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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생과학]인삿말에 녹아있듯, 우리나라 사람들이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은 '밥', 그 중에서도 '흰 쌀밥'이다. 게티이미지뱅크

“밥은 먹었어요?”, “언제 한 번 밥이나 먹자”, “그러고도 밥이 넘어가냐.”

우리나라 말에는 유난히 ‘밥’과 관련된 인사말과 관용구, 속담이 많다. 쌀이 풍부한 농경사회였지만 배 곯고 지낼 수밖에 없었던 가난을 오랜 기간 겪어오면서, 밥 먹는 것을 무엇보다 중요하게 여기게 됐기 때문이다. 특히 새하얀 쌀밥은 지금까지도 ‘제대로 된 식사’의 대명사처럼 여겨지고 있다.

쌀과 물이 만나 이토록 중요한 밥이 되는 과정은 생각만큼 간단하지 않다. 단순히 쌀을 물에 넣어 끓이는 것이 아니라, 고온ㆍ고압이라는 특별한 환경을 만들어줘야 하기 때문이다. 선조들이 사용하던 가마솥부터 현재 사용하고 있는 전기압력밥솥까지. 밥을 짓는 데는 다양한 과학적 원리들이 적용돼 있다.

 ◇가마솥에 담긴 선조들의 과학적 지혜 
가마솥의 뚜껑은 전체 무게의 3분의 1 정도로 무거워 안에서 발생하는 수증기를 눌러놓기 좋다. 게티이미지뱅크

우리나라에서는 삼국시대 훨씬 이전부터 솥이 사용된 것으로 추정된다. 특히 한반도에서 토기나 구리로 만들어진 솥은 청동기 시대 후기 고조선 유적에서부터 발굴되고 있다. 다만 이 당시 솥은 음식을 조리하기 위한 용도보다는 왕의 공적을 기리거나 국가 행사에 사용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삼국시대 때부터는 청동이나 쇠로 만들어진 솥이 쓰이기 시작했고, 고려 중기 이후 집집마다 보급될 정도로 솥이 대중화됐다. 밥과 국을 주식으로 하는 우리의 식습관과 솥이 잘 맞아떨어진 덕분이다.

우리가 아는 형태의 무쇠 가마솥의 뚜껑은 솥 전체 무게의 3분의 1에 달할 정도로 무겁다. 온도 변화 속도를 늦추고 높은 온도를 유지시켜주기 위해서다. 불로 솥을 가열하면 솥 안의 공기가 팽창되고, 물이 수증기로 변하게 된다. 무거운 뚜껑은 수증기가 밖으로 나가지 못하게 잡아둠으로써 내부 압력을 높게 만드는 역할을 한다. 압력이 높아지면 물의 끓는점이 올라가 쌀이 섭씨 100도 이상의 온도(약 120도)에서 익게 된다. 끓는점의 사전적 정의가 ‘증기압이 외부의 압력과 같아지는 온도’인 만큼, 외부 압력이 높아지면 끓는점이 올라가는 것이다.

높은 산 위에서 밥을 지으면 쌀이 잘 익지 않는다. 그 이유는 주변의 압력, 즉 대기압이 1기압보다 낮아지기 때문에 물이 섭씨 100도보다 낮은 온도에서 끓기 때문이다. 낮은 온도로 익힌 밥은 설익는다. 쌀이 잘 익기 위해서는 대기압(1기압) 이상의 압력이 필요하다는 뜻이다. 게다가 쌀의 주성분인 전분은 물과 만나면 온도가 높아질수록 단맛을 내는 포도당으로 빠르게 잘 분해되기 때문에, 높은 온도에서 익힐수록 달고 맛있게 된다. 쌀 자체의 조직이 연해져서 부드럽게 느껴지는 것도 식감에 큰 영향을 준다.

가마솥의 둥그런 밑바닥도 밥 맛을 내는 데 한 몫 한다. 여러 각도에서 쌀에 열을 전달해줄 수 있어 쌀이 고르게 익을 수 있게 하기 때문이다. 바닥의 두께도 부위별로 다르다. 불에 직접 닿는 부분은 쇠가 두껍고, 가장자리로 갈수록 이 두께가 얇아진다. 열전도율을 고려해 비슷한 정도의 열이 전체적으로 전달될 수 있도록 한 것이다.

 ◇프랑스에서 온 압력밥솥과 일본에서 온 전기밥솥 
압력밥솥은 증기배출구와 압력추, 안전장치 등 단순한 구조만으로도 밥 짓기에 적합한 고압 환경을 만들어낼 수 있다. 풍년PN 홈페이지 캡처

1960년대 이후 산업화로 사라진 아궁이와 가마솥 대신 부엌을 지킨 건 작고 가벼우면서 간편해진 압력밥솥과 전기밥솥이다. 압력밥솥은 가마솥의 원리와 비슷하게 밥솥 안에서 발생하는 수증기를 가둬둠으로써 내부 압력을 높이는 장치가 적용돼 있다. 뚜껑이 들리지 않도록 손잡이를 돌리면 내솥과 뚜껑에 부착된 톱니바퀴가 꽉 맞물리도록 설계돼 있다. 뿐만 아니라 몸체와 뚜껑 사이에는 고무나 실리콘으로 된 링을 붙여 수증기가 새나가지 않도록 밀봉한다.

그러나 증기를 가둬두기만 하면 압력이 과하게 커져 솥이 폭발하게 되기 때문에 뚜껑에는 증기 배출구가 마련돼 있다. 이 구멍은 무거운 압력추가 막고 있는데, 일정 수준 이상 압력이 커지면 추를 밖으로 밀어 올려 증기를 배출한다. 압력밥솥에 음식을 할 때 규칙적으로 ‘치익’ 하는 소리가 나는 것은, 증기가 빠져나가 압력이 떨어졌다가 다시 압력이 커지면 추를 들어올리는 과정이 반복되기 때문이다.

