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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독 경제력, 29년간 서독의 43%→75% 성장했지만 실업률 2배
사회지도층 진출 1.7%뿐, 주민 57% “2등 시민”... 극우세력 키워
독일 베를린 베르나우어 거리에 조성된 '베를린 장벽 메모리얼' 공원 옆으로 한 시민이 걸어가고 있다. 왼쪽의 보존된 콘크리트 벽 옆으로 장벽과 같은 높이의 3.6m 검붉은 철제 기둥들이 세워져있다. 베를린=최나실 기자

독일을 동서로 가르던 장벽의 자리는 완연한 일상의 공간이 됐다. 베를린 장벽 붕괴(1989년 11월 9일) 30주년을 이틀 앞둔 7일(현지시간) 아침 독일 베를린 베르나우어 거리는 친구들과 킥보드를 타고 달리며 등교하는 초등학생들, 잔디밭에서 뛰노는 반려견의 옆에서 담소를 나누는 시민들로 채워졌다. 무너진 콘크리트 벽 대신엔 딱 그만한 높이의 3.6m 검붉은 철제 기둥들이 성인도 넉넉히 오갈 틈을 두고 꽂혔다. 한 세대 전과 다르게 이동의 자유를 막을 것은 없었다.

1989년 11월 9일, 베를린 장벽은 ‘얼떨결에’ 열렸다. 동독 사회주의통일당 정치국 대변인이던 귄터 샤보보스키의 말실수가 결정적이었다. 이날 저녁 기자회견에서 ‘여행 자유화’ 조치 발표에 나섰던 그는 ‘언제부터 발효되느냐’는 한 기자의 질문에 당황해 “지금 당장”이라 답했다. 이를 완전한 국경 개방으로 오인한 동베를린 주민들은 곧장 장벽으로 향했다. 그리고 불과 11개월 후 1990년 10월 3일 독일은 통일됐다. 동독 정부가 1989년 9월쯤부터 본격화된 대규모 반체제 시위를 진정시키기 위해 내놓았던 출국 규제 완화가 우연과 맞물리면서 분단과 냉전의 해체라는 역사로 다시 쓰인 순간이었다.

7일 오후 독일 분단 시절 베를린에서 가장 유명한 검문소였던 체크포인트 찰리에서 관광객들이 기념사진을 찍기 위해 줄을 서서 차례를 기다리고 있다. 베를린=최나실 기자

분단의 아픔을 씻어낸 베를린의 다른 명소들에도 해가 떨어진 늦은 오후까지 전 세계인들의 발걸음은 이어졌다. 1.3㎞에 달하는 ‘이스트사이드 갤러리’에는 장벽에 그려진 벽화의 의미에 대한 가이드의 해설을 들으려는 관광객들이 옹기종기 모여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분단 시절 가장 유명한 검문소였던 ‘체크포인트 찰리’는 기념사진을 위한 ‘셀카 포인트’로 거듭났다. 베를린 시내 곳곳은 되찾은 자유와 평화에 대한 축하와 경탄으로 물들고 있었다.

그러나 정작 장벽 붕괴 30주년, 통일(1990년 10월 3일) 29주년을 맞이한 독일의 속 사정은 복잡하다. 통일 이후 동서독의 정치ㆍ경제적 틈은 많이 좁혔지만, 심리적 장벽은 허물어지지 않았다는 경고음이 울려서다. 올해 9월 독일 정부가 발표한 연례 보고서에 따르면 동독 지역 주민 57%는 스스로를 ‘2등 시민’으로 생각한다고 답했다. 특히 이들의 소외감과 상대적 박탈감은 난민이 대거 유입되기 시작한 2015년을 기점으로 동독에서의 극우 세력이 급격하게 성장할 수 있었던 배경으로 거론되며 ‘사회 통합’의 과제를 던지고 있다.

베를린 장벽이 가로막고 있던 동독과 서독의 국경이 열린 다음달인 1989년 11월 10일 동서 베를린 시민들이 브란덴부르크문 앞의 장벽 위에 함께 올라가 기뻐하고 있다. 베를린=AP 연합뉴스 자료사진

경제 지표를 보면 동독에도 그동안 많은 발전이 있었다. 통일 당시인 1990년 서독의 43%에 불과했던 동독 경제력은 지난해 기준 75%까지 성장했다. 주관적인 삶의 만족도도 높아졌다. 미국 퓨리서치센터는 10년마다 동ㆍ서독 지역 주민들에게 자신의 삶을 10점 척도로 평가하도록 했다. 통일 1년 뒤인 1991년만 해도 자신의 삶에 7점 이상을 매긴 동독 주민은 15%뿐이었지만, 올해는 그 수치가 59%였다. 같은 기간 서독 주민은 52%에서 64%로 증가했다. 분명 격차는 줄고 있다.

그러나 실재하는 격차에 비해, 개선은 더디다. 지난 8월 기준 독일 전역의 실업률은 3.1%지만, 옛 동독 지역은 6.0%로 두 배였다. 서독에 자본이 집중된 불균등한 구조도 지적받고 있다. 단적인 예로 독일 닥스(DAX)지수를 구성하는 상위 30개 기업 중 동독에 본사를 둔 곳은 한 곳도 없다. 눈을 넓혀 봐도 결과는 비슷하다. 독일 싱크탱크인 할레경제연구소에 따르면 올해 3월 기준 독일 500대 기업 중 464곳(93%)은 서독에 본사를 뒀다.

