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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능범죄, 당신을 노린다] <16> 인천 공인중개사 전세 사기 사건
등기부 등본·집주인 얼굴 확인한 전세인데… “월세 밀렸다고요?”
“깨끗한 매물” 공인중개사가 내민 등기부, 오려 붙인 ‘가짜’였다
공인중개사 정모(54)씨에게 전세 보증금 5,500만원을 사기 당한 하모(32)씨가 지난 10일 자신이 운영하는 음식점 앞에 서 있다. 홍인택 기자

하모(32)씨는 인천 중구의 ‘C 오피스텔’에 원룸을 얻던 날을 여전히 생생하게 기억한다. 내 집 마련이 꿈 같은 이야기라면, 전세방을 얻는 건 손에 확실히 잡히는 현실이었다. 매달 수십만원씩 꼬박꼬박 내던 돈을 아껴 내 장사에 더 쓸 수 있고, 형편이 나아지면 가정도 꾸릴 수 있겠다는 희망이 자라났다. 2017년 9월11일 하씨는 10년간 모은 5,500만원을 전세보증금으로 넣었다.

계약금을 넣고 4일만에 잔금을 치렀다. 등기부 등본은 물론, 집주인 얼굴도 직접 두 눈으로 보고 확인해야 한다는 ‘금과옥조’도 어기지 않았다. 그도 그럴 것이 방을 소개한 공인중개사 정모(54)씨 본인이 집주인이었기 때문이다. 오피스텔 1층 상가에서 10년 가까이 오피스텔 이름을 딴 ‘C 공인중개사’를 운영했다는 정씨가 사무실 프린터에서 뽑아다 넘겨준 등기부등본상 소유자도 정씨 본인이었다.

버스로 30분 거리에 있는 인하대 부근에서 자영업을 하던 하씨는 내친김에 운영하던 가게도 C 오피스텔 근처로 옮길 생각을 하게 됐다. 마침 C오피스텔 상가 자리 하나가 곧 자리를 비운다는 소식도 들려왔다. 하씨는 다시 C공인중개사를 찾았고, 이번에도 정씨 중개로 계약을 맺었다. 정씨는 상가 주인이 오랫 동안 자신과 잘 아는 사이라며 자신을 통해 월세를 내라 했다. 하씨는 한달 월세 145만원을 정씨 계좌로 넣었다.

C오피스텔에서 공인중개사 사무실을 운영했던 정모(54)씨는 2년간 47명을 속이고 24억 3,600여만원을 뜯어냈다. 홍인택 기자
◇”월세가 밀려요? 저는 전세인데요”

하씨가 "월세가 밀렸다"는 말을 들은 건 전세 계약 뒤 9개월이 지난 지난해 6월 21일이었다. 하씨가 오피스텔 건물 2층 주차장에 위치한 관리사무소 앞을 지날 때, 직원이 그를 불러 세웠다. "3XX호 월세가 세 달 밀려서 집주인에게 전화가 걸려왔다"고 했다.

"무슨 말씀이에요? 저 전세로 살고 있는데." 하씨는 머리가 멍해졌다. 아홉 달을 살았고, 1층에 점포까지 내면서 안면을 텄던 관리실 직원인데, 장난으로 거짓말을 할 만한 사이도 아니었다. 하씨는 당장 방으로 올라가 정씨 이름이 적힌 전세계약서를 직원에게 보여줬다. 상황은 관리실에서 등기부 등본을 인쇄하고 나서야 비로소 명확해졌다. 정씨의 이름은 4장짜리 등기부 등본 어디에서도 찾을 수 없었다. 

C오피스텔을 무대로 2년간 이어진 정씨의 사기 범행이 드러나는 순간이었다. 윤용석 C오피스텔 관리소장은 "집주인과 입주 상인들 사이에서 부동산 사장이 좀 이상해졌다는 소문이 돌았는데 그때서야 왜 그런지 드러났다"고 말했다. 정씨는 C오피스텔에서 오랜 기간 중개업을 하며 집주인들과 두터운 신뢰 관계를 쌓았다. 어느 날부터인가 "돈을 빌려달라"는 부탁을 주변에 하고 다니며, 무언가에 쫓기는 사람처럼 보인다는 얘기가 서너 달 전부터 C오피스텔 관계자들 사이에서 돌았다. 

[저작권 한국일보]공인중개사 정씨 전세 사기 사건 일지/ 강준구 기자/2019-10-21(한국일보)
[저작권 한국일보]범행개요/ 강준구 기자/2019-10-21(한국일보)

하씨는 곧장 '가짜 임대인' 정씨 사무실로 찾아갔다. '진짜 임대인' A씨도 곧장 정씨 사무실로 뛰어와 그간 연락이 닿지 않던 임차인과 처음으로 만났다. 삼자 대면으로 사실 관계는 더 명확해졌다. A씨에게 월세 계약을 위임 받아 놓고서는 집주인 행세를 하며 하씨에게 전세 보증금을 받은 이중 사기였다.

정씨는 자기가 보유한 다른 C오피스텔 매물 등기부에서 소유주 이름만 떼다가 붙이고는 이를 복사해 가짜 등기부 등본을 만들었다. 하씨가 사무실을 찾을 때 마다 갓 출력한 등기부 등본인양 건넸다. 출력 시점까지 적혀있는 등기부 등본에 하씨는 속을 수밖에 없었다. 정씨에겐 한가지 수법을 더했다. 범행용 휴대폰을 따로 만든 뒤, 집주인 A씨에게 월세 임차인 전화번호라고 속였고, 월세가 밀린 세 달간은 A씨 전화가 올 때마다 직접 받지 않고 '곧 입금하겠다'는 문자만 보냈다. 

