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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집은 ‘사고 파는 것’이기 전에 ‘삶을 사는 곳’입니다. 집에 맞춘 삶을 살고 있지는 않나요? 삶에, 또한 사람에 맞춰 지은 전국의 집을 찾아 소개하는 기획을 수요일 격주로 <한국일보>에 연재합니다.

3년 전 전북 전주시에서 제주로 이주한 건축주가 올해 2월 제주 중산간 지역 봉개동에 지은 주택은 붉은 벽돌집과 회색 벽돌집으로 구분된다. ©포머티브건축사사무소

강한 바람에 기껏 심었던 옥수수는 누워버렸다. 꾹꾹 눌러 심었던 콩은 물이 숭숭 빠지는 화산 토양에 삐쩍 말라 버렸다. 3년 전 전북 전주시에서 제주로 이주한 안인경(47)씨는 제주의 기후와 씨름하며 매일 아침저녁 6시간씩 밭일을 한다. 낮에는 본업을 한다. 그의 밭에는 고구마, 감자, 옥수수, 콩, 참깨, 들깨, 양파, 마늘, 생강, 상추, 토마토, 참외, 자두, 수박 등 1년 내내 무려 20종이 넘는 작물들이 자란다. 귤나무도 45그루나 심었다. 이 정도면 소농(小農)에 가깝다. 그는 “30대 때부터 시골에서 생업이 아닌 재미로 농사 짓는 게 꿈이었다”고 말했다. 생업이 아닌 재미에 방점이 찍힌다. 굳이 제주까지 와서 농사를 짓냐는 핀잔에는 “뭘 모른다. 제주의 사계절이 농사 재미를 한껏 더해 준다”고 답했다. 그에게 농사란 단순한 작물 재배가 아니다. 오랜 꿈이자 삶의 가치다. 그의 제주 농사 타령에 두 아이(15세, 13세)는 고개를 흔들었지만, 남편인 고동일(48)씨는 아내의 꿈을 전폭 지원했다. 농사를 지으려고 아이들을 설득해 제주까지 온 것도 모자라, 안씨 부부는 6년 전 사 뒀던 한라산 중턱 땅에 아예 집까지 지었다. 배(집ㆍ314㎡)보다 배꼽(밭ㆍ495㎡)이 더 큰 집은 올해 2월 중산간인 제주 봉개동에 완공됐다.

푸른 산 중턱에 들어선 높이 9m의 붉은 벽돌집은 교회처럼 웅장한 느낌을 자아낸다. ©포머티브건축사사무소
 
 ◇북향의 붉은 벽돌집 

밭일 좋아하는 촌부의 집이라 해서 소박한 오두막쯤을 기대하면 큰 오산이다. 푸른 산 중턱에 들어선 높이 9m의 붉은 벽돌집은 단박에 눈길을 사로잡는다. 허브와 갈대가 나부끼는 집 앞 정원은 이국적인 휴양지를 연상시킨다. 집은 크게 둘로 나뉜다. 한 걸음 앞에 나온 붉은 벽돌집과 이를 관통하듯 이어지는 낮은 회색 벽돌집이다. 설계를 맡은 포머티브건축사사무소의 고영성ㆍ이성범 건축가는 “경사진 대지의 형태를 고려하되 전망과 채광을 확보하기 위해 한쪽은 낮게, 한쪽은 높게 배치했다”고 설명했다.

집의 배치는 향(向)에 달렸다. ‘집은 남향’이라는 고정불변의 법칙을 깨고 집은 북쪽을 향했다. 제주 지형 특성상 중앙에 한라산이 있어 제주의 많은 지역들은 북쪽으로 땅이 경사진 북사면이다. 안씨가 매입한 땅도 1.5m로 높낮이가 달랐다. 고 소장은 “땅을 평평하게 만들 수도 있겠지만 밭과 정원 등 땅을 다양하게 이용하고자 하는 건축주의 삶의 방식을 고려해 경사를 그대로 이용해 집을 지었다”고 설명했다. 경사가 높은 남쪽으로 집을 두고, 슬로프처럼 내려오는 땅에 마당 겸 정원을 뒀다. 집의 오른편 오름을 제외하곤 집의 앞뒤로 다른 집이 들어오는 것도 고려했다. 이 소장은 “오름이 보이는 방향은 낮게, 외부의 시선이 들어오는 왼편은 높게 지었다”고 말했다. 회색 벽돌집(5m)과 붉은 벽돌집(9m)은 키 차이가 큰 친구가 어깨동무를 한 형상이다. 북향이지만 높낮이와 크기, 방향이 제각각인 창과 문으로 통풍과 채광도 확보한다.

