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30 세상보기] 믿을 수 없는 이야기는 없다

입력
2019.10.12 04:40
26면
‘믿을 수 없는 이야기’는 강간 피해자를 세상이 어떻게 바라보는지, 어떻게 그것을 없던 일 혹은 믿을 수 없는 일로 만드는지 고통스럽도록 자세히 보여준다. 여성의 말을 믿지 않는 사람들은 ‘강간 피해자=꽃뱀’이라는 등식이 진실이라고 생각한다. 사진은 ‘믿을 수 없는 이야기’의 스틸 이미지. 넷플릭스 제공
‘믿을 수 없는 이야기’는 강간 피해자를 세상이 어떻게 바라보는지, 어떻게 그것을 없던 일 혹은 믿을 수 없는 일로 만드는지 고통스럽도록 자세히 보여준다. 여성의 말을 믿지 않는 사람들은 ‘강간 피해자=꽃뱀’이라는 등식이 진실이라고 생각한다. 사진은 ‘믿을 수 없는 이야기’의 스틸 이미지. 넷플릭스 제공

한 십 대 여성이 밤 사이 집에 무단 침입한 남성에게 강간 당했다. 강간이 어떤 식으로 일어났는지, 그 일이 벌어진 다음 피해 여성이 어떻게 대응했는지 묻는 남자 경찰의 태도는 무신경하고 기계적이다. 수사는 본격적으로 시작되지만 경찰은 피해 여성에게 당시 상황을 반복적으로 묘사하게 만든다. 피해자 진술 내용은 매번 미묘하게 다르고, 경찰은 여성이 거짓말을 한다고 판단한다. 심지어 피해 여성의 위탁모까지 피해자의 예전 행동을 지적하며 원래부터 관심받고 싶어 하는 편이었으니 강간 당했다는 말도 거짓말일지 모른다고 주장한다. 18세 여성이, 강간을 당했다. 이 단순한 사실은 끊임없이 믿을 수 없는 이야기로 치부된다.

넷플릭스 오리지널 ‘믿을 수 없는 이야기’는 실화를 바탕으로 한 작품이다. 2008년 8월 워싱턴주 시애틀에서 18세 여성 마리가 강간을 당했지만 경찰은 믿지 않았고, 마리는 오히려 허위 신고자로 기소돼 벌금형을 신고받았다. 약 3년 후 다른 지역에서 두 여성 경찰에 의해 연쇄 강간범이 검거되며 마리의 이야기도 진실이었음이 뒤늦게 밝혀졌다. ‘믿을 수 없는 이야기’는 강간 피해자를 세상이 어떻게 바라보는지, 어떻게 그것을 없던 일 혹은 믿을 수 없는 일로 만드는지 고통스럽도록 자세히 보여준다. 이는 한국에서 여성이 강간을 포함한 성폭력을 당했다고 주장할 때 벌어지는 일들과 크게 다르지 않다. 얼마 전 한 남성 배우는 함께 일했던 여성 스태프들을 집으로 초대해서 함께 술을 마시고, 그들이 잠든 사이 성폭력을 저질렀다. 너무나 명확한 범죄 앞에서도 여성들의 증언에 귀 기울이기 보다 왜 바로 신고하지 않았냐고, 뭔가 얻어낼 게 있어서 거짓말을 하는 게 아니냐고 의심하는 목소리들이 있었다. 역시 성폭력 혐의로 구속된 또 다른 남성 배우는 피해 여성들을 ‘꽃뱀’으로 몰며 ‘너 같은 여자 말을 누가 믿겠냐’고 말했다고 한다. 성폭력에 관해서는 여성의 이야기를 믿어주는 사람이 드물다는 걸 가해 남성들조차 알 정도다.

여성의 말을 믿지 않는 사람들은 ‘강간 피해자=꽃뱀’이라는 등식이 진실이라고 생각한다. 성폭력 가해자들이 무고나 무혐의를 무기처럼 들고 나오는 것도 그 때문이다. 그런데 대검찰청과 한국여성정책연구원이 2017~2018년 무고죄 단일범 사건 중 피의자가 성폭력 피해자인 사건 1,190건을 연구 대상으로 삼아 분석한 결과, 성폭력 피의자 대비 성폭력 무고 피의자의 비율은 1%도 되지 않았다고 한다. 다만 성폭력 사건은 무고로 이어지기 쉬운데, 김정혜 한국여성정책연구원 부연구위원에 따르면 그 이유 중 하나는 ‘피해자에 대한 불신’이다.

다른 범죄보다 왜 특히 강간 사건 앞에서 많은 이들이 유난히 신중해지는 걸까? 다른 범죄 피해자에게도 그가 거짓말쟁이인지 아닌지 감별하려는 시선들이 이 정도로 따라붙을까? 성폭력 피해자가 충분히 위축돼 있지 않다고, ‘피해자 답지 않다’고 하는 말들도 나온다. 그러나 성폭력 가해자의 모습이 하나가 아니듯, 피해자의 모습도 하나가 아니다. 누군가는 진술을 할 때마다 횡설수설하고, 또 다른 누군가는 집에만 갇혀 사건을 곱씹기 보다 자신을 믿어주는 친구들과 함께 집 밖으로 나가보려고 한다. 강간은 인간이 저지르고 인간이 겪는 일이며, 인간은 한 가지 모습으로 고정된 존재가 아니기에 이 차이는 당연하다.

사건을 수사하던 여성 경찰, 그레이스 라스무센(토니 콜렛)은 너무나 이성적인(척하는) 태도를 보여주는 남성 수사 관계자들을 두고 말한다. “저 사람의 분노는 어디 갔어? 왜 아무도 이 범죄의 양상을 들여다보면서 세상 개지랄 같다고 말하지 않아?” 그렇다. 강간은 피해자의 태도를 보고 진실 여부를 감별해야 할 사건이 아니다. 피해자의 말을 믿고 그의 고통에 공감하며 함께 분노해야 한다.

황효진 콘텐츠 기획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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