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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 교육은 특정 정치 세력을 가진 교사들이 장악했다.”

23일 오후 서울 관악구 인헌고등학교 정문 앞. 광화문 거리에서나 들릴 법한 과격한 정치 발언이 10대 청소년들의 입을 통해 울려 퍼졌다. 일부 인헌고 학생들이 결성했다는 ‘인헌고학생수호연합’의 기자회견에서였다. 학생수호연합은 최근 학내 일부 교사가 학생들에게 학교 행사에서 ‘반일’ 구호를 외치도록 강요했다고 주장하고 있다. 그간 두발 규제 철폐 등 학생인권 보장을 촉구하는 청소년 행동은 많았지만 정치적 자유 침해를 공개적ㆍ집단적으로 반대하고 나선 경우는 매우 이례적이다.

학생수호연합은 학생들이 특정 정치적 견해에 동조하도록 강요 받았다는 근거로 지난 17일 진행된 마라톤 행사 관련 문서를 제시하고 있다. 학생수호연합이 사회관계망서비스(SNS)를 통해 공개한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 기념행사 계획’이라는 제목의 문서에는 일본 경제침략 반대 등의 주제로 ‘선언문 띠’를 만드는 활동 개요가 적혀 있다. 1, 2학년 전제 학생이 대상인데 계획서에는 선언문 띠의 제작 예시로 일본 제품 불매 운동을 의미하는 ‘보이콧 재팬(Bocott Japan)’ ‘아베 정권 규탄한다. 강제징용 사죄하라’ ‘친일적폐 청산과 한반도 평화 실현’ 등의 문구가 적혀 있다.

학생수호연합은 이를 두고 “일본 경제침략 반대는 공교육의 영역이 아니라 가치관의 영역”이라며 “임시정부를 핑계 삼아 반일 사상을 주입시키는 것”이라고 비판하고 있다. 특히 이들은 특정 교사가 수업 시간에 박정희 대통령의 경제 개발 업적을 긍정적으로 평가한 학생에게 “너 일베니?”라고 묻거나 “조국 가짜 뉴스 믿는 놈들 다 개ㆍ돼지야” 같은 발언을 일삼았다고 지적했다. 기자회견에 참석한 최모 군은 “교사의 정치적 중립은 의무”라며 “학생들은 정치적으로 이용당하고 싶지 않다”고 말했다.

그러나 학교측은 이 같은 주장이 사실과 다르다고 반박하고 있다. 나승표 인헌고 교장은 이날 오후 기자회견을 갖고 “인헌고는 보편적 교육을 지향하고 있으며 강압적ㆍ고압적인 특정 견해 주입 교육은 하지 않고 있다”며 “학생들의 다양한 견해를 존중하는 교육 본연의 목적에 충실하고 있다”고 밝혔다.

학생수호연합 소속 학생들이 지난 22일 서울시교육청에 일부 교직원이 학생들에게 특정 정치 세력의 입장을 강요하고 있다며 민원을 제기한 데 이어 기자회견까지 자처하고 나서자 교육 당국은 긴급 조사에 나섰다. 서울시교육청 관계자는 “관악ㆍ동작 교육지원청 주관으로 23일 전체 학생들을 대상으로 하는 전수 조사를 진행했다”며 “실제 정치적 강요 등이 있었는지를 확인한 후 후속 조치를 진행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논란이 된 교사 발언에 대한 진위 여부와는 별개로 일부 학생들의 발언 수위가 지나치게 높아지면서 상황이 악화하는 것을 우려하는 목소리도 나온다. 실제 SNS상에는 “인헌고 학생들이 정치파시즘의 노리개가 됐다”는 문구가 적힌 게시물이 공유되는가 하면 이날 기자회견에서도 “학생들을 교사들의 생각과 똑같아야 하는 좀비로 보고 있다” “사상주입과 관련해 깨어있는 학생들은 연락을 부탁 드린다” 같은 과격한 발언이 이어졌다.

이에 대해 인헌고 학생회장단은 입장문을 내고 “선생님이 잘못하신 것이 있다면 마땅한 조치가 있을 것이고 학생과 갈등이 있다면 학교 내에서 대화로 해결해야 한다”고 호소했다. 이어 “수능이 한 달도 남지 않은 상황이고 학생들에게도 중요한 시기”라며 “부디 우리의 교육권을 지켜 달라”고 덧붙였다.

김용식 PD yskit@hankookilbo.com

노희진 인턴PD

조원일 기자 callme11@hankookilbo.com

[저작권 한국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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