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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특정 지원자 띄우기 으레 하는 일로” 방송작가 고백 
 허각ㆍ아이돌 그룹 배출했던 두 PD 구속 배반감 안겨 
 “10명 중 9명이 기획사 연습생”… 방송사ㆍ기획사 담합 부추겨 
 엑스원 데뷔 강행, 새 오디션 준비… “CJ ENM 도덕적 해이 극심” 비판 
서울 마포구 상암동에 위치한 CJ ENM 사옥. 케이블채널 Mnet 오디션 프로그램 '프로듀스X101'의 투표 조작 혐의로 이 회사는 압수수색을 당했다. 연합뉴스

몇 년 전 한 오디션 프로그램의 방송작가 A씨는 출연자 중 한 명을 따로 불러 경연곡을 미리 알려줬다. 출연자가 경연곡을 알면 무대를 준비하기가 수월하다. 좋은 점수를 받을 가능성은 당연히 커진다. 제작진이 ‘픽(Pick)’한 출연자는 방송에서 사연으로 주목받던 인물이었다. 화제성 큰 지원자를 집중적으로 지원해 방송의 재미를 살리기 위해 제작진이 ‘꼼수’를 쓴 것이다.

음악전문 케이블 채널 Mnet 오디션 프로그램 ‘프로듀스X101’의 문자 투표 조작 논란이 불거진 뒤 최근 한국일보와 만난 A씨는 “그땐 (경연곡을 특정 출연자에 미리 알려주는 게) 큰 잘못인 줄 몰랐다”고 말했다. 프로그램을 띄우려고 제작진이 으레 하는 일로 여겼다고 한다. A씨가 참여한 오디션 프로그램은 2010년대 초반 CJ ENM 계열 케이블 채널에서 방송됐다. Mnet은 CJ ENM 계열 채널이다.

‘프로듀스X101’의 시청자 문자투표 조작 혐의를 받고 있는 김용범 CP(총괄 프로듀서)와 안준영 PD가 5일 구속되면서 오디션 프로그램의 불공정한 제작 관행에 대한 비판의 목소리가 높다. 프로그램 제작과 관련한 사기 혐의로 방송사 PD가 구속되기는 이례적이다. 김 CP는 한때 시청자들을 TV앞에 불러모은 ‘슈퍼스타K’ 시리즈를 연출한 스타 PD다. 2010년 ‘슈퍼스타K2’를 통해 중졸 환풍기 수리공 출신 허각을 ‘국민 오디션 스타’로 만들었다. 안 PD는 ‘국민 프로듀서’라는 말을 유행시킨 ‘프로듀스 101’시리즈를 연출하며 방송가에 화제를 뿌린 인물이다. ‘오디션 제국’ CJ ENM의 일등공신으로 여겨졌던 두 사람이 오디션 열풍에 찬물을 끼얹은 셈이다.

Mnet 오디션 프로그램 '프로듀스X101'는 투표 조작 논란으로 공정성에 큰 타격을 입었다. Mnet 제공

오디션 프로그램은 공정성이 무기다. 재능은 있으나 여러 제약과 장애 때문에 스타가 못된 ‘진흙 속의 진주’를 캐낸다는 취지를 품고 있다. 우승자가 얼마나 공정한 과정을 통해서 배출되느냐가 프로그램 성공의 관건이다. ‘오디션 스타 PD’들의 구속으로 오디션 프로그램에 대한 신뢰도는 뚝 떨어졌다. 흥행에만 혈안이 된 방송사의 무책임한 제작 관행이 문제를 키웠다는 지적이 나온다.

방송가에선 터질 게 터졌다는 반응이다. ‘특정 연습생 방송 분량을 늘려 띄워준다’ 등 그간 오디션 프로그램에 대한 불공정 의혹이 끊이지 않았다. 제작진은 갑이고, 출연 연습생은 철저히 을 취급을 받는다는 주장도 종종 제기됐다. 오디션 프로그램 ‘아이돌학교’(2017)에서 주목받다 탈락한 가수 이해인은 제작진에 투표수 조작 의혹에 대한 해명을 요구했다가 “네가 (포털 사이트) 실시간 검색어에 떠 있지 않냐. 네가 승리자”란 답을 받았다고 최근 폭로했다. 탈락 후에라도 유명해졌으니 제작진 덕 아니냐는 반응에는 ‘갑’의 인식이 짙게 깔려있다.

‘프로듀스101’ 시리즈는 출연 연습생 선발부터 기회의 평등을 담보하기 어려웠다. ‘프로듀스X101’에 출연한 101명을 조사한 결과 92명이 기획사 소속 연습생이었다. 무소속 연습생은 9명에 그쳤다. 방송사와 연예기획사가 담합해 특정 연습생에 특혜를 줘도 외부에서 견제하고 문제 삼기 어려운 제작 환경이었다.

오디션프로그램. 그래픽=신동준 기자

‘프로듀스X101’의 데뷔조로 선발된 11명의 연습생 중엔 CJ ENM 임원 출신이 차린 K팝 기획사 소속 두 명이 포함됐다. 경찰은 이 기획사를 최근 압수수색했다. 김 CP와 안 PD는 시청자의 유료 문자 투표수를 조작해 특정 기획사 연습생에게 이득을 준 의혹을 받고 있다. 이들에게 적용된 혐의는 사기와 업무방해, 배임수재 등이다. 경찰은 ‘프로듀스101’의 3개 시즌을 비롯해 ‘아이돌학교’의 투표수 조작 여부를 수사하고 있다. Mnet이 제작 방송한 프로그램들이다.

‘프로듀스X101’으로 제기된 불공정 제작 환경 문제를 서둘러 바로 잡지 않으면 승부 조작으로 쑥대밭이 됐던 프로축구처럼 오디션 프로그램 생태계가 고사할 수 있다는 우려가 높다. ‘조국 사태’ 후 공정에 대한 사회적 열망이 부쩍 높아진 데 따른 여파도 있다. ‘프로듀스X101’의 투표 조작 의혹을 취업 사기 혹은 채용 비리 같은 부패 사건으로 간주해 방송사를 향해 비판이 더 강하게 쏟아지고 있다. 이택광 경희대 교수는 “‘프로듀스X101’ 사태가 개인의 일탈로 보이지만 프로그램의 구조적 모순이 고름이 되어 결국 터진 것”이라며 “K팝 아이돌 오디션 프로그램에 참여의 민주주의 코드를 회복하는 일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하태경 바른미래당 의원은 Mnet에 시청자위원회 설치를 의무화하는 법안을 이날 발의했다. 지상파와 종합편성(종편) 채널에만 의무화된 시청자 위원회를 CJ ENM 계열 채널에 둬 프로그램 전반을 감시하자는 취지다.

정작 Mnet은 ‘프로듀스X101’ 투표 조작 논란이 불거진 뒤에도 프로그램이 선발한 멤버들로 구성된 프로젝트 그룹 엑스원의 데뷔를 강행했다. 지난달 새 오디션 프로그램 ‘월드클래스’도 내보냈다. 김헌식 대중문화평론가는 “CJ ENM이 외부 비판보다 수익을 우선시했다고 볼 수 밖에 없다”라며 “도덕적 해이가 극에 달한 방송 권력에 대한 견제가 제대로 이뤄지지 않은 것이 문제”라고 꼬집었다.

양승준 기자 comeon@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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