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덕현 칼럼] 타인이 지옥이 되지 않으려면

입력
2019.10.03 18:00
29면
‘타인은 지옥이다’라는 드라마는 에덴고시원이라는 공간에서 벌어지는 엽기적이고 충격적인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드라마를 보면서 젊은 시절 소설을 쓰겠다며 고시원에 들어갔던 기억이 떠올랐다. 발을 뻗고 누우면 딱 들어맞는 그 곳에서 합판 같은 걸로 대충 나눠놓은 방들은 프라이버시라는 게 전혀 지켜지지 않았다. 밤에 잠자리에 누우면 옆방에서 들려오는 미세한 숨소리까지 넘어왔다. 드라마 ‘타인은 지옥이다’ 포스터. OCN 제공
‘타인은 지옥이다’라는 드라마는 에덴고시원이라는 공간에서 벌어지는 엽기적이고 충격적인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드라마를 보면서 젊은 시절 소설을 쓰겠다며 고시원에 들어갔던 기억이 떠올랐다. 발을 뻗고 누우면 딱 들어맞는 그 곳에서 합판 같은 걸로 대충 나눠놓은 방들은 프라이버시라는 게 전혀 지켜지지 않았다. 밤에 잠자리에 누우면 옆방에서 들려오는 미세한 숨소리까지 넘어왔다. 드라마 ‘타인은 지옥이다’ 포스터. OCN 제공

최근 방영되고 있는 ‘타인은 지옥이다’라는 드라마는 에덴고시원이라는 공간에서 벌어지는 엽기적이고 충격적인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주머니 사정이 여의치 않아 값싼 고시원을 찾다 6개월만 참아보자고 들어간 고시원이 하필이면 주인 아주머니부터 같이 사는 이웃들까지 모두 이상하다. 알고 보니 이곳은 연쇄살인범에 발찌를 찬 강간범, 게다가 길고양이를 죽여서 유기하는 이상한 행동을 하는 인물이 진을 치고 ‘먹잇감’이 들어오길 기다리는 곳이다. 주인공 윤종우(임시완)는 그들의 이상한 시선과 말과 행동들에 불편함을 느끼고 불쾌해하다가 점점 치밀어 오르는 분노로 살의까지 느끼게 된다.

드라마를 보면서 젊은 시절 소설을 쓰겠다며 고시원에 들어갔던 기억이 떠올랐다. 발을 뻗고 누우면 딱 들어맞는 그곳에서 합판 같은 걸로 대충 나눠놓은 방들은 프라이버시라는 게 전혀 지켜지지 않았다. 밤에 잠자리에 누우면 옆방에서 들려오는 미세한 숨소리까지 넘어왔다. 컵라면이라도 먹으면 여지없이 냄새가 풍겨왔고, 누군가 찾아와 거의 귓속말에 가깝게 속삭이는 말들도 마치 내 귀에 대고 하는 말처럼 들려오곤 했다. 내가 그랬던 것처럼 고시원은 고시생들만 있는 게 아니었다. 하루 벌어 하루 먹고사는 일일 노동자들도 있었고, 드라마 속 주인공처럼 무작정 상경해 당장 지낼 곳이 없어 고시원에 들어온 이들도 있었다. 공통점은 주머니 사정이 여의치 않다는 것. 오죽하면 프라이버시조차 없는 곳에서 잠을 청할까.

