적으로 중요했다. 조선 초기 왕실에서도 종교로서 불교를 쉽게 버리지 못했다. 불교 경전 간행은 조선 초기 왕실의 대표적인 신앙 활동이었다. 책은 일반적으로 그 책을 읽는 대상, 즉 독자를 염두에 두고 간행된다. 하지만 신앙 활동으로서 불교 경전 간행은 그 자체에 의미를 두었다. ‘법보신앙(法寶信仰)’이라고 하여 경전 간행을 신앙 행위와 동일시하는 경우가 많았다. 조선 초기 왕실에서도 복을 구하거나 죽은 이를 추모하는 등 다양한 이유로 불서를 간행하였다.

불서 간행은 국왕에서부터 왕후, 비빈, 후궁 등에 이르기까지 왕실 인물의 주도로 성행했다. 현존 불서에서 국왕, 왕후, 공주, 후궁, 대군 등의 불경 간행 주도와 시주 사실이 확인된다. 왕실에서 간행한 불서에는 보통 서문, 발문 등에 불서 간행 배경을 보여 주는 발원문이 수록된다. 특히 죽은 이를 기리기 위해 간행한 불서에는 당시 간행을 주도한 자의 정성스럽고도 지극한 마음이 담겨 있다. 1464년(세조 10) 세조가 꿈에서 선왕인 세종과 세상을 떠난 아들인 의경세자(훗날 덕종으로 추존)를 만나고 간행한 ‘금강반야바라밀경언해’, 1469년(예종 2) 세종의 둘째 딸인 정의공주가 세상을 떠난 남편의 명복을 빌며 간행한 ‘지장보살본원경’, 인수대비가 1472년(성종 3) 세상을 떠난 아들 덕종의 유모였던 박씨의 죽음을 슬퍼하며 간행한 ‘묘법연화경’, 1482년(성종 13) 성종이 28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난 외동딸 명숙공주의 명복을 빌기 위해 간행한 ‘묘법연화경’ 등이 대표적이다. 조선 초기 왕실 발원으로 간행된 불서 대부분은 이처럼 세상을 떠난 가족을 기리는 조선 왕실의 모습을 담고 있다.

세조의 어진 초본. 1935년에 기존 세조 어진을 모사하기 위한 기초 작업으로 김은호가 그린 밑그림이다. 어진 우측 하단에 김은호의 인장이 찍혀 있다. 세조는 꿈에서 선왕인 세종과 세상을 떠난 아들인 의경세자를 만나고 불서 ‘금강반야바라밀경언해’를 간행했다. 국립고궁박물관 제공
세조의 어진 초본. 1935년에 기존 세조 어진을 모사하기 위한 기초 작업으로 김은호가 그린 밑그림이다. 어진 우측 하단에 김은호의 인장이 찍혀 있다. 세조는 꿈에서 선왕인 세종과 세상을 떠난 아들인 의경세자를 만나고 불서 ‘금강반야바라밀경언해’를 간행했다. 국립고궁박물관 제공

조선 초기 왕실의 불서 간행은 왕후들 사이에서 특히 활발했다. 전통은 대를 이어 계속되었다. 세조비 정희왕후, 덕종비 인수대비, 예종의 계비 안순왕후, 성종의 계비 정현왕후가 상당 양의 불서를 간행했다고 알려져 있다. 인수대비는 무려 38종 1,000책이 넘는 불서를 간행했다고 전해진다. 왕후가 간행을 주도한 불서는 국내 박물관, 도서관 등에 소장돼 있으며 대부분 문화재적 가치가 높아 보물, 시ㆍ도문화재 등 중요문화재로 지정되어 있다.

국립고궁박물관에는 죽은 이를 기리기 위해 왕후가 주관하여 간행한 불서 세 종이 있다. 보물 제1567호 ‘지장보살본원경’이 그중 하나다. 1474년(성종 5) 4월 19세에 세상을 떠난 성종의 정비 공혜왕후 한씨의 명복을 빌기 위한 불서다. 한씨가 세상을 떠난 다음 달인 5월에 정희대왕대비, 인수대비 등이 주도해 간행했다. 왕실 재정을 관리하던 내수사에서 자금을 내고, 왕실에서 책을 간행할 때 참여했던 이름난 각수들이 동원되어 간행한 불서라고 전해진다.

서울특별시 유형문화재 제374호 ‘육조대사법보단경’도 보관돼 있는데, 1494년(성종 25) 성종이 승하하자 그 다음해에 성종의 계비인 정현대비와 인수대왕대비가 성종의 명복을 빌기 위해 간행했다. 정현왕후와 인수대비가 직접 주도해 한자ㆍ한글 목활자를 만들어 펴낸, 다량의 불서 중 1 종이라는 점에서 가치를 인정받고 있다.