인천중부경찰서. 홍인택 기자
◇”감쪽 같은 등기부…내가 세입자였어도 속았을 것”

경찰이 이 사건에 개입한 건 하씨나 A씨가 아니라 정씨 가족의 신고전화 때문이었다. 궁지에 몰린 정씨가 가족에게 전화했는데, 가족은 정씨가 하씨 등에게 감금당했다고 오해해 경찰에 신고한 것이다. 하지만 이날 저녁 체포된 것은 정씨였다. 현장에 도착해보니 정씨가 사기를 저질러왔다는 얘기를 전해 들은 피해자들이 몰려들었기 때문이다. 정씨의 범행은 한두 건이 아니었다.

정씨는 순순히 혐의를 인정했다. 인천중부경찰서 경제범죄수사팀 고지연(40) 경사는 정씨에 대해 "아주 공손한 태도로 연신 '죄송하다'고 이야기했고 굉장히 선해 보이는 인상이었다"며 “등기부 등본 또한 육안으로 봤을 때는 전혀 위조된 흔적이 보이지 않아 ‘내가 세입자여도 속았을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말했다.

조사 결과, 정씨의 범행은 선물 거래 때문이었다. 손실이 눈덩이처럼 커지자 이를 막은 돈이 필요했다. 계좌추적을 해봤더니 세입자들에게 뜯어낸 돈은 정씨 계좌로 들어간 뒤 곧바로 사라졌다. 검거 당시 정씨 계좌에 남은 돈은 10만원이 채 안됐다.

충격에 빠진 오피스텔 피해자들은 입주민 대책회의를 열었지만, 뾰족한 수는 없었다. 경찰 수사가 진행되면서 10억원 정도 예상된 피해액은 어느새 24억원 3,600여만원에 이르렀다. 정씨에 대한 1심 판결문을 보면 2016년 4월 2일부터 2년여 기간 동안 피해자는 47명이었다. 이들 각각이 C오피스텔의 전세 보증금 6,000만원 안팎을 뜯긴 셈이다.

47건 중 31건은 하씨 사례처럼 남의 오피스텔을 자기 것으로 속여 전세 보증금을 뜯어내는 방식이었지만, 정씨 본인이 실제로 소유하고 있는 오피스텔을 이용한 사기도 12건에 달했다. 선물 거래 때문에 빚에 시달리던 정씨의 오피스텔은 근저당권이 이미 전세 보증금 수준으로 설정된 ‘부실 매물’이었다. 그래서 등기부 등본의 근저당권 설정 현황을 통째로 지워버리고는 “설정된 물권이 전혀 없는 깨끗한 집”이라고 속였다.

정씨를 오랫동안 알아왔던 동네 사람들도 범행 대상이었다. 정씨는 이들을 상대로 ‘분양 받은 아파트 중도금이 필요해서’, ‘급매로 싸게 나온 오피스텔을 구입할 자금이 필요해서’ 등의 핑계를 대며 위조된 등기부 서류를 들이밀었다.

정모(54)씨는 등기부 등본 상 소유자나 근저당권 설정 항목을 위조해 피해자들을 속였다. 사진은 정씨가 실제로 보유했던 오피스텔의 등기부 등본 일부.
◇피해자 대부분은 사회 초년생 … 피해 회복 ‘0’

정씨는 사기, 공문서변조 등 혐의로 1심에서 징역 7년형을 선고받았다. 형이 무겁다며 항소했으나 대법원에서 최종 확정됐다. 이런 처벌과는 별개로 문제는 피해 회복이다. 정씨의 범행은 오피스텔 전세 매물이 귀하기 때문에 일어난 일이었다. C오피스텔 자치관리단 총무를 맡고 있는 정상문(58)씨는 “집주인은 월세를 원하기에 전세는 귀하다”며 “목돈을 쥔 세입자들은 전세를 원하기 때문에 거래가 활발했다”고 전했다. 윤용석 관리소장 역시 “피해자 대부분은 귀한 오피스텔 전세 매물을 얻게 됐으니 기뻐하면서 계약한 경우”라며 “그들 입장에선 겨우 모은 목돈인데, 세입자 전체가 받을 수 있는 공제액이 1억원뿐이라 피해 구제에 한계가 있는 현실이 마음 아프다”고 말했다.

피해 회복은 전무한 상태다. 43세대에 달하는 피해자 중에는 인근 병원에서 일하는 간호사나 인근 관공서 공무원 등 사회 초년생이 다수였으며 신혼 부부도 있었다. 하씨의 경우, 집주인 A씨의 배려로 여전히 C오피스텔에 살고 있지만 대다수의 피해자들은 거처를 잃고 주변으로 흩어진 상태다. 정씨 소개로 5,500만원 전세계약을 맺었던 최모(35)씨는 “사건 이후 진짜 집주인을 찾아가 월세보증금 500만원에서 정씨가 밀린 월세를 빼고 돌려받은 게 회복된 피해의 전부”라고 말했다. 세입자들이 정씨를 상대로 소송을 내 보증금을 받으란 판결이 났지만 정씨 주머니에 돈이 없으니 헛일이다. 몇 년을 기다려 모처럼 만든 목돈은 그렇게 사라졌다.

인천=홍인택 기자 heute128@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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