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이터로 본 한국인] 지난 30년간 한국인 삶의 질은 개선됐을까

입력
2019.11.08 18:00
수정
2019.11.21 16:04
20면

[편집자 주]

9일부터 격주로 포항공과대학교(포스텍) 융합문명연구원과 공동 기획으로 ‘데이터로 본 한국인’을 연재한다. 사회 각 분야에서 활약하는 데이터 전문가들 모임인 포스텍 융합문명연구원 산하 데이터사이언스포럼 구성원들이 한국인의 삶과 한국사회의 과거 현재 미래를 다양한 데이터에 기반해 실증적으로 조망하고, 데이터 활용을 통한 삶의 질 개선 사례 등도 소개할 계획이다.

대한민국만큼 나라를 뒤흔드는 이슈가 빈번하게 돌출하는 나라가 또 있을까. 한편 낮은 출산율과 급속한 고령화, 높은 자살률, 경제침체 장기화, 양극화 심화, 멀게만 느껴지는 사회통합 등 고질적인 문제들은 해결의 실마리조차 찾기 쉽지 않다. 격변하는 듯하지만, 한편으로는 정체된 한국 사회에서 구성원들은 어떤 생각을 하고 과연 얼마나 만족하고 있나. 어떻게 내일을 준비하며, 오늘의 삶을 꾸려가고 있는가.

‘삶의 질(Quality of life, QOL)’ 지표는 국민의 삶을 종합적으로 파악하기 위해 고안됐다. 삶을 가치있게 만드는 요소들에 기반해 객관적인 생활 조건과 이에 대한 시민들의 주관적 인지 및 평가를 측정한다. 우리나라는 통계청이 삶의 질 지표를 생산해 정책을 만드는 기본 자료로 활용하고 있다. 유엔,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유럽연합(EU) 등에서도 QOL 지표를 국가별 현황 파악과 비교 분석에 이용한다. ‘데이터로 본 한국인’ 연재는 QOL 지표 관련 데이터 분석을 통해 한국인이 스스로 생각하는 ‘삶의 질’이 어떻게 변화해 왔는지 파악하는 것으로부터 시작하는 게 좋겠다.

◇삶의 질 키워드, 30년 만에 ‘일자리’로 회귀

한국 사회에서 삶의 질에 대한 관심이 어떻게 변화해 왔는지를 살펴보기 위해 우선 지난 30년간 기사에 등장하는 관련 내용을 살펴보았다. 1990년부터 현재까지 총 5,835만 건의 기사를 대상으로 삶의 질에 대한 연관어를 시기별로 비교했다.

1990년대에는 삶의 질에 대한 사회적 논의가 일의 영역에서 주로 나타났다. ‘경쟁력‘을 기반으로 ‘경제성장’을 통해 안정된 생활을 영위하는 것에 가장 큰 관심을 쏟았다. ‘정책과제’ ‘선진국’이라는 단어가 자주 등장하는 것을 볼 때, 삶의 질 개선을 위한 다각적이고 구체적 관심보다는 경제성장에 성공하면 삶의 질이 높아질 것이란 막연한 기대를 하고 있었다고 해석할 수 있다.

IMF 외환위기를 극복한 2000년대에 들어서는 삶의 질에 대한 관심이 본격화되었다. ‘시민’과 ‘주민’이 두드러진 연관어로 나타나, 사람이 정책의 수동적 대상이 아니라 삶의 질을 높이려는 능동적 주체로 등장하게 된다. ‘지역사회’와 건강 관련 연관어나 ‘고령화’ ‘노인들’의 단어가 늘어난 것은 삶의 질을 구성하는 요인이 구체화하고 확장되는 양상으로 볼 수 있다.

최근 들어 삶의 질과 관련한 관심은 ‘일자리’에 집중된다. 일상 영역에서 객관적 조건이 개선되고 사회가 성숙해지면 삶의 영역에서 비물질적 가치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는 것이 보편적이다. 하지만 우리 사회에서는 시간 경과에 따라 오히려 물질적 요건의 기반이라 할 수 있는 ‘일자리’가 삶의 질과 관련해 압도적인 중요 요소로 떠오르고 있다. 부족한 일자리가 절박한 문제라는 점도 있지만, 근원적으로는 과연 지난 30년간 삶의 질이 개선되었는지에 대해 좀 더 심층적인 파악이 필요해 보인다.