나중에 사회생활을 하며 생각해보니 프라이버시 같은 자기만의 공간이 있는가 없는가는 그 사람의 위치를 말해 주는 것이라는 걸 깨달았다. 예를 들어 군대에서 고참은 내무반을 온전히 자기 방처럼 마음껏 쓰고 자신만의 지정된 자리에 누군가 넘어오는 걸 허락하지 않지만, 신참에게는 내무반 어디도 자기 공간이라 편히 등 붙일 곳이 없다. 직장생활도 마찬가지다. 중역들은 자기만의 방을 갖고 있는 경우가 많지만 대부분 직장인은 공개된 공간에서 알게 모르게 누군가 훅 넘어 들어오는 경계를 허락하며 살기 마련이다. 그러고 보면 사람들이 아등바등 일하게 되는 가장 큰 동인이 바로 그 누구도 넘어올 수 없는 경계를 지닌 자신만의 공간을 차지하기 위함이 아닐까. 우리가 아파트와 그 평수에 집착하고 또 자동차가 있는가 없는가를 묻고, 있다면 어떤 차를 끄는가를 묻는 건 결국 그만의 공간을 얼마나 확보하고 있는가를 묻는 일이다. 그 사람의 위치가 거기서 판가름 난다는 듯이.

가난은 경계의 침범을 허용한다. 이건 모두가 가난했던 70년대 우리가 살아왔던 풍경들을 떠올려보면 쉽게 이해된다. 짝꿍과 가운데 선을 그어가며 “넘어오면 내 꺼”라며 내 경계를 지켜내려 했던 이유는 경계 없이 두 사람이 함께 앉게 되어 있던 책상 때문이었다. 지금은 학생당 하나씩의 책상이 주어지지만. 한 반에 60명이 넘는 학생이 모여 지내고, 등굣길과 하굣길 콩나물시루 같은 버스에 서로의 몸을 밀착한 채 시간을 보내다 보면 타인과의 경계는 둔감해진다. 어디 신체적 경계만일까. 입만 열면 차별적이고 폭력적인 언사들을 툭툭 내놓지만 선생님이라는 이유로, 어른이라는 이유로 당연하게 받아들여지고, 심지어 체벌을 해도 ‘사랑의 매’가 되던 시절이다. 넘어서지 말아야 할 언어적 경계도 깨지고, 정서적 경계도 깨지는 일이 다반사였다. 게다가 가족도 예외는 아니었다. 가족을 위한 일에 개인이 자신의 경계를 내주는 일은 당연한 일로 받아들여졌다. 우리 사회는 어디든 서열이 매겨지고 그 위치의 높낮이에 따라 높은 이들은 자신의 경계가 지켜졌지만 낮은 이들은 무시로 경계가 무너졌다. 이런 위계적 체계는 가족 내에서는 가부장제로, 사회에서는 이른바 가족 경영으로, 국가에서는 상명하복 시스템으로 공고하게 자리잡았다.

하지만 그 생존을 걱정했던 시기를 지나 이제 모두가 행복하고 차별 없이 살아가는 세상을 꿈꾸는 지금, 우리는 빈부나 지위, 나이에 상관없이 저마다 ‘자신만의 공간’을 지켜줘야 하는 새로운 문화를 만들어가는 일이 시급해졌다. 이른바 ‘경계 존중의 문화’라 일컬어지는 것이 그것이다. 경계 존중의 문화는 먼저 나와 타인 사이에 서로 지켜야할 경계가 있다는 것이 전제다. 그래서 함부로 그 경계를 넘어갈 수 없고 넘기 위해서는 사전에 양해를 구해야 한다. 특히 최근 사회적 이슈가 되고 있는 성폭력 예방 차원에서 ‘경계 존중 교육’이 주로 이뤄지고 있지만, 필자의 생각으로는 이 경계 존중이 하나의 예절이자 매너 문화로 일상에 자리 잡혀야 한다고 본다. 떠올려보면 강남역 살인사건 같은 불행한 일이 발생한 것도 경계가 존중되지 못한 남녀 공용 화장실이라는 공간과 그 문화가 일정 부분 영향을 미친 것이라 볼 수 있다. 하지만 이런 심각한 사건들이 아니라도, 일상 속에서 부지불식간에 겪게 되는 많은 불쾌한 경계 침범을 ‘예의 없는 행동’으로 받아들이는 문화는 시급하다. 더 이상 타인이 지옥이 되지 않기 위해서.

정덕현 대중문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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