보물 제 1,567호 지장보살본원경. 국립고궁박물관 제공
보물 제 1,567호 지장보살본원경. 국립고궁박물관 제공

‘육경합부’는 ‘지장보살본원경’ ‘육조대사법보단경’과 비슷한 시기에, 비슷한 목적으로 간행되었는데 외부에 가치가 알려지지 않은 불서다. 1474년(성종 5) 세상을 떠난 청천부원군 한백륜(1427∼1474)의 명복을 빌기 위해 그의 딸이자 예종비인 안순왕후 주도로 간행된 서적이다. ‘육경합부’는 ‘금강반야바라밀경’ 등 여섯 가지 경전을 모아 간행한 것이다. ‘육경합부’는 1472년(성종 3) 인수대비가 세조, 덕종, 예종, 인성대군 등의 명복을 빌기 위해서 간행한 본이 널리 알려져 있다. 인수대비가 간행한 ‘육경합부’는 1440년(세종 22) 화악산(華岳山)의 영제암(永濟菴)이라는 곳에서 목판으로 찍어낸 경전에 조선 전기 문신 김수온이 당시 간행 배경을 글로 써서 금속활자인 갑인자(甲寅字)의 작은 자로 찍어내 간행했다. 안순왕후가 주관한 ‘육경합부’은 영제암에서 목판으로 인쇄한 경전에 김수온이 쓴 발문을 갑인자의 큰 자로 찍어서 냈다..

‘육경합부’ 중 김수온 발문. 책장을 넘길 때 손상되지 않도록 종이를 꼬아서 끈을 만들어 책의 하단부 모서리에 달아놓았다. 국립고궁박물관 제공
‘육경합부’ 중 김수온 발문. 책장을 넘길 때 손상되지 않도록 종이를 꼬아서 끈을 만들어 책의 하단부 모서리에 달아놓았다. 국립고궁박물관 제공

김수온이 쓴 발문은 해당 불서를 간행한 배경을 상세히 담고 있다. 해석하여 옮겨 보면 다음과 같다.

“성화 10년(1474년) 여름 5월 초 3일 청천부원군 한공(한백륜)이 세상을 떠나서, 우리 왕대비 전하께서 애도함이 끝이 없었다. 무릇 염빈(斂殯ㆍ시체를 염습하여 관에 넣고 안치함) 및 상제와 관련한 일은 반드시 정성스럽고, 반드시 신실하게 하여 후회하는 바가 없어야 하니 유명을 천도하는 방법은 불씨에 의지하는 일만한 것이 없다고 거듭 들으셨다.

부처는, ‘경전을 진실로 능히 서사하고 인출하면 그 뛰어난 공덕은 부처를 섬기는 것과 다름이 없다’라고 하셨다. 이에 명하기를 중궁의 내탕에서 돈을 내어 비용을 삼아 미타팔대보살 1탱(幀)을 그리고, 묘법연화경 7건, 지장보살본원경 7건, 참경(懺經) 7건, 육경합부 7건을 인출하도록 하였다. 그리고 장황과 장식을 매우 엄격하고도 아름답게 하여 승려와 속인(緇素)들에게 반포하여 부원군의 명복을 비는 바탕으로 삼고자 하셨다. 신이 생각건대, 부모가 자식을 사랑함과 자식이 부모에게 효도함은 하늘의 이치이고 땅의 의리이며 상하에 통달하는 도이다.

우리 왕대비전하께서는 부모께서 길러주신 은혜를 생각하고 생사가 영원히 멀어지는 이치를 슬퍼함에 있어 그 정성이 이르지 않음이 없으셨고, 염려함이 두루 미치지 않음이 없으셨다. 그리하여 대법보(大法寶)를 이루어 인간과 천상의 중생들에게 널리 안목이 되게 하셨으니, 그 공덕의 큼이 위로는 반드시 부원군의 영에 미치어 극락을 초월하고 열반의 경지가 되며, 아래로는 반드시 끝없는 법계에 미칠 수 있게 하셨다. 지극하구나, 그 공덕의 큼이여! 김수온이 삼가 발문을 쓰다.”

발문의 내용을 살펴보면, 안순왕후의 아버지인 청천부원군 한백륜이 세상을 뜨자 왕후가 아버지의 명복을 비는 가장 큰 일이 부처에 의지하는 것임을 듣고, 미타팔대보살 1탱(幀)을 그리고, 묘법연화경 7건, 지장보살본원경 7건, 참경(懺經) 7건, 육경합부 7건을 인출하게 하여 널리 전하여 아버지가 열반에 이를 수 있도록 기원했음을 알 수 있다. 이 불서는 당시 간행한 7건의 ‘육경합부’ 중 1건이다. 이 불서에는 책 한 장 한 장을 넘길 때 손상되지 않도록 종이를 꼬아 만든 끈이 책 하단부 모서리에 달려 있다. 간행 당시에 부착했는지는 알 수 없다.

550년 전 단 7건만 간행된 불서 중 한 건을 이렇게 2019년 국립고궁박물관에서 직접 볼 수 있으니 감회가 남다르다. 불서를 간행해서라도 아버지의 명복을 기리고자 한 왕후의 마음은 어떠했을까. 발문을 보고 있자니 그 절절한 마음이 느껴진다.

이상백 국립고궁박물관 학예연구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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