그래서 기사 내용 분석에 착수했다. 삶의 질을 직접 측정하기 쉽지 않아, 삶의 질을 저해하는 요소들이 기사에서 어떻게 변화하는지 분석했다. 생활 영역에서 나타나는 불만이나 불편, 부족 등의 단어가 삶의 질과 함께 언급된 기사를 추출했다. 먼저 생활불만 관련 기사 수를 파악해보니 전반적으로 꾸준히 증가하다가 2011년을 기점으로 줄어드는 양상이 보였다. 또 전체 기사량과 비율을 따져보니 생활불만 관련 기사들이 양적으로는 늘고 있었지만 비율로 보면 줄어드는 양상이 눈에 띈다. 즉 관련 기사량은 늘었지만 전체 사회 담론 중 삶의 불만 비중은 낮아졌다. 간접적으로나마 삶의 질은 조금씩 개선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삶의 질 지표, OECD 40개국 중 30위로 하위권

좀 더 객관적인 차원에서 우리 사회의 삶의 질을 살펴보기 위해 OECD에서 제공하는 ‘더 나은 삶 지표’(Better Life Index, BLI)를 활용했다. BLI는 11개 영역(주거, 소득, 직업, 공동체, 교육, 환경, 시민참여, 건강, 삶의 만족, 안전, 일과 삶의 균형)에 대한 24개의 지표로 구성되며, 영역별 점수의 국가별 분포를 통해 각국의 삶의 질 수준을 가늠한다. 우리나라는 조사대상 40개국 중 2017년 29위에서 올해는 30위를 기록하여 큰 변화는 없었다. 더 세부적인 내용을 살펴보기 위해 영역별 충분도를 나타내는 지표 값과 함께 상대적 비교를 위한 국가 순위도 파악했다.

시민참여는 전체 순위에서도 2위에 기록되는 등 전체 영역 중 두드러진 우위를 보여준다. ‘촛불혁명’으로 대표되는 시민의 적극적 정치 의견 표출의 영향이라 판단된다. 주거와 교육 직업 영역은 비교적 좋은 상황이지만, 건강과 일ㆍ노동 균형, 환경 영역은 아주 열악하다. 안전의 경우, 사회적 기준에는 도달했지만 다른 OECD 회원국과 비교해서는 높은 수준이 아니었다. 또 현 정부는 주52시간 근무제를 도입했지만, 아직 갈 길이 멀다는 것을 보여준다. 특히 실질 소득 감소와 함께 미세먼지로 인한 환경 영역의 불안은 우리나라의 BLI지표 순위를 끌어내리는 고질적 문제로 자리 잡고 있다.

◇민생, 대책보다 파악이 우선이다

삶의 질을 구성하는 요소는 경제가 발전할수록 자꾸 늘어난다. 그래서 경제발전 속도와 삶의 질 발전 속도가 일치하기 어려워질 수밖에 없다. 국민의 삶의 질 향상이 최우선 목표여야 하는 정부가 그 목표를 달성하기도 점점 까다로워질 것이다. 그래서 국민의 삶, 즉 민생의 실체를 정확히 파악하는 것은 시급하고 중요하다. 삶의 질 키워드 분석 결과에서 드러났듯이 우리 국민들이 요구하는 삶의 질의 키워드가 20년 전이나 지금이나 자존감을 지킬 최저조건인 경제적 안정에 머물러 있다는 점에서 정부는 책임을 피할 수 없다. 내년 총선을 앞두고 복잡하게 얽혀 삶의 질 향상을 가로막는 여러 문제들을 당장 해결해 줄 수 있다는 과장된 약속이 쏟아져 나올 것이다. 올바른 정치인이라면 당장은 불만족스럽더라도 문제 해결을 향한 올바른 방향을 제시해 유권자를 설득해야 할 것이고, 유권자는 그런 정직하고 추진력 갖춘 정치인을 선택할 안목을 갖춰야 제자리를 맴돌고 있는 ‘삶의 질’이 앞으로 나아갈 수 있다.

배 영(포스텍 인문사회학부 교수)

한국일보-포스텍 융합문명연구원 공동기획

※ 뉴스 기사 데이터는 한국언론진흥재단의 빅카인즈서비스를 활용하여 1990년 1월 ~ 2019년 10월을 대상으로 방송보도 및 신문 기사에서 추출하였음(총 기사수 58,352,009건). BLI지표는 해당 홈페이지(oecdbetterlifeindex.org)에서 추출 후, 재가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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