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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82년생 김지영'. 롯데엔터테인먼트 제공

1990년대 말 PC통신 전성시대 사이버 공간은 민주주의의 이상향처럼 여겨졌다. 이후 인터넷이 활성화하면서 이곳에서 이뤄진 활발한 토론 결과는 진보 담론의 한 축으로 자리하기도 했다. 딴지일보, 안티조선, 사이버 논객으로 대표됐던 2004년 노무현 전 대통령 탄핵 국면을 지나 2008년 광우병 촛불집회까지 한국 사이버 공론장은 진보의 일방적 우세였다.

2008년을 기점으로 흐름이 바뀌고 폐해가 드러났다. 2010년 천안함ㆍ연평도 사태, 2012년 대선을 거치며 ‘일간베스트저장소(일베)’로 대표되는 반동이 고개를 쳐들었다. 금융위기 관련 글을 올렸다 ‘전기통신기본법 47조 1항’ 허위사실유포죄로 구속됐던 논객 미네르바 사건을 계기로 전기통신기본법 관련 조항이 위헌 판결을 받자 일베 이용자 역시 온라인 상 ‘표현의 자유’ 수혜를 입었다. 그리곤 호남, 좌파, 그리고 여성을 향해 혐오 표현 공격을 일삼기 시작했다. (김학준, ‘인터넷 커뮤니티 일베저장소에 나타나는 혐오와 열광의 감정동학’)

이제 일베는 극단적 사고를 지닌 소수 일탈 세력이 아니다. 평범한 우리 주변 포털 사이트 이용자로 그 생각들이 퍼져나갔다. 극우ㆍ보수의 상징이자 주류가 돼 혐오 문화를 확산시켰다.

최대 피해자 중 하나는 여성이었다. 10대는 ‘빠순이’, 20대는 ‘된장녀’ ‘김치년’, 30대 안팎의 미혼이면 ‘메갈’, 결혼을 했다면 ‘맘충’ 식으로 혐오 조장 세력의 먹잇감이 됐다. ‘82년생 김지영’ 소설을 읽고 공감을 표시한 여성 연예인이 댓글로 공격받고, 여성을 앞세운 영화 리뷰에는 혐오와 조롱의 글이 한없이 달리는 게 현실이었다. 성소수자, 난민도 공격에 시달렸다.

지난 시간 이런 혐오ㆍ차별이 힘을 키우는 과정에선 포털의 잘못이 컸다. 네이버와 다음 역시 ‘언론’이라는 평가가 일반화했는데도 이들은 언론의 영향력이라는 권한은 누리되 책임은 회피하기 일쑤였다. 언론사의 공짜ㆍ헐값뉴스를 마음껏 활용했고, 연예ㆍ온라인 찌라시 매체를 양산시켰다. 클릭 수 확대로 수익을 극대화하기 위해 댓글 기능을 활용하는 데만 정성을 쏟는 사이 여성 등 사회적 약자를 향한 근거 없는 반감은 확산됐다. ‘82년생 맘충’이란 댓글이 난무하게 만든 주범인 셈이다.

지난달 말 연예인 설리의 비극을 기점으로 뒤늦게 포털이 조치에 나섰다. 다음 카카오는 이 사건 이후 연예뉴스 댓글을 폐지하기로 했다. 내년 상반기에는 다음 모바일 사이트에서 뉴스 자체를 빼는 등 포털의 언론 기능 약화 쪽으로 방향도 잡았다고 한다. 앞서 네이버는 지난해 10월 모바일 첫 화면에서 뉴스를 빼면서 생색내기용으로 뉴스 댓글 관리 권한도 넘겼다. “이제 포털은 언론이 아니니 책임은 지지 않겠다”는 선언과도 같았다. 양대 포털이 온라인 뉴스 공간에서 꿀은 꿀대로 다 빨아먹다 씨앗 하나 남겨두지 않은 채 버리려는 느낌이 크다.

기성 언론사 입장에선 포털 의존도를 줄이며 독자 생존 해법을 찾아야 한다는 각오를 다지게 된다. 설리 사건의 교훈을 되새기며 다시는 비슷한 실수를 반복하지 않겠다는 다짐도 해본다. 동시에 ‘차별금지법’, ‘혐오표현금지법’ 제정도 절실하다. 글 한 줄, 말 한 마디가 갖는 힘과 영향력을 우리 모두 되새기는 일부터 시작해 성별, 장애, 성적취향, 다문화가정 등 구체적인 단위로 들어가 혐오와 차별 조장을 차단해야 한다. 포털의 경우, 언론 기능을 완전히 접는 순간까지라도 특정 세력의 댓글 분위기 장악과 조작은 막고, 차별적이고 선동적인 댓글은 견제하는 운영이 중요해졌다.

앞날은? 비관적이다. 지금 이 순간도 ‘성적은 뛰어났지만 여성이라는 이유로 채용에서 탈락했다’는 포털 기사에는 “능력이 딸리는데 여성은 왜 뽑아” 같은 혐오성 댓글이 달리는 게 현실이니까. 도대체 지난 십수 년 포털이란 언론은, 우리 사회는 무슨 일을 해왔던 걸까.

정상원 디지털콘텐츠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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