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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환점 돈 정부, 공정 혁신 등 강조하지만
취지 옳더라도 방향 잘못되면 역주행 경험
머리 아닌 현장에서 ‘무엇인가’ 답을 찾길
문재인 대통령이 10월 22일 국회에서 시정연설을 하며 '공정'을 여러 차례 강조하고 있다. 청와대사진기자단

○○란 무엇인가. 이 철학적 질문은 몹시 진부하거나 고답적으로 받아들여질 수 있다. 그렇다면, ‘○○’에 생각나는 단어들을 넣어보자. ‘가족’이란 무엇인가. ‘리더‘란 무엇인가. ‘평등’이란 무엇인가. 명쾌하게 답을 할 수 있겠는가.

본보에 ‘한국이란 무엇인가’라는 글을 연재하고 있는 김영민 서울대 정치외교학과 교수는 그의 대표 칼럼으로 꼽히는 ‘추석이란 무엇인가’를 비롯해 끊임없이 ○○란 무엇인가라고 묻는다. 김 교수의 글들은 우리가 너무 당연하게 여기던 믿음 곳곳에 균열을 낸다. 마이클 샌델의 ‘정의란 무엇인가’가 세계적인 베스트셀러가 됐던 것도, 실생활의 다양한 사례들을 들이대며 우리가 정의라고 생각했던 것들이 때론 정의가 아닐 수 있음을 고민하게 만들어 줬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장황하게 ‘무엇인가‘를 예찬한 건, 반환점을 돈 문재인 정부에 지금 가장 필요한 질문이라고 여겨서다. 문재인 대통령은 최근 국회 시정연설에서 ‘공정’이라는 단어를 27차례 언급했다. 그런데 내놓은 해법을 보며 이렇게 묻지 않을 수 없었다. 대통령께서 생각하는 ‘공정’이라는 것은 무엇입니까?

문 대통령은 ‘조국 사태’가 보여 준 여러 불공정의 민낯 중 대학 입시를 콕 집어 ‘정시 확대’를 해법으로 제시했다. 정시, 그러니까 대입수학능력시험(수능)이 평가방식 면에서는 여러 입시 유형 중 가장 공정하다는 데는 전적으로 동의한다. 누군가 시험지를 빼돌리지 않는 한 불공정이 끼어들 여지가 없을 테니까.

하지만 그 공정성은 평가방식에 한해서만 유효할 뿐, 과정과 결과 간 인과관계의 불공정에선 학생부종합평가(학종)와 우열을 가리기 쉽지 않다고 본다. 수능은 비싼 학원을 많이 다닐수록, 시험을 여러 번 치를수록 유리하다. ‘부자 N수생’들과 ‘가난한 재학생’들의 경쟁이 결코 공정한 룰은 아닐 것이다. 교육부 실태조사에서 학종 합격자의 ‘고교 서열’이 확인됐다는데, 그렇다면 정시 합격자는 그 서열이 없었겠는가 말이다. 더구나 입시에서 창의성(현재의 학종이 실제 학생들의 창의성을 키우는지는 논외로 친다면)보다 공정성을 앞세우는 것이 공정한지 역시 짚어 봐야 한다. 수능에서 평가하는 범주 밖의 다른 재능을 가진 학생들은 제대로 평가받을 기회조차 얻지 못한다. 문 대통령이 보고 있는 건 공정의 편면일지 모른다.

이 정부의 1호 국정과제인 ‘비정규직 제로(0)’ 정책도 그랬다. 어려운 시험 관문을 뚫고 정규직 자리를 차지한 이들은, 그런 노력 없이 비정규직에서 바로 정규직으로 직행하는 통로를 열어 주는 것이 공정하냐고 물었다. 나라 전체의 비정규직은 늘어나는데(8월 기준 전년동월비 87만명 증가) 공공부문 비정규직만 감소(공공기관 비정규직 비율 2017년 말 28.4% →올 6월 말 22.2%)한 결과물은 세금으로 떠받치는 철밥통을 더욱 단단히 하는 것이 공정한지 묻고 있다. 비정규직의 정규직화가 추구하는 공정이 틀렸다는 게 아니라, 하나의 불공정을 건드렸을 때 훼손되는 다른 ‘공정들’에 대한 고민이 부족했다는 얘기다.

시정연설에서 공정과 함께 주요한 키워드로 제시한 ‘혁신’ 또한 ‘무엇인가’에 대한 치열한 고민이 아쉽다. 정부는 혁신을 입이 닳도록 외치는데, 현장에선 규제만 보인다고 아우성을 치는 건 혁신에 대한 정의 자체가 잘못됐을 수 있다는 것일지 모른다. ‘타다‘에서 기술적 혁신을 찾아볼 수 없다는 일각의 지적에 상당 부분 공감하지만, 혁신이 반드시 기술에만 있는 것은 아니다. 서비스 혁신도 혁신이다.

그뿐이겠는가. 경제가 괜찮다는데 사람들은 다 힘들다고 아우성이면 ‘괜찮은 경제‘란 무엇인가를, 통계는 역주행하는데 일자리 질이 좋아지고 있다고 강변하려면 ‘좋은 일자리’란 무엇인지를 다시 따져 봐야 한다.

정부가 남은 절반의 임기엔 지금까지처럼 당위성에만 매몰돼 공정을, 혁신을, 경제를, 그리고 일자리를 말하지 않았으면 한다. ‘무엇인가‘에 대한 답은 청와대의 머리가 아니라 현장에서 찾기 바란다.

이영태 디지털콘텐츠국장 ytlee@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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