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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쩐지 펼쳐 보기 두려운 고전을 다시 조근조근 얘기해 봅니다. 작가들이 인정하는 산문가, 박연준 시인이 격주 금요일 ‘한국일보’에 글을 씁니다
<19>김유정, ‘동백꽃’
이른 봄 노란 꽃을 피우는 생강나무. 강원도에선 이 꽃을 ‘노란 동백’이라 불렀다. 한국일보 자료사진

‘동백꽃’은 한자리에서 뜨거운 커피를 호로록 마시는 동안 다 읽을 수 있는 소설이다. 짧지만 그윽하고, 여운이 깊다. 이 책에는 표제작 ‘동백꽃’을 비롯해 김유정(1908~1937)의 빼어난 단편들이 실려 있다.

“오늘도 또 우리 수탉이 막 쪼키었다.” (296쪽)

이 ‘신나는 시작’을 우리는 알고 있다. 알지만 한번 시작하면 멈출 수가 없다. 재미있기 때문이다! 읽고 나면 매번 고추냉이를 맛본 것처럼 코끝이 알싸해진다. 눈앞에서 파드득대며 닭싸움이 한 차례 지나간 것 같고, 이중섭의 ‘부부’라는 그림도 슬몃 떠오른다. 날개를 펼친 수탉과 암탉이 ‘쪽’ 입맞춤하는 그림이다.

열일곱 살의 화자는 점순이의 마음을 몰라준다. 자존심이 상한 점순이는 자기네 수탉과 화자네 수탉끼리 싸움을 붙인다. 수탉의 싸움이 고조될수록 이야기의 흥미도 깊어진다. 김유정은 소설이 설명하는 일이 아니라 ‘보여주는’ 일이어야 한다는 것을 아는 작가다. 해석이나 설명 없이, 둘의 모습을 그대로 보여준다. 요즘으로 치면 두 인물의 ‘밀당’과 ‘썸’을 생생하게 그리고 있다.

소설 끝자락에서 화자는 점순이의 닭을 실수로 죽인다. “비슬비슬 일어나며 소맷자락으로 눈을 가리고는 얼김에 엉, 하고 울음을 놓”는 화자에게, 점순이는 묻는다. “그럼 너 이담부텀 안 그럴 테냐?” 무엇을 안 그래야 하는지도 모르면서, 화자는 안 그러겠다고 약속한다. 이후 한국문학사에 남을 명장면이 펼쳐진다.

“그리고 뭣에 떠다밀렸는지 나의 어깨를 짚은 채 그대로 픽 쓰러진다. 그 바람에 나의 몸뚱이도 겹쳐서 쓰러지며 한창 피어 퍼드러진 노란 동백꽃 속으로 폭 파묻혀버렸다. 알싸한 그리고 향긋한 그 내음새에 나는 땅이 꺼지는 듯이 온 정신이 그만 아찔하였다.”(306쪽)

강원도에선 생강나무를 ‘노란 동백’이라 불렀다고 한다. 그러니 노란 동백은 생강나무 꽃일 가능성이 크다. 꽃에 파묻힌 그들은 두 번째 약속을 한다. “아무 말 마라?” “그래!” 둘만의 비밀이 생긴다는 것. 그것은 관계가 새로운 국면을 맞이한다는 뜻이다. 아무리 눈치코치 없는 화자라도 이제는 점순이의 마음을 알아챌 만도 하다.

김유정은 괴로운 인간사에서도 ‘희망’을 먼저 본 작가다. 그의 작중인물들은 하나 같이 가난하고, 미련하고, 헛된 희망을 좇고, 사기를 당하고, 노름판을 기웃거리고, 추루하지만 놀라울 정도로 ‘생기’가 있다. 쉽게 좌절하거나 숨지 않는다. 때로 우스꽝스럽고, 사랑스럽다. 사기꾼이나 노름꾼, ‘나쁜 놈’에게 조차 정이 간다. 사는 일은 원체 비루함을, 그러나 인간 하나하나를 들여다보면 가엾은 데가 꼭 하나씩은 있음을, 김유정은 알았을까. 그가 죽기 전에 친구 안회남에게 쓴 편지가 있다.

“나는 참말로 일어나고 싶다. 지금 나는 병마와 최후 담판이다. 나에게는 돈이 시급히 필요하다. 그 돈이 없는 것이다. 내가 돈 백 원을 만들어 볼 작정이다. (중략) 돈, 돈, 슬픈 일이다. 나는 지금 막다른 골목에 맞딱드렸다.”(‘원본 김유정 전집’)

폐결핵과 치질로 밤마다 비명을 지르면서도 그는 살기 위해, 탐정소설 번역 일을 구해주면 50일 이내로 번역해 보내겠다고 장담했다. 돈이 구해지면 닭 삼십 마리를 구해 고아먹고, 땅꾼을 들여 살모사 구렁이도 먹어보겠다고, 그러면 살아날 게 분명하다고 썼다. 편지를 쓰고, 그는 열 하루 뒤에 죽었다.

김유정의 이 마지막 편지를 책상 앞에 붙여놓고 날마다 들여다보던 시절이 있다. 소리 내어 읽으며 1937년 3월 18일, 그가 편지를 쓰던 날 밤을 생각했다. 그 밤에 오래 머무르던 시절이 있었다.

박연준 시인
동백꽃
김유정 지음
문학과지성사 발행ㆍ464쪽ㆍ1만1,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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