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플래시백 한국영화 100년] 홍상수 이전 그의 어머니 전옥숙이 있었다

입력
2019.10.19 04:40
15면

 <33> 첫 여성 제작자이자 문화계 마당발 전옥숙 

 

 ※ 한국영화가 탄생 100년을 맞았습니다. <한국일보>는 영화만큼 재미있는 한국영화 100년의 이야기를 영화전문가를 통해 매주 토요일 들려드립니다.

시네텔 회장 시절 전옥숙씨. 연합영화사 대표 등을 지내며 영화제작자로서 왕성하게 활동했다. 한국일보 자료사진
시네텔 회장 시절 전옥숙씨. 연합영화사 대표 등을 지내며 영화제작자로서 왕성하게 활동했다. 한국일보 자료사진
전옥숙 대표. 한국일보 자료사진
전옥숙 대표. 한국일보 자료사진

이만희 감독의 서른여섯 번째 작품 ‘휴일’(1968)은 1968년 10월에서 11월 서울에서 촬영되어 그해에 완성되었다. 그러나 당시 검열 당국은 갓 탄생한 모던 시네마의 걸작을 '사회의 어두운 면을 표현해선 안 된다' 내지 '미풍양속을 해쳐서는 안 된다‘며 트집을 잡아 심의에서 반려했다. 대신 타협책으로 영화의 결말을 수정하면 상영 허가를 내주겠다고 제안했다. 주인공 허욱의 자살을 암시하는 결말을, 마음을 고쳐먹고 군대에 입대하는 건전한 장면으로 바꿔 정권의 문화정책에 협조할 것을 요청한 것이다. 그러나 이와 같은 수정안은 감독만이 아니라 시나리오 작가 백결 또한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이었다.

이때 영화의 제작자이자 공동 창작자였던 전옥숙(1929~2015) 대한연합영화주식회사(연합영화사)대표는 다른 이들로선 상상할 수 없는 초강수를 두었다. 작품이 망가진 채로 극장에 걸리느니 차라리 개봉을 포기하겠다며 심의 통과를 거절했던 것이다. ‘휴일’은 창고에서 먼지를 뒤집어쓴 채 오랫동안 존재하지도 않는 영화로 남게 되었고, 연합영화사는 당좌거래 정지를 당하는 경영상의 어려움에 처했다. 그러나 세상사는 새옹지마. 2005년 한국영상자료원 창고에서 발굴된 ‘휴일’은 검열의 손길을 피한 채 원형을 고스란히 보전하고 있었고, 이 감독이 남긴 걸작 중 하나로 평가 받았다. 흥행 수익보다 작품을 중시한 제작자의 뚝심으로 가능했던 한국영화사의 기적이었다.

답십리 촬영소 사진을 배경으로 포즈를 취한 전옥숙 대표. 국내 최초 최초 여성 촬영소장이었다. 한국일보 자료사진
답십리 촬영소 사진을 배경으로 포즈를 취한 전옥숙 대표. 국내 최초 최초 여성 촬영소장이었다. 한국일보 자료사진
전옥숙 대표가 제작한 영화 '부부 전쟁'(1964). 한국일보 자료사진
전옥숙 대표가 제작한 영화 '부부 전쟁'(1964). 한국일보 자료사진

 ◇정부 허가 영화사 대표 중 유일한 여성 

배우 신성일은 이 감독의 전성기 작품 활동을 뒷받침해 주었던 전 대표를 두고 “당시 연합영화사 대표였던 전옥숙 여사는 사회주의적인 시각을 가진 여걸이었다. 정부에 허가를 받은 영화사 대표 중 홍일점이며, 통영 출신의 미인으로도 유명했다”고 회고한다. 경남 통영에서 태어난 전 대표는 이화여대 국문학과에 진학할 때부터 연극 활동으로 문화계 활동에 뛰어들었다. 한국전쟁 때 서울에 있었던 전옥숙은 인천상륙작전으로 후퇴하던 북한군의 대열에 휩쓸려, 미아리 고개를 넘어 의정부 방면으로 향하는 도중에 국군에 투항한다. 이때 만난 헌병대장이 배려해준 덕분에 신변에 별다른 화를 입지 않고 무사할 수 있었던 전 대표는 나중에 대령으로 예편한 헌병대장과 결혼하게 된다. 연합영화사의 공동창업자가 되는 남편 홍의선(부부 사이에서 홍상수 감독이 태어났다)이었다. 이들의 사연은 친한 지인이었던 소설가 이병주의 장편소설 ‘남로당’에서 각색되어 전 대표를 모델로 한 김옥숙이란 인물이 소설에 등장하게 된다.

