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6.5℃] 금리보단 재정

입력
2019.09.27 04:40
30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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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6.5℃’는 한국일보 중견기자들이 너무 뜨겁지도 너무 차갑지도 않게, 사람의 온기로 써 내려가는 세상 이야기입니다.

게티이미지뱅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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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민주당 정부에서 재무장관과 백악관 국가경제위원회 의장을 역임한 래리 서머스 하버드대 교수는 올해 초 “앞으로 2년 안에 세계적 차원의 경기 침체가 올 가능성이 있다”고 경고했다. 자신의 지론인 장기침체(secular stagnation) 임박론의 수위를 높인 것인데, 이를 뒷받침하려는 논리의 최신판이 ‘실질 중립금리가 마이너스에 가까워졌다’는 것이다. 중립금리란 경제가 균형상태(잠재성장률 수준의 성장세, 완전고용 수준의 실업률, 중앙은행 목표치 수준의 안정된 물가)에 있을 때 자금 공급(저축)과 수요(투자ㆍ소비)를 일치시키는 금리로, 실질 중립금리는 명목금리에서 물가상승률을 뺀 수치다.

서머스는 최근 루카스 레이첼 런던정경대 교수와 함께 발표한 논문에서 미국의 실질 중립금리가 지난 30년간 3%포인트 이상 낮아져 제로(0) 수준에 근접했으며, 정부의 적자 재정 정책이 없었다면 이미 상당폭의 마이너스 수준으로 떨어졌을 거라고 분석했다. 금리는 결국 돈의 가격이므로, 중립금리의 지속적 하락은 수요보다 많은 돈의 공급, 다시 말해 ‘과잉저축’이 심화하고 있음을 뜻한다. 서머스는 특히 민간 부문에서 자금 수요가 위축되며 과잉저축이 만연하고 있다고 지적한다. 저출산, 불평등 심화, 수명 연장에 따른 은퇴기간 증가로 소비가 줄어들고, 투자 또한 경제의 구조 변화와 불확실성 확대로 내리막이라는 것이다. 투자와 소비는 고용 감소를 매개로 서로를 깎아 내리는 악순환 고리를 형성한다.

서머스가 보기엔 낮아진 금리는 경제가 구조적 요인으로 활력을 상실하면서 자연스레 잉여 자금이 양산된 결과다. 이런 관점에선 과잉저축을 초래하는 경제 구조에 대한 개선책이 선행되지 않는다면 금리를 더욱 낮춰 유동성을 확대하는 방식의 부양책은 별다른 효과가 없다는 결론에 닿게 된다. 서머스는 나아가 선을 넘은 통화 완화 정책은 자산가격 거품을 키우며 경제를 위기로 내몰 수 있다고 지적한다.

실질 중립금리가 마이너스로 내려앉을 경우 장기침체가 현실화할 수 있다고 경고하며 서머스가 제언하는 해법은 적극적인 확장 재정 정책이다. 정부가 복지 확대와 소득분배 강화를 통해 고령층이나 빈곤층의 소비 여력을 늘려주고 사회간접자본(SOC) 확충을 통해 생산성을 향상시키는 방식으로 지출을 늘려 민간 영역의 과잉저축을 흡수해 중립금리 수준을 끌어올려야 한다는 것이다. 시장의 독과점 구조를 타파해 경쟁을 촉진하고 기업 투자에 인센티브를 부여하는 방식으로 민간투자를 활성화하는 것도 정부의 책무다. 서머스는 이 과정에서 정책 당국자들이 재정 적자를 보다 열린 자세로 감내해야 한다고 주문한다.

미국을 대상으로 한 서머스의 분석과 진단을 우리나라에 단순 적용하긴 힘들겠지만, 서머스가 거론한 장기침체 징조들이 한국 상황과 상당 부분 겹치는 것은 분명하다. 실질 중립금리 하락은, 한국은행이 비록 구체적 추정치를 밝히지는 않지만 기꺼이 인정하는 바다. 경제 균형 상태를 상정한다는 점에서 중립금리와 밀접한 관련이 있는 잠재성장률을 한은이 최근 하향 조정한 점도 중립금리 하락을 간접적으로 확인할 수 있는 대목이다.

미국에서 과잉저축을 유발하는 자금수요 위축은 우리나라에서 2년째 증가율(전분기 대비)이 1%를 넘지 못하고 있는 민간소비 증가율과, 금융위기를 기점으로 10년째 이어지고 있는 민간기업의 투자 감소로 현실화한 형국이다. 더구나 저금리 환경에서 풍부해진 유동성이 부동산 시장으로 대거 몰려들어 주택가격을 앙등시키는 현실은 역으로 민간저축이 생산성 높은 투자처를 찾지 못하는 한국 경제의 현주소를 고스란히 드러낸다.

우리나라 역시 정부가 한은 이상으로 경제 활력 되살리기를 주도해야 할 시점이 아닌가 싶다. 더구나 경제 구조 곳곳의 비효율을 개선하는 일은 통화정책이 엄두를 내기 힘든, 재정ㆍ산업정책의 고유 영역이기도 하다. 그런 점에서 ‘국가채무비율 40% 사수’처럼 다분히 도그마적인 논쟁에 갇혀 있던 재정정책이 정부의 전향적 자세로 경기 부양의 최전선에 나선 점은 다행스러워 보인다.

이훈성 경제부 차장대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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