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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 학문 공동체의 위기] <2> ‘연구노동자’ 신세의 학문후속세대
서울 중구 한국일보 본사에서 학문후속세대인 송초롱(32ㆍ왼쪽)씨와 김동민(29)씨가 불합리함이 뿌리 박힌 학계의 관행에 대해 털어놓고 있다. 홍윤기 인턴기자

“대학원 첫 수업 시간의 충격이 아직도 잊히지 않는다. 전공 필수과목인데 수업 교재가 ‘위키피디아’였다.”

최근 수도권 한 대학원에서 인문학 석사학위를 받은 송초롱(32)씨. 서른 넘어 받은 석사 학위가 자랑스럽지 않다. 이 학위를 받기 위해 한 학기 등록금 450만원에다 생활비를 벌기 위해 행정조교를 세 개씩 뛰었고, 밤 시간을 쪼개 공부하느라 하루에 3시간도 잠들지 못했다.

청춘을 갈아 넣는 만큼 꿈에 다가가는 거라 애써 믿었지만 내내 찜찜했다. 과연 학비에 걸맞은 교육을 받고 있는가, 회의감이 떠나지 않았던 탓이다. “교수들이 20년 전 교재를 가져와 20년 전 예시를 들며 가르쳤다. 바뀔 의지도, 가능성도 안 보였다.”

목 마른 자가 우물을 파야 했다. 최신 연구들을 접하기 위해 학회를 전전했다. 거기서도 믿고 따를 만한 젊은 선배가 눈에 띄지 않았다. 논문 주제를 고를 때가 되자 지도교수는 자기 분야 연구 이어받기를 암암리에 강요했다.

송씨 연구실에서는 성폭력 사건도 있었다. 더 심한 피해를 당한 학생들은 모두 쉬쉬하며 졸업했는데, 정작 신고한 그만 2년 동안 학교를 떠나 있어야 했다. 들려오는 소식이라곤 가해자가 ‘성폭력 교육 이수’ 정도의 가벼운 처분만을 받았다는 얘기뿐이었다. 송씨는 지금 미국 유학을 준비 중이다.

수도권의 한 대학원에서 도시공학 박사과정을 밟고 있는 김동민(29)씨의 목표도 방문연구생 신분으로 해외 대학에 가는 것이다. 학문의 질적 수준은 물론, 석사 과정 중에 자퇴해야 했던 예전 학교의 악몽 때문이다. 그곳에서 김씨는 박사과정생들에게 맞거나, 좁은 연구실에 감금당하기도 했다. 이게 어떻게 말이 되느냐고 호소해도 나서는 이는 없었다.

송씨는 단언한다. “한국으로 되돌아올 생각은 전혀 없다.” 단지 한국 내 ‘정규직’ 교수 자리가 적기 때문만은 아니다. 척박한 연구 풍토와 후진적 연구실 문화를 극복할 자신이 없다는 게 더 큰 이유다.

[저작권 한국일보]교수 갑질 사례. 박구원기자
◇‘학문후속세대’…일할 땐 ‘노동자’, 돈 받을 땐 ‘학생’

학자를 꿈꾸는 젊은 연구인력 ‘학문후속세대’가 한국을 떠나고 있다. 송씨나 김씨처럼 국내에서 석ㆍ박사 과정을 밟다가 돌연 유학을 떠나는 이들은 매년 늘어나는 추세지만 제대로 집계조차 되지 않는다. 2017년 스위스 국제개발연구원의 ‘세계인재보고서’에 따르면 한국은 ‘두뇌 유출’ 항목에서 63개국 중 54위였다. 자국 인재, 해외 인재 모두 놓치고 있다는 얘기다.

한국에서 ‘학생연구자’는 학생인 동시에 노동자란 이중성을 띤다. 2015년 과학기술정책연구원 조사에 따르면 연구과제에 투입하는 시간이 주당 20~40시간인 학생연구원은 10명 중 6명에 달한다. 연구과제는 대개 국가나 기업에서 발주하는 ‘연구용역’이다. 미국 유학생이 주당 평균 13시간, 일본 유학생이 평균 7시간인 것과 비교하면 국내 학생연구원들은 개인연구에 투자할 시간부터 턱없이 부족하다.

특히 이공계 대학원생 연구는 국책과제와 상호의존적이라 참여 여부 결정은 전적으로 교수의 권한이다. 김씨는 “간혹 학생들의 의사를 묻는 교수들이 있지만 극소수일 뿐”이라며 “자기 마음에 드는 프로젝트만 여러 개 따와 동시다발적으로 시켜도 학생들은 군말 없이 따를 수밖에 없는 게 연구실 분위기”라고 말했다.

일 시킬 땐 노동자이지만, 돈을 나눌 땐 학생이다. “대학원생들은 현금 출납기”란 자조 섞인 우스갯소리도 나오는 이유다. 김씨는 “어느 학교나 연구 프로젝트 인건비가 들어오는 날이면 대학원생들이 현금인출기 앞에 긴 줄을 서는 진풍경이 벌어진다”고 말했다. 각자의 통장으로 입금된 인건비를 다시 인출해 연구실에 반납하기 위해서다. 그는 “연구실 행정비로 쓰기 위한 공금 명목”이라며 “심한 경우 들어온 인건비의 절반가량을 반납하라는 곳도 있었다”고 설명했다.

