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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티이미지뱅크.

최근 업계 안팎의 기대를 모은 임상시험에 실패한 한 생명과학 기업이 출입기자를 대상으로 설명회를 했다. 직전 단계 임상시험과 너무 차이가 나는 결과가 나와 임상시험을 중단할 수밖에 없었다는 설명과 함께 이 기업 대표는 환자들에게 개발 중인 약과 대조군으로 쓴 가짜 약(위약)이 뒤바뀌어 제공됐을 거라는 합리적인 의심이 든다고 했다.

대표는 그럼에도 수 백 억원이 드는 임상시험을 지속해야 할 근거를 제시했다. 이번 데이터 중 환자들이 임상시험에 성의 있게 임했다고 ‘판단한’ 부분을 ‘추려서’ 분석해보니 자사 약과 위약의 차이가 통계적으로 의미 있었다는 것이다. 대표는 “상당히 고무적인 이 데이터를 보는 순간 애통하기 그지 없었다”며 “그런 일(약이 뒤바뀐 것)이 없었으면 성공했을 임상이라 아쉬움이 크다”고 했다. “우수한 데이터를 중심으로 분석하면 약효가 더 뚜렷하게 나타난다”고 그는 강조했다.

이번 실패로 대표는 임상시험 환자 수 백 명을 ‘관리’하는 게 쉽지 않다는 걸 깨달았다고 했다. 그래서 다음 임상은 환자 규모를 100~160명 수준으로 줄이고 여러 건으로 나눠 진행하겠다는 계획을 밝혔다. “다국적제약사들이 그렇듯, 약효를 명백히 보여줄 수 있는 최상의 조건으로 임상시험을 할 생각”이라고 그는 덧붙였다.

설명회를 들으며 최근 세계 과학계의 화두인 ‘재현성의 위기’가 머릿속에 맴돌았다. 재현성이란 논문에 발표된 실험은 누가 언제 어디서 하든 같은 원료와 기기를 사용해 논문과 같은 방법으로 한다면 동일하거나 유사한 결과가 나와야 함을 뜻한다. 과학의 핵심 가치인 객관성과 정확성을 떠받치는 중요한 요소다. 재현되지 않는 실험은 엄밀히 말해 과학이라고 볼 수 없다.

재현성 확보에 실패하는 연구가 늘고 있다는 우려는 수년 전부터 제기돼왔다. 영국 과학학술지 ‘네이처’가 2016년 과학자 1,576명를 조사한 결과 다른 과학자의 실험을 재현하는 데 실패한 경험이 있다는 답변 비율이 70%를 넘었다. 학술지에 실린 논문이 뒤늦게 게재 철회되는 경우가 늘고 있다는 점도 이를 뒷받침한다.

재현성 확보 실패는 의학을 포함한 생명과학 분야에서 두드러진다. 세포나 조직처럼 불안정한 재료를 사용하는 데다 동물이나 사람 모두 개체별 생리조건이 천차만별이라는 특수성이 재현성 확보를 어렵게 만든다. 국내 한 이공계 대학 교수는 “동물실험 논문의 재현성 실패는 비일비재하다”며 “동물실험을 근거로 진행하는 임상시험에 천문학적인 돈이 들어간다는 점에서 재현성 위기는 이미 심각한 수준”이라고 경고했다. ‘획기적인 항암 신약’, ‘암 정복 지름길’ 같은 장밋빛 전망으로 수많은 연구가 이뤄졌지만 여전히 암이 난치병인 이유도 이와 무관하지 않다.

재현성 실패의 또 다른 원인은 연구자의 편향성이다. 과학자도 사람인지라 원하는 결과가 잘 나올 방향으로 데이터를 선택하고 해석한다는 것이다. 그렇게 해서 저명 학술지에 논문이 실리면 사회적 주목을 받고, 정부 연구비를 따는 데도 수월하다. 현 연구관리 시스템 안에선, 혹시 나중에 재현성 부족으로 논문 게재가 취소돼도 자신이 밝히지 않으면 그만이다.

따지고 보면 설명회를 한 기업은 선별해 해석한 데이터를 토대로 임상시험을 결정했고, 회사에 유리한 방향으로 임상시험을 설계하겠다고 한 셈이다. 획기적인 신약 개발로 이어진다면 큰 경사다. 하지만 환자들은 약을 늘 ‘최상의 조건’에서만 복용하지 않는다. 취사선택한 데이터가 부정적 결과의 의미를 흐릴 수 있고, 유리한 조건에서 한 임상시험 결과를 전체 환자에게 적용하는 건 무리일 수 있다. 주요 성분이 뒤바뀌었는데도 허가 받은 신약, 수 십 년 동안 복용해왔는데 뒤늦게 부작용 문제가 불거진 약 이면에 결과적으로 재현성 확보에 실패한 논문들이 존재했을지 모른다.

‘이 연구는 된다’는 믿음이 때론 합리적인 우려를 가리고, 재현성 실패를 불러올 수 있다. 재현성의 위기는 곧 과학 전체의 위기다.

임소형 산업부 차장 precare@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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