높낮이가 다른 대지의 형태를 고려하고 채광과 전망을 위해 주택은 북쪽을 향해 있다. ©포머티브건축사사무소

외관상으로는 붉은 벽돌집이 회색 벽돌집을 압도한다. 회색 벽돌집은 유리 3면을 통한 오름 풍경으로 전세(戰勢)를 역전한다. 회색 벽돌집은 오름 전망을 위해 대지에서 1m가량 높이 떠 있다. 오름이 보이는 오른편 통유리창을 중심으로 양옆으로 최대한 늘려 3면이 유리창이다. 내부에서 창을 통해 보이는 한라산의 오름은 한 폭의 풍경화처럼 펼쳐진다. 시시각각 달라지는 제주의 풍경을 오롯이 느끼고자 했던 건축주의 요구에 따라 고 소장은 “집 안으로 제주의 자연을 최대한 끌어들이는 것이 설계의 초점이었다”며 “계절마다 달라지는 오름의 풍경과 저 멀리 바다까지 보이도록 시야를 거스르지 않고 넓게 확보하고자 했다”고 말했다. 눈 내리는 풍경, 꽃이 핀 풍경, 바람에 나뭇잎이 흩날리는 풍경 등 안씨는 집에서 찍은 오름 사진을 계절마다 건축가들에게 보낸다. 안씨는 “밭이 아닌 집에 있을 때도 창을 보면 제주에서 살고 있다는 게 실감난다”고 했다.

집의 오른쪽에 오름 전망을 확보하기 위해 회색 벽돌집의 3면을 유리창으로 마감했다. ©포머티브건축사사무소
전망을 위해 대지에서 1m 정도 띄우고 처마의 형태를 직선으로 내어 시원하게 제주 풍경을 감상할 수 있다. ©포머티브건축사사무소
3면이 유리창으로 된 2층 거실에서 사시사철 변화하는 제주 오름의 다채로움을 잘 느낄 수 있다. ©포머티브건축사사무소
 
 ◇미로 같은 동선으로 극적 효과 

현관은 붉은 벽돌집에 있다. 안쪽으로 깊이 파인 벽면의 아래 중앙부에 있는 현관은 비밀스럽다. 이 소장은 “현관은 공공 공간에서 사적 공간으로 들어가기 위한 전이 공간”이라며 “집에 들어가면서도 공간적 변화를 느끼고, 여러 켜를 통해 안락한 공간으로 들어가는 의미를 담고 있다”고 말했다.

현관 문을 열면 길고 좁은 복도가 이어진다. 복도는 각 공간에 극적 효과를 더해주는 장치와도 같다. 복도를 따라 걸으면 안방과 화장실, 세탁실이 순차적으로 나오고, 두어 번 코너를 꺾어 돌아 계단을 오르면 바람결에 춤추는 소나무 숲의 풍경을 마주하게 된다. 집의 중심인 거실이다. 고 소장은 “집의 풍경에도 완급 조절이 필요하다”며 “들어갔을 때 아파트처럼 집 전체가 다 보이는 헐렁한 공간보다는 다음에는 뭐가 나올까, 어떤 풍경이 펼쳐질까 기대할 수 있도록 긴장감 넘치는 미로 같은 동선을 짰다”고 설명했다.

길고 좁은 복도는 공간의 클라이맥스를 제대로 볼 수 있게 하기 위한 수단으로 작용한다. ©포머티브건축사사무소

거실에서 다시 좁고 긴 계단을 오른다. 계단은 붉은 벽돌집으로 이어진다. 계단 끝에는 각 층을 연결해 주는 층계참(層階站ㆍ스킵플로어)이 있다. 층계참에서 연결된 회색 벽돌집의 옥상으로 나가면 온몸으로 오름을 만끽할 수 있다. 층계참을 중심으로 반 층을 오르면 다락이 딸린 첫째 방이 있다. 반대로 층계참에서 반 층을 내려가면 바다를 조망할 수 있는 둘째 방이 나온다. 이 소장은 “독립 공간들이지만 바깥에서 집에 들어와 방으로 가려면 부모의 방과 거실 등을 차례로 지나야 해 가족 구성원들이 서로 접촉할 기회가 많아진다”며 “그러면서 아이들이 지루하지 않게 산책하듯이 집 안을 다닐 수 있도록 했다”고 말했다. 제주 이사를 반대했던 도시의 아이들은 이제는 숲을 거닐고, 별을 바라보는 산골 소년소녀가 됐다.

주택 3층 층계참에서 반 층을 오르면 첫째 아이 방이, 반 층을 내려가면 둘째 아이 방이 나온다. 외부는 회색 벽돌집 옥상으로 연결된다. ©포머티브건축사사무소
고추나 콩 등 작물을 말리는 용도로 주로 사용되는 회색 벽돌집의 옥상. 제주 풍경을 온몸으로 느낄 수 있다. ©포머티브건축사사무소

안씨와의 대화는 도로 원점이다. 집에 사는 것만으로도 제주를 누리기에 바쁠 터. 고된 밭일은 적당히 할 만도 한데 그는 단호했다. “제주에 산다는 건, 자연에 귀를 기울이는 일이에요. 단순히 바라보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아요. 매일 흙을 만지고, 바람을 느끼고, 나무를 심고, 햇빛을 쬐고, 밭을 일구죠. 제게 집은 촌스럽지만 옹색하게 살지 않기 위한 삶의 공간입니다.”

제주=강지원 기자 stylo@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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