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 한국일보문학상] 이토록 망한 사랑의 역사… 이를 관통하는 감정

입력
2019.11.12 04:40
수정
2019.11.12 13:53
20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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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반백 년 넘게 한국문학계 기둥 역할을 해온 한국일보문학상이 52번째 주인공 찾기에 나섭니다. 예심을 거쳐 본심에 오른 작품은 10편. 심사위원들이 매주 화요일과 목요일 본심에 오른 작품을 2편씩 소개합니다(작가 이름 가나다순). 수상작은 본심을 거쳐 이달 하순 발표합니다.  

 <4> 박상영 ‘대도시의 사랑법’

박상영 '대도시의 사랑법'.
박상영 '대도시의 사랑법'.

무엇이든 다 될 수 있었지만 아무것도 되지 못한 어느 섬세하고 무기력한 청년의 망한 사랑 이야기. 그리고 소설에 대한 성찰. 19세기 중반 젊은이들의 정신적 초상화라 불리는 ‘감정교육’은 2월 혁명이라는 역사적 대의와 거리 둔 채 보답 없는 연정에만 몰두하는 프레데릭의 27년 생애를 다루는 소설이다. 불안한 청춘과 그들이 속한 사회가 서로를 교환하지 않은 채 이질적으로 공존하는 이 작품은 대부분의 명작이 그러하듯 역사를 다루지만 역사소설이 아니고 연애를 다루지만 연애소설이 아니다. 박상영 작가의 연작소설 ‘대도시의 사랑법’에는 플로베르의 ‘감정교육’을 떠올리게 하는 고전적 현재성이 있다.

삼십 대 게이 남성의 형용할 수 없는 우정과 답 없는 사랑을 다루는 네 편의 중단편으로 구성된 이 작품집은 퀴어를 다루지만 퀴어소설이 아니고 연애를 다루지만 연애소설이 아니다. 이성애자 여성과 동성애자 남성의 애틋하고 쿨한 동거를 중심으로 둘만 아는 한 ‘완벽한’ 관계를 그리는 ‘재희’, 스스로를 기만하며 사랑이란 감정을 외면하는 운동권 출신 남성과의 연애담과 엄마를 간병하는 이야기가 교차하는 ‘우럭 한 점 우주의 맛’, 기만도 위선도 없는 사이지만 육체적 사랑이 결여된 규호와의 관계를 다룬 ‘대도시의 사랑법’, 규호와의 이별 이후를 그린 ‘늦은 우기의 바캉스’까지, 박상영의 소설이 퀴어나 연애 같은 강력하고 대중적인 소재로 이목을 집중시키는 건 얼마간 사실일 것이다. 그러나 소재를 소재에 그치게 않게 만드는 복합적인 감정과 감정을 둘러싼 다층적 진실이 없다면 집중된 시선은 오래 머물지 못했을 것이다. 박상영에게는 머물게 하는 힘이 있다.

유머와 자조다. 실연 후 농약을 마시고 자살을 시도한 주인공이 중환자실에서 깨어나자 아들을 바라보던 엄마는 이렇게 말한다. “너무 애쓰지 마. 어차피 인간은 다 죽어.” ‘이생망’ ‘N포세대’가 내면화한 자조는 ‘어차피’라는 부사에 친근감을 느낀다. 어차피 안 될 거라는 자조와 그 자조를 희화화하며 잠깐을 견디는 삶의 태도는 순간만 있을 뿐 영속을 약속하지 않는 대도시의 사랑법이자 대도시의 생존법이기 때문이다. 내리는 눈이 바닥에 닿지도 못한 채 허공에서 녹아 버릴 걸 아는 사람은 한 송이 눈에서 찰나를 본다. 소설 속에 등장하는 글쓰기는 형용하거나 규정되지 않기에 쉽게 녹아 버리는 찰나의 감정을 규명하는 행위다. 이토록 망한 사랑의 역사를 관통하는 글쓰기는 편편의 작품에 등장해 규정할 수 없는 퀴어한 관계를 “순도 백 퍼센트의 진짜 감정”으로 입증한다. 서울의 밤, 네온사인과 함께 명멸하는 이들의 흩날리는 마음을 두고 나, 그리고 내 곁을 지나는 젊은이들의 정신적 초상이 아니라고 말할 수는 없다.

박혜진 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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