1989년 시작된 '동독 월요 시위'의 핵심 활동가 중 한 명이었던 기젤라 칼렌바흐(75) 전 유럽의회 의원이 7일 시위의 발원지였던 라이프치히의 한 카페에서 기자의 질문에 대답하고 있다. 동독 월요 시위는 그해 11월 9일 베를린 장벽 붕괴에 결정적인 원동력이 된 것으로 평가받는다. 라이프치히=최나실 기자

사실 통일 전 동독 주민들이 기대한 ‘번영의 땅’의 장밋빛 꿈은 진작부터 깨지기 시작했다. 동독 라이프치히 출신 기젤라 칼렌바흐 전 유럽의회 의원은 이렇게 설명한다. “우리(동독인)는 서독 삶에 대한 환상이 있었다. 예를 들자면 동독에서는 구매할 수 있는 차가 2종류뿐이었고, 그마저도 15년을 기다려야 했다. 반면 (미디어에 비친) 서독인은 모두 벤츠, 폴크스바겐 같은 고급 차를 가진 것 같았다.” 참고로 동ㆍ서독은 분단 시기에도 지금의 남북한과 달리 편지와 소포, 전화를 주고받고, 심지어 서로의 텔레비전을 보는 것도 가능했다.

허나 막상 통일을 해보니 달랐다. 자본주의 현실은 냉혹했고, 1990년 동ㆍ서독 화폐의 1대 1 통합 등 경제통합의 상흔 역시 컸다. 통일 직후 동독 제조업체의 40%가 문을 닫았고, 수많은 실업자가 양산됐다. 경제 동력이 사그라들자, 사람들도 동독을 떠났다. “교육 수준이 높은 젊은 여성이 먼저, 젊은 남성이 뒤이어 떠났다. 남은 건 노인들이었다” 칼렌바흐 의원의 말이다. 서독 수준의 삶을 기대했던 만큼 동독의 공동화(空洞化)에 실망감도 커졌다. 올해 정부 보고서에서 동독 주민 중 ‘통일은 성공적’이라고 응답한 이가 38%뿐인 점도 이때의 후유증과 무관치 않다.

동독 출신의 사회적 상층부 진출이 상대적으로 미약한 것도 동독인들의 소외감을 키우는 요인으로 분석된다. 독일 라이프치히대가 2016년 내놓은 연구 보고서 ‘누가 동독을 지배하는가’에 따르면 동독인은 독일 전체 인구의 17%를 차지하지만, 사회 지도층에 진출한 이들은 그 10분의 1인 1.7%에 불과했다. 예컨대 동독 출신은 연방법원 판사 335명 중 13명뿐이었고, 대학총장은 단 한 명도 없었다. 동독 예나대에서 10년 가까이 공부한 이동기 강릉 원주대 교수는 이 같은 현상은 “공적 토론과 논의에서 동독 주민들의 삶의 문제나 고통을 대변할 수 있는 정치ㆍ사회적 발언이 사라지는 결과를 낳는다”라면서 ‘이중 소외’라는 표현을 사용했다.

베를린자유대학 한국학과장 겸 한국학연구소장인 이은정 교수가 지난 6일 베를린자유대학 내 한국학연구소에서 진행된 한국일보와의 인터뷰에서 기자의 질문에 대한 설명을 하고 있다. 베를린=최나실 기자

물론 여러 독일 통일 전문가들은 오늘날 독일 사회의 문제를 ‘통일’이란 하나의 사건으로 귀결시키는 것은 아닌지 돌이켜봐야 한다고도 지적한다. 이은정 베를린자유대 한국학과장은 “지역 격차는 존재할 수밖에 없다. 통일이 이미 30년인데 이제는 (통일 후유증 보다는) 지역균형 발전의 문제는 아니었나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고 말한다. 실제로 같은 동독이라도 라이프치히, 드레스덴 등 대도시는 인구가 늘고 있다. 한스자이델 재단의 베른하르트 젤리거 박사 역시 “(실업 등 문제는) 세계화 같은 여러 요인도 함께 고려해야 한다”고 짚었다.

다만 엄밀한 현상 진단의 필요와는 별개로, 이미 극우 ‘독일을 위한 대안’(AfD) 포퓰리즘 세력은 동독 주민의 불만과 박탈감을 연료 삼아 세를 불리는 데 성공하고 있다는 점이 문제다. 올해 브란덴부르크ㆍ튀링겐ㆍ작센 등 동독 지역 3개 주의 지방선거에서 AfD는 모두 2당에 올랐다. 이동기 교수는 “2당이 되면 과거사 청산 조직 등에 당의 권한에 따라 대표자를 파견할 수 있게 된다”면서 “다시 말해 독일이 지금껏 만들어 온 (인권과 역사적) 기치에 균열이 생기고 심각한 도전을 맞을 수 있다”고 내다봤다. 독일통일 29주년이던 지난달 3일 앙겔라 메르켈 독일 총리가 내놓은 “통일은 완전한 상태가 아니라 여전히 현재 진행 중”이라는 진단이 무겁게 들리는 이유다.

베를린=최나실 기자 verite@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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