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할 오늘]이방자, 봉사와 헌신의 기품(11.4)

입력
2019.11.04 04:23
30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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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제국 마지막 황태자비 이방자의 삶은 여러모로 한국 현대사에서는 드문 '퍼스트레이디'의 상을 일깨웠다.
대한제국 마지막 황태자비 이방자의 삶은 여러모로 한국 현대사에서는 드문 '퍼스트레이디'의 상을 일깨웠다.

지난 6월 타계한 여성인권 및 평화운동가 이희호(1922~2019) 전 김대중 평화재단 이사장을 빼면, 해방 이후 한국의 퍼스트 레이디 가운데 주목할 만한 족적을 남긴 이는 없다. 남편이나 아들 옥바라지로 바쁘기도 했을 것이다. 조선 마지막 황태자비 이방자(李方子, 1901.11.4~1989.4.40)의 생애는, 비록 퍼스트레이디의 지위에 있은 적은 없지만, 여러모로 돋보인다. 그는 조선 마지막 황제 순종의 의붓동생인 의민태자 이은(李垠,1897~1970)의 부인이다.

메이지 천황의 조카인 아버지(왕)와 왕비 어머니의 장녀로 태어난 황족 나시모토노미야 마사코(梨本宮 方子) 여왕은 황족과 화족(華族)만 다니는 가쿠슈인(學習院) 초ㆍ중등과정을 졸업하고, 1920년 4월 일본 도쿄에서 이은과 결혼했다. 히로히토 천황의 배필 물망에도 올랐지만 불임 관상이라는 어의(御醫) 판정에 따라 이은과 맺어졌다는 소문이 파다했다. 당시 이은은 일본 육사를 졸업한 일본군 장교였다. 불임 판정을 받은 일본 황족과 결혼하는 걸 두고, 조선의 식자들과 독립운동가들은 무척 못마땅해했다. 김규식은 프랑스 파리에서 발행하던 ‘자유 대한(La Coree Libre)’이라는 잡지에 이은을 가리켜 “구녀(仇女, 원수의 여자)를 취한 금수(禽獸)”라고 비판했다고도 한다. 물론 이방자도 이은도 원해서 한 결혼이 아니었고, 둘 모두 마다할 처지도 아니었다.

부부에게 1945년 해방은 왕조의 공식적 패망이었다. 미 군정은 둘의 황족 지위ㆍ신분을박탈하고 재산을 몰수했다. 이승만 정권은 한국 귀국마저 허용치 않았다. 한동안 일본에서 무국적자로, 다시 일본 국적을 얻어 살던 부부는 박정희 정권의 배려로 1963년 귀국, 한국 국적을 취득하고 창덕궁 낙선재에 기거했다. 1959년 뇌혈전으로 쓰러져 반신불수 상태였던 이은은 1970년 별세했다.

이방자는 귀국하자마자 장애인 복지ㆍ재활운동에 나섰다. 1967년 소아마비 및 정신지체 장애인을 위한 사회복지법인 ‘명휘원’을 설립했고, 1971년에는 경기 수원에 지적장애 어린이 학교인 ‘자혜학교’를, 1982년에는 광명시에 ‘명혜학교’를 잇달아 세웠다. 학교와 단체를 운영하기 위해 그는 정부 지원 외에 자신의 서예와 그림, 자수 등 작품들로 자선바자를 열곤 했다. 조선 지식인들은 ‘원수의 여자’라며 손가락질했고 초대 정부는 일제의 자국인 양 배척했지만, 그는 그렇게 한국 시민을 위해 멋지게 헌신했다. 최윤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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