사실 압력솥은 프랑스에서 처음 발명됐다. 물리학자이자 발명가 드니 파팽은 1679년 영국 런던 왕립협회에 자신이 고안한 ‘증기 찜통’을 선보였다. 1682년에는 이를 개량한 도구로 고기를 요리해 시식회를 열면서 “끓여야 하는 음식을 위해 이보다 더 좋은 것은 없다”고 말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 장치가 현대적인 형태로 대중에 판매된 것은 1948년 프랑스의 가정용품 회사 세브(SEB)에서 판매한 ‘슈퍼 코코트’가 유럽에서 선풍적인 인기를 끌면서다. 우리나라에서는 1970년대 후반 PN풍년(당시 세광알미늄)이 알루미늄 주물 방식의 풍년압력솥을 출시하면서 널리 보급되기 시작했다.

일본 조지루시에서 출시한 전기보온밥솥으로 1970~80년대 국내에서 인기를 끌었던 일명 '코끼리 밥솥'. 인터넷 캡처

압력밥솥은 특유의 찰진 밥맛과 빠른 취사로 큰 인기를 끌었지만, 밥을 짓는 내내 불 조절에 신경을 써야 하는 점이 불편했다. 때문에 불을 쓰지 않고 전기로 간편하게 밥을 지을 수 있는데다 보온 기능까지 갖춘 전기밥솥의 인기가 높아졌다.

최초의 전기밥솥은 1921년 일본에서 발명됐고, 1965년 조지루시가 취사 후 보온기능까지 갖춘 제품을 내놓으면서 본격적으로 퍼지기 시작했다. 국내에서도 1980년대 일본관광 필수 기념품이 조지루시의 ‘코끼리 밥솥’일 정도로 전기밥솥의 인기가 높아졌다. 이후 국내 가전회사에서 잇따라 전기밥솥을 출시하면서 대중화됐다. 전기밥솥은 쌀과 물을 넣고 버튼 하나만 누르면 밥이 된다는 편리함이 최고 강점으로 꼽혔지만, 밥맛이 압력솥에 비해 현저히 떨어지고 빨리 딱딱해진다는 단점이 있었다.

 ◇가마솥의 원리를 그대로 활용한 전기압력밥솥 
IH방식 전기압력밥솥은 전기밥솥과 압력밥솥의 장점을 합친 가전으로, 단시간 내 쌀이 빨리 익으면서도 밥맛이 좋아 최근 인기가 높아지고 있다. 쿠쿠전자 제공

1990년대 들어 국내 가전회사들이 전기밥솥과 압력밥솥의 장점을 모두 취한 전기압력밥솥을 출시하기 시작했다. 1990년대 초중반 출시됐던 전기압력밥솥은 대부분 내솥의 밑바닥만 가열하는 ‘열판가열식’ 밥솥이었다. 이렇게 밥을 지으면 보통 원기둥 형태로 생긴 내솥의 아랫부분과 윗부분의 온도 차이가 발생할 수밖에 없다. 밥 양이 많아질수록 아래는 잘 익고 위는 설익는 ‘층층밥’이 되기 쉽다.

이를 극복하기 위해 1990년대 후반부터는 밥솥에 전자유도가열(인덕션 히터ㆍIH) 방식이 도입됐다. ‘통가열식’이라고도 부르는 IH전기압력밥솥은 무쇠솥 전체가 데워지는 가마솥의 원리를 전기밥솥에 적용한 것이다. 밥 전체가 고루 잘 익게 하기 위해 스테인리스 재질로 된 외솥의 아래쪽뿐 아니라 옆면까지 코일로 감쌌다. 코일에 전류가 흐르면 외솥 안쪽으로 유도전류가 발생하고, 이 유도전류가 알루미늄 등 전기저항도가 높은 재질의 내솥과 만나면서 내솥 전체가 동시에 뜨거워진다. 상판 자체가 뜨거워지지 않으면서 냄비에 든 음식을 끓이는 인덕션 레인지와 같은 원리다.

IH방식은 솥 전체가 뜨거워지는 만큼 취사 속도가 빠르다. 덕분에 쌀의 원형이 유지되고, 영양분 파괴도 적다. 쌀 하나하나 골고루 익힐 수 있다는 뜻이다. 특히 국내 기업들이 선도적으로 개발한 IH전기압력밥솥은 취사가 빠른 데다 밥맛도 일반 전기밥솥에 비해 월등하게 좋아, 중국이나 동남아시아 국가 등 쌀을 주식으로 하는 곳에서 환영 받는 ‘효자’ 수출상품이 됐다.

그러나 정작 국내에서는 2010년 이후 쌀밥 소비량이 줄어들면서 전기밥솥 시장이 정체돼 있는 상황이다. 통계청에 따르면 지난해 국민 1인당 쌀 소비량은 61㎏으로 1988년에 비해 절반 수준으로 감소했다. 국내 전기밥솥 시장은 연간 6,000억원 규모이지만, 2014년 이후 더 이상 성장하지 않고 있다. 이미 국내 전기밥솥 보급률이 95%를 넘긴 상황이라 더 이상의 수요 확대가 어려운 것이다. 업계 관계자는 “국내 밥솥 시장은 이미 성숙기”라며 “앞으로는 교체 수요를 대상으로 프리미엄ㆍ소형 제품에 집중하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곽주현 기자 zooh@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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