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일 지구종말이라면… 사과심기 대신 무엇을 하렵니까?

입력
2019.11.08 04:40
23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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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말’은 인류가 해온 가장 오래되고도 빈번한 상상이다. 각종 영화와 소설을 통해 시뮬레이션을 해온 종말의 이미지는 우리에게도 친숙하다. 게티이미지뱅크
‘종말’은 인류가 해온 가장 오래되고도 빈번한 상상이다. 각종 영화와 소설을 통해 시뮬레이션을 해온 종말의 이미지는 우리에게도 친숙하다. 게티이미지뱅크

“내일 지구가 멸망하더라도 나는 오늘 한 그루의 사과나무를 심겠다”는 말이 있다. 지구가 멸망한다는데 지금 사과나무를 심는 게 무슨 소용이야 싶다가도, 그렇다면 정작 지구 멸망을 앞두고 무슨 일을 해야 가장 값질지 딱히 마땅한 생각은 나지 않는다. 아니, 당장 멸망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종말에 가까운 날이 다가와 세계가 혼란에 빠지고 모든 질서가 사라진다면 어떤 선택을 해야 할 것인가. 언젠가 도래할지도 모르는 기적을 바라며 악착같이 살아남을 것인가, 아니면 죽음을 받아들일 것인가.

‘종말’은 인류가 해온 가장 오래되고도 빈번한 상상이다. 각종 영화, 소설을 통해 종말에 대한 시뮬레이션을 해왔다. 운석 충돌로, 해수면 상승으로, 핵폭발로, 전염병으로, 좀비의 창궐로, 외계인의 침공으로, 지구 종말 시나리오는 셀 수 없이 다양하다. 최근 요다 출판사에서 출간된 두 권의 책 ‘인더백’과 ‘모두가 사라질 때’는 이토록 유구한 전통을 가진 ‘지구 종말’ 시나리오를 새로운 감수성과 참신한 상상력으로, 무엇보다 ‘한국적으로’ 풀어낸 소설이다.

 ◇배낭에 아이를 실은 남자 

차무진 작가의 ‘인더백’은 지구 종말 상황에서 어린 아들을 배낭에 싣고 안전지대로 향하는 젊은 아버지의 40일 여정을 그린 이야기다. 백두산이 폭발하고 식인 바이러스가 퍼진 한반도, 주인공 동민은 아내와 여섯 살 난 아이를 데리고 서울을 탈출하려다가 폭발 사고로 아내를 잃고 만다. 홀로 125리터 배낭에 아이를 싣고 청정지대로 향하지만 호시탐탐 이들을 노리는 식인자들, 감염자 색출이라는 명분으로 민간인을 집단학살하는 정부군 등 각종 장애물이 앞길을 가로막는다. 아이는 배낭 속에서 시체처럼 굳어가고, 끊임없는 위협과 위험 속에서 동민은 지쳐가지만 ‘둘 중 하나는 꼭 살아남아서 아이를 살리겠다’는 아내의 유언을 지키기 위해 꿋꿋이 앞으로 나아간다. 치밀한 전개, 박진감 넘치는 묘사가 ‘포스트 아포칼립스’(인류 멸망 이후의 모습을 다룬 예술 장르)의 그림과 절절한 부성애를 한데 엮어냈다.

재앙이 닥친 한반도, 동민은 배낭에 아이를 담고 안전지대인 대구로 향한다. 요다 제공
재앙이 닥친 한반도, 동민은 배낭에 아이를 담고 안전지대인 대구로 향한다. 요다 제공

차무진 작가는 2010년 미스터리 장편 ‘김유신의 머리일까?’로 데뷔했다. 이후 삼국유사, 이순신 등 미스터리와 한국적 색채, 정밀한 역사성을 결합한 작품을 선보여왔다. 게임회사 수석 개발자로 오래 일했지만 ‘러시아 여성의 몸에 일본식 갑옷을 입은 정체불명의 북유럽 요정’이 우리 문화의 현실임에 울분이 터져 진짜 ‘우리’ 이야기를 해보기로 맘먹었다. ‘인더백’ 역시 익숙한 디스토피아 설정이지만, ‘빨갱이’와 ‘우리 편’을 가르는 이데올로기, 참혹한 민간인 학살과 권력 집단의 부패 등의 설정을 통해 철저히 ‘한국적인’ 재앙을 만들어낸다.

 ◇1년 뒤면 지구 종말인데… 

‘모두가 사라질 때’는 정명섭, 조영주, 김동식 등 한국 장르문학을 대표하는 다섯 명의 작가가 써낸 지구 종말 단편소설집이다.

표제작인 ‘모두가 사라질 때’는 가족들이 살해당했는데도 어차피 종말이 닥치면 모두 죽을 것이니 수사가 필요 없다는 말에 스스로 복수에 나서는 남성의 이야기다. 주인공은 내일 세상이 멸망해도, 복수를 위한 죽음은 따로 존재한다고 믿는다. 장명섭 작가는 “우리 모두는 언젠가 종말을 맞이하고, 그때가 되면 우리 안에 내재돼 있던 욕망과 인간성이 드러나며 수많은 변곡점을 만들어낼 것”이라고 집필의도를 설명했다.

이 외에도 지구 멸망이 예정돼 있는 상황에서도 ‘밀당’하는 남녀의 로맨스(조영주 ‘멸망하는 세계, 망설이는 여자’) 최소한의 인류를 태운 우주선 안에서 펼쳐지는 액션 활극(신원섭 ‘방주의 아이들’), 지구 종말과 함께 시작되는 원혼들의 SF호러 치정극(김선민 ‘푸른 밤’), 종말 앤솔러지에 참여하는 네 명의 작가를 관찰하는 괴짜 소설가의 최후(김동식 ‘에필로그’)까지 저마다의 개성을 가진 작가들이 스릴러, 로맨스, SF, 호러 등 다양한 장르로 ‘종말’ 키워드를 풀어낸다.

설사 우리에게 종말이라는 피할 수 없는 한 가지의 결말만이 마련돼 있다 하더라도, 그 앞에 선 우리의 모습은 모두 다를 수 있다. 두 책을 읽고 나면, 한 그루의 사과나무를 심는 것만큼이나 이색적인 나만의 종말의 모습을 상상해보게 된다.


 인더백 

 차무진 지음 

 요다 발행ㆍ392쪽ㆍ1만4,000원 


 모두가 사라질 때 

 정명섭 외 지음 

 요다 발행ㆍ272쪽ㆍ1만4,000원 

한소범 기자 beom@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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