1960년 영화전문지인 주간영화를 창간하고 발행인이 되면서 전 대표는 본격적으로 영화계에 발을 들이게 된다. 한국영화계의 낙후된 제작 여건을 지켜보며 ‘합리적인 영화제작의 터전을 마련할 것을 결심’(경향신문 1968년 10월 21일 자)한 전옥숙은 1963년 은세계 영화제작소를 세우고 이듬해인 1964년 3월 연합영화사를 설립한 뒤 사재를 털어 답십리의 2,000평(약 6,611㎡) 부지에 촬영소를 건립한다. "마누라 없이는 살아도 장화 없이는 못 산다"는 말이 돌 만큼 습지대에 논밭만 무성했던 지금의 동답초등학교 자리와 동대문구 체육관 주변은 상전벽해(桑田碧海)라는 말처럼 순식간에 ‘영화산업 육성’을 위한 전진기지로 뒤바뀌게 된다. 2개의 동으로 건립된 답십리 촬영소는 녹음실, 현상실, 변전실 등 영화 제작 과정 전반을 자체적으로 해결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직원의 복지를 위한 식당과 커피숍, 욕실까지 갖추고 있었다. 다른 영화 촬영소들이 허름한 창고를 개조해 임시로 쓰고 버리는 일이 관행이던 시절, 답십리 촬영소는 “안정적인 전기 공급으로 조명을 마음껏 사용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맡은 역할을 충분히 연습할 수 있는 연기실이 있다”(실버 스크린 1965년 8월 호 ‘꿈의 공장, 종합촬영소를 찾아서’)는 평을 들을 만큼 당시 기준으론 가장 선진적인 설비를 갖춘 스튜디오였고, 전 대표는 한국영화 최초의 여성 영화 제작자이자 촬영소 소장으로 이름을 남기게 된다.

 ◇답십리 촬영소 설립한 영화계 큰손 

연합영화사의 창립작은 정창화 감독의 멜로드라마 ‘부부전쟁’(1964)이 되었다. 당시에 이 영화는 실제로 부부였던 김진규와 김보애가 부부 역할을 맡아 출연해 화제를 모았고, 평단에서도 호평을 얻었다. 영화의 크레디트에는 제작 홍의선, 기획 전옥숙으로 표기되었지만, 동료 영화인들의 증언에 따르면 남편은 명목상의 제작자였고, 실무를 총괄한 건 전 대표였다고 한다. 의욕에 차있던 전 대표는 단순한 제작자의 역할에만 머물러 있지 않았다. ‘휴일’의 경우처럼 감독, 시나리오 작가와 머리를 맞대고 창작과정에서 아이디어를 제공하기도 했으며. 추풍령의 철도국 선로수를 주인공 삼아 스스로 집필한 각본을 시나리오 작가 전범성에게 주어 ‘추풍령’(1965)으로 감독 데뷔를 시키기도 했다. ‘추풍령’의 배우 최남현은 제5회 대종상 남우조연상을 수상했고, 전범성 감독은 제9회 부일영화상 각본상을 수상했으며, 영화는 제15회 베를린영화제와 제9회 샌프란시스코영화제에도 출품되었다.

답십리 촬영소에서 전 대표의 손길을 직간접적으로 거치며 제작된 영화는 정진우 감독의 ‘밀회’(1965), 김달웅 감독의 ‘이수일과 심순애(1965), 배우 최무룡의 연출작 ‘나운규 일생’(1966), 전범성 감독의 ‘바보’(1965), ‘민검사와 여선생(66), ’불사조‘, 임권택 감독의 ’청사초롱‘(1967)과 강대진 감독의 ’가로수의 합창‘(1968) 등을 포함해 무려 80여편에 달했다. 그 중 소록도에서 나병 환자인 남편과 생활하며 병을 완치시킨 실화를 바탕으로 김지미, 박노식이 주연한 ’그대 옆에 가련다‘(1966)는 주요 스태프가 모두 여성 영화인으로 구성되어 남성 중심의 영화계에 큰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문예영화의 대가 김수용 감독과는 ’학사기생‘(1966), ’잘있거라 일본땅‘ ’수전지대‘(1968)를, 이만희 감독과는 ’기적‘(1967), ’냉과 열‘, ’방콕의 하리마오‘등을 함께 했다. 비록 ’기적‘이 예술윤리위원회로부터 예르지 카발레로비치 감독의 폴란드 영화 ’야행열차‘(1959)를 표절했다는 지적을 받고 표절 시비로 곤욕을 치렀지만(동아일보 1967년 6월 24일 자) 영화는 준수한 평과 흥행 성적을 거두며 성공했고 이 감독과의 파트너십은 굳건히 이어졌다. 답십리 촬영소가 문 닫기 전 마지막으로 배출한 작품이 이 감독의 ’생명‘(1969)이었을 정도였다.