서울 중구 한국일보 본사에서 만난 학문후속세대 김동민(29)씨와 송초롱(32)씨. 홍윤기 인턴기자
◇교수가 가로채고, 교수 아들딸이 가로채고

교수를 정점으로 ‘포스트닥터-박사생-석사생’으로 이어지는 연구실 내 피라미드 구조에서 가장 밑바닥인 석사 연구원은 프로젝트 전반에 참여하고도 저자로 이름을 올리지 못하는 경우가 허다하다. 김씨는 “석사 1년 차 시절 연구실 보고서의 80% 이상을 직접 썼지만 단 한 개의 프로젝트에도 이름이 안 들어갔다”며 “기여가 전혀 없어도 고참 박사생들의 이름이 우선적으로 올라가는데 그렇게 되면 석사생들의 이름은 가장 먼저 잘려 나간다”고 말했다.

인문사회계열의 사정도 별반 다르지 않다. 저자 순위를 정하는 데 합의된 기준이 없어 교수 개개인의 양심이나 인성에 기댄다. 인문학 석사논문을 쓴 송씨는 “교수의 기여도가 20%만 넘어도 1저자로 올라가고 석사생의 이름이 2저자로 밀리는 걸 숱하게 봤다”고 말했다.

김진균 한국비정규직교수노조 성균관대 분회장은 “많은 교수가 질은 담보하지 않은 채 ‘양 불리기’로만 연구결과를 내다 보니 학계 전반의 생태계가 위협받는 상황”이라며 “날림으로 쓴 논문들이 쏟아져 나오면서 정작 좋은 연구는 주목받기 힘든 게 현실”이라고 지적했다.

논문에 대한 권한을 교수가 전부 쥐고 있다 보니 조국 법무부 장관 딸의 ‘의대 논문 제1저자 논란’ 같은 일도 비일비재하다. 지난 5월 성균관대 약학대의 이모 교수는 대학원생들이 쓴 논문을 자신의 딸이 혼자 작성한 것처럼 저자를 바꿔치기해 검찰에 구속되기도 했다. 김씨는 “자녀를 친한 동료 교수 연구실에 밀어 넣어 다른 학생들의 연구에 이름만 올리는 식으로 실적을 만들어주는 걸 직접 목격했다”고 했다.

강태경 전국대학원생노조 수석부지부장은 “이공계에선 여러 연구생을 헐값에 실험에 동원하다 보니 참여하지 않은 이들의 이름을 슬쩍 끼워 넣는 게 상대적으로 어렵지 않다”며 “워낙 자주 있는 일이라 제대로 된 실태조차 파악된 게 없다”고 말했다.

◇‘전근대성’에 갇혀 늙어 가는 학계, 학문의 대가 끊긴다

교수가 전권을 쥐고 흔드는 ‘도제식’ 연구실 구조는 학문후속세대의 앞길을 막은 주요 원인 중 하나로 꼽힌다. 수십 년간 지적이 반복된, 해묵은 문제지만 교수 각자가 ‘개인사업자’처럼 운영하는 폐쇄적인 연구실 특성상 공론화가 힘들다. 2015년 국가인권위원회 조사에서도 대학원생 10명 중 6명 이상(65.3%)이 부당한 대우를 당했을 때 “그냥 참고 넘어간다”고 대답했다. 교수뿐 아니라 고참 연구원들에 의한 갑질과 폭행, 성폭력 문제도 빈번하다. 이 또한 그저 숨기고 쉬쉬하다 지나간다. 교수의 권한이 졸업은 물론, 이후의 진로에까지 막대한 영향을 끼치기 때문이다.

교수와 학생연구원 간 ‘갑을 관계’는 졸업 이후까지 끈끈하게 이어진다. 연구실이란 작은 왕국에서 복종부터 배운 연구생들은 학계에 진출해도 교수들과 학문 성과로 동등하게 어깨를 견주지 못한다. 영원히 ‘장인과 문하생’의 관계다. 대학의 교원 임용 과정에서 개인의 연구성과나 학문적 역량보다는 ‘인맥’이 더 크게 작용한다는 점도 무시할 수 없다. 국내 학계에서 다양한 학문연구가 태동할 수 없는 중요한 배경이다.

국내 학계의 전근대성은 ‘학자 양성의 외주화’로 이어지고 있다. 너도나도 유학을 탈출구로 삼는다. 국내 학자들조차 국내에서 받은 학위 가치를 쳐주지 않다 보니 ‘어떤 교수가 유학을 많이 보냈나’로 세평이 갈리는 현실이다.

민주화를위한전국교수협의회 상임공동의장인 강명숙 배재대 교수는 “우리 대학이 채택하고 있는 ‘강좌제’ 자체가 주교수-부교수-연구생의 수직적 구조라 이것부터 깨야 한다”며 “교수가 절대적 권력을 가진 구조를 개혁해야 학문공동체 전반의 건강성이 회복될 것”이라고 말했다.

박지윤 기자 luce_jyun@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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