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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반백 년 넘게 한국문학계 기둥 역할을 해온 한국일보문학상이 52번째 주인공 찾기에 나섭니다. 예심을 거쳐 본심에 오른 작품은 10편. 심사위원들이 매주 화요일과 목요일 본심에 오른 작품을 2편씩 소개합니다(작가 이름 가나다순). 수상작은 본심을 거쳐 이달 하순 발표합니다.  
 <1> 공선옥 ‘은주의 영화’ 
공선옥 작가 '은주의 영화'. 창비 제공

‘은주의 영화’는 “슬픔이라거나 그늘이라고 하면 좀 민망해질 수도 있는” 옛날간날 이야기다. 1980년대 이후 30년 동안 개인의 삶을 관통한 역사의 흔적을 그리고 있으니 한 시대에 대한 비망록이자 레퀴엠이라 부를 수도 있겠다. “돌아보면 본인도 몸서리칠 옛날이야기를 뭣할라고 미주알 고주알” 늘어놓는 작가의 시선은 5·18 광주 민주화운동의 그늘과 쌍용차 파업 현장을 가로지른다. 국가 폭력에 의해 희생당하고도 그 희생이 기록되지도 추모되지도 못한 사람을 비롯해 문자메시지 한 통으로 해고를 통보받는 비정규직 노동자에 이르기까지, 소외되고 배제된 이들이 풀어놓는 속엣말은 오래되었으나 과거가 되지 못한 채 현재를 떠도는 중이다. 말 못할 사정(私情)의 역사가 혹독한 사정(史情)의 역사를 다시 쓴다.

표제작 ‘은주의 영화’는 그중에서도 수작이다. 은주는 이모의 사연을 카메라에 담는다. 5·18 당시 퇴각하던 군인들이 총으로 집 안의 닭이며 개를 쏘아 죽이는 걸 보고 쓰러진 이모는 그때 받은 충격으로 다리를 전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이 부상을 부를 이름이 없다. 누구도 알아주지 않는 피해. 한편 이모 이야기를 담는 과정에서 은주는 또 다른 피해자인 철규의 사연을 듣는다. 열한 살 철규는 곧잘 은주를 업고 돌봐 줬다 한다. “내가 만화책도 보여 주고 노래를 불러 줘도 계속계속 울잖아요. 업어 주니까 안 우는 거예요, 얘는요, 사람이 꼭 업어 줘야만 안 우는 진짜 성질 이상한 애라니까요.” 후렴구처럼 반복되는 철규의 말 위로 1989년, 반독재 투쟁을 벌이다 경찰에 쫓기던 중 의문사한 조선대 학생 이철규의 죽음이 오버랩된다. 소년 철규의 어머니는 말한다. “대학생 철규가 부럽더라고, 그때는. 우리 철규는 어떻게 죽었는지, 열한 살 우리 철규의 죽음을 밝혀내라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어.” 우리에게는 철규의 죽음을 부를 이름이 없다. 누구도 기억하지 않는 피해.

언젠가 작가가 한 인터뷰에서 노래는 듣는 것이 아니라 부르는 것이라고 말하는 걸 봤다. 이 소설들은 편편이 노래 같다. 생동감 넘치는 남도 사투리와 후렴구처럼 반복되는 곡진한 구절 사이로 흐르는 가락이 낮은음자리 인생들의 고단하고 처연한, 지나갔지만 사라지지 않은, 불행했지만 무너지지 않은 시절을 담담히 기록한다. 읽노라면 “못물 같은 눈물이 고요히” 고이는 것인데, 어느 새 입술 위에는 노래가 될 말들이 새처럼 앉아 있다. 오랜 세월 굳건히 자기 자리를 지키다 숫제 자리 자체가 되어 버린 이름. ‘은주의 영화’의 공선옥이다.

박혜진 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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