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혈관에 ‘민주’와 ‘운동’의 피가 흐를 것 같은, 더불어민주당 지도부의 한 의원을 만났다. 그에겐 독립해 사는 20대 아들이 있다. 흙수저 태생인 그 의원은 지난 8월 아들을 불러 용돈을 줬다고 했다. 부자 부모 만난 아이들의 성공이 얼마나 간편하게 성취되는가를, 가난한 부모의 아이들에게 ‘공정’이란 얼마나 텅 빈 말인가를 조국 전 법무부 장관의 삶이 까발렸을 때였다. “미안하다고 사과했지. 아비로서 해 준 게 참 없더라고.”

거기까지였다. 그 의원의 마음은 피붙이의 상처를 걱정하는 데만 쓰였다. ‘조국 정국’ 내내 그는 조국을 지키고, 그리하여 정권을 지키는 것만이 대의인 양 말하고 행동했다. 청년과 공정은 이번에도 ‘나중에’였다. 가진 자들의 눈높이가 원래 그렇다.

여의도의 권력자들은 금세 얼굴을 바꾸었다. 청년공화국이라도 만들려는 것처럼 호들갑을 떤다. 그러나 그들은 여전히 청년들을 내려다 본다. 총선을 앞둔 지금 잠시 자애로운 표정을 짓고 있을 뿐, 기득권을 나눠 가질 생각은 하지 않는다.

청년들은 그들에게 그저 ‘표’다. 구조적 불평등에 분노한 청년 세대, ‘앵그리 영’은 ‘화가 난 표’다. 그게 아니라면, 20대 공관병에게 갑질했다 옷 벗은 전직 장성이 국회의원 하겠다고 휘젓고 다닐 리가 없다. 젊은 노동자들을 일주일에 52시간만 일하게 하니까 벤처가 망한다고 불평하는 1조원대 부자 벤처인에게 대통령이 미래 연구를 맡겼을 리가 없다.

밀레니얼 세대를 분석하는 콘텐츠가 쏟아져 나온다. 관통하는 메시지는 거칠게 정리하면 이거다. ‘회식 싫어하고 용감하게 칼퇴근 하는 이기적인 밀레니얼 후배들을 욕먹지 않고 부리는 법.’ 책과 강연들이 챙기라고 일러주는 건 후배들의 마음이 아니라 나의 평판이다. 그래야 내가 계속 잘 나갈 테니까, 이 자리를 물려주지 않아도 될 테니까. 20년쯤 전엔 X세대인 나도 분석 대상이었다. ‘소비와 향락에서 정체성을 찾는 세대’라고 규정 당한 나는 기성세대의 지갑을 채워 줄 구매력에 불과했다.

“네가 나를 모르는데~ 난들 너를 알겠느냐~”라는 흘러간 유행가 가사에 인간관계의 진리가 담겨 있다. 타인을 이해하는 건 어렵다. 수백 만 명의 타인으로 구성된 한 세대를 이해하는 건 불가능에 가깝다. 행동패턴 몇 가지로 한 세대를 정의하고 그들의 아픔에 공감한다고 거침없이 말할 수 있는 건 스스로가 ‘갑’이라는 인증이다.

그런 ‘갑’들의 떠들썩한 목소리에 묻혀 약자들의 분노는 좀처럼 들리지 않는다. 2013년의 김동준, 2014년의 김대환, 2015년의 김동균, 2017년의 이민호, 2018년의 김용균. 산업재해로 억울한 죽임을 당하고서야 우리가 알게 된 청년의 이름들이 그 증거다.

모두의 분노가 공평하게 들렸다면, 세상이 이렇게 나빠지지 않았을 것이다. “태어나서 세상이 점점 좋아지는 것만 봤는데 요새는 왜 이러니?” “세상은 원래 구린 거 아닌가요?” 70대인 내 엄마와 10대 조카는 전혀 다른 세상에 산다. 이 세계가 ‘구려’지는 동안, 먼저 태어났다는 이유만으로 청년들보다 조금 더 수월하게 살아 온 것 같아 나는 이따금 미안해진다.

나와 우리를 대변할 수 있는 건 나와 우리밖에 없다. 나의 분노가 들리게 하려면, 들릴 때까지 소리를 질러야 한다. 정치 권력은 초대형 마이크다. 그러므로 청년이여, 정치를 하라. 선거에 출마하라. 권력에 도전하라. 기득 권력의 청년 타령을 믿지 말라. 현금은 주지만 고용은 하지 않는, 결혼해 인구 재생산을 해야 아파트 거주권을 빌려주겠다고 하는 그들의 의도를 의심하라. ‘김지영’들의 눈물을 닦아 주는 정책, ‘김용균’들이 노인으로 늙어 죽을 수 있는 권리를 지켜 주는 법을 직접 만들라. ‘나중에’를 기다리지 않는 정치를 할 여러분에게 나는 빚진 마음으로, 그러나 기쁘게 투표할 것이다.

최문선 정치부 차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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