전옥숙(오른쪽 두 번째) 대표는 '사교계의 여왕봉'이라 불릴 정도로 폭 넓은 인간관계를 맺었다. 그가 여는 송년파티에는 정재계 인사까지 모여들었다. 한국일보 자료사진.
전옥숙(오른쪽 두 번째) 대표는 '사교계의 여왕봉'이라 불릴 정도로 폭 넓은 인간관계를 맺었다. 그가 여는 송년파티에는 정재계 인사까지 모여들었다. 한국일보 자료사진.
전옥숙 대표의 아들 홍상수 감독의 데뷔작 '돼지가 우물에 빠진 날'(1996).한국일보 자료사진
전옥숙 대표의 아들 홍상수 감독의 데뷔작 '돼지가 우물에 빠진 날'(1996).한국일보 자료사진

 ◇김영삼 전 대통령과도 교유한 ‘사교계의 여왕봉’ 

다수의 우수 영화를 배출하는 한 편으로 조운천 감독의 ’태권도 최후의 일격‘(1967)과 같은 권격 액션 장르에도 손을 댈 만큼 제작자 전 대표의 영화적 관심은 다방면으로 뻗어 있었다. 그렇게 전성기 한국 영화의 산실 역할을 하던 답십리 촬영소는 1970년 역사적 사명을 다하고 철거되었다. 오늘날에도 ‘촬영소 고개’와 ‘촬영소 사거리’라는 지명이 남아 전 대표가 주도했던 연합영화사와 답십리 촬영소의 역사를 지금에 전한다.

전 대표의 활동은 영화계에만 국한되지 않았다. 일본어에 능했던 장기를 십분 살려 1974년부터는 월간 일본연구의 발행인을 맡았고, 이듬해에는 문학계간지 한일문예와 소설문예를 창간해 한국 문학을 일본어로 번역해 소개하는 일을 도맡았다. 이때 얻은 인맥을 바탕으로 일본 후지TV의 한국지사장을 역임한 전 대표는 1984년 한국 최초의 독립 방송 외주제작사인 시네텔 서울을 설립해 회장 자리에 오른다. MBC ‘베스트셀러 극장’에서 방영한 드라마 ‘웃음소리’가 시네텔 서울에서 제작한 첫 방송 프로그램이었다. 1991년에는 한국방송아카데미를 출범시켜 방송계 후진의 교육과 양성을 도모했으며, 1998년 일본대중문화 1차 개방에도 일익을 맡았다.

문화계 전반에 걸친 실력자로 '사교계의 여왕봉(女王蜂)‘이라 불린 전 대표는 여러 가지 흥미로운 일화를 남겼다. 가수 조용필의 후견인으로 일본 진출을 돕는가 하면 조용필의 노래 ‘생명’과 '서울 1987년'을 작사해줄 만큼 막역한 사이였고, 매년 개최한 송년파티에는 시인 김지하, 김영삼 전 대통령, 민주화 운동가 장일순을 비롯해 정ㆍ재계와 문화계 사람들이 얼굴을 내미는 전방위적인 인맥을 자랑했다. 민청학련 사건으로 잡혀간 김지하의 석방을 비롯해 민주화 인사들을 물심양면으로 지원하며 운동권의 대모(代母)로도 불렸다.

연합영화사와 답십리 촬영소는 역사 속으로 사라졌지만 전 대표의 영향력이 아주 없어진 건 아니었다. 영화사 동아수출공사는 ‘돼지가 우물에 빠진 날’(1996)을 제작할 때 막 데뷔작을 만드는 신출내기 감독에게 시나리오 수정의 재량권을 주는 모험을 강행했다. 전 대표와 이우석 동아수출공사 회장의 인연이 강하게 작용했을 것이다. 문화계의 실력자였던 어머니 전옥숙의 후광에 힘입어, 영화감독 홍상수, 영화계를 놀라게 했던 ‘돼지가 우물에 빠진 날’은 그렇게 탄생했다.

조재휘 영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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