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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켈광산 절반 정지시켰다가 환경장관 10개월 만에 쫓겨나

※ 세상을 뜬 이들을 추억합니다. 동시대를 살아 든든했고 또 내내 고마울 이들에게 주목합니다. ‘가만한’은 ‘움직임 따위가 그다지 드러나지 않을 만큼 조용하고 은은하다’는 뜻입니다. ‘가만한 당신’은 격주 월요일 <한국일보>에 연재됩니다.

지나 로페즈는 2017년 필리핀 니켈광산 절반 이상인 28곳을 무더기로 문닫게 하고, 75건 신규 사업 허가를 전격 취소했던, 환경운동가 출신 전 자원환경부 장관이다. 그는 필리핀 최대 민영 미디어 그룹 ABS-CBN의 상속자지만, 정치도 사업도 가문 중심으로 이뤄지는 필리핀에서, 10대 말부터 사회 봉사를 시작했고 90년대 이후 반(反) 자본 반 개발 환경운동에 매진했다. ABS-CBN 재단 사진.

지구 환경 문제의 최대 아이러니는, 수세기 동안 가장 많은 해악을 끼친 국가들이 이제 뭘 좀 해보려는 국가들을 이런저런 국제조약으로 규제하고 욱대긴다는 점이다. 이러나저러나 기후 상황 등이 워낙 절박해서 모두가 따라야 한다는 게 딜레마다. 아마존 우림을 태워 ‘환경 깡패’라는 비난을 듣는 브라질은 그 아이러니에 화를 내온 경우다. 숲을 태운 건 ‘깡패 짓’이 맞고, 그게 주민 이익을 위한 것도 아니지만, 브라질 정부 논리로는 밀림 동식물에서 세수가 생길 리 없고, 백날 ‘지구 허파’노릇을 한들 무역수지가 개선될 리도 없다. 유럽과 북미의 이른바 환경 선진국들, 다시 말해 누적적으로 지구환경에 부담을 지워온 어느 한 국가도, 산소 같은 환경 재화나 탄소순환의 생태 서비스에 대한 합당한 비용을 낸 적 없고, 내겠단 소리도 빈말로라도 한 적 없다. ‘아마존 개발’은 ‘브라질의 트럼프’라고 국제사회가 조롱하는 현 대통령 자이르 보우소나르의 대선 공약이었다.

저런 아이러니와 딜레마에 짓눌려 독이 오른 국가에서는, 환경운동이 목숨 걸고 해야 하는 일이다. 광산도 숲 개발도 다 돈이어서 자본은 사병들까지 고용해 울타리를 지킨다. 열에 아홉은 부패한 정치ㆍ행정 권력과 범죄조직이 얽혀 있다. 환경 인권 감시 국제 NGO인 ‘Global Witness’의 2016년 보고서 ‘On Dangerous Ground’에 따르면, 2015년 한 해 동안 16개국 185명의 환경운동가가 살해 당했다. 국가별로는 브라질이 50명으로 가장 많고 필리핀이 33명, 콜롬비아가 26명이었다. 164명이 숨진 지난해 ‘환경운동이 가장 위험한 국가’는 30명이 희생된 필리핀이었다.

필리핀은 조금 묘한 나라다. 얼마 전 한국이 ‘수출’한 플라스틱 쓰레기를 집어던지듯반송해 자국민에게 통쾌감을 준 일이나, 환경 회복을 위해 보라카이쯤 되는 국제 휴양지를 6개월씩 전격적으로 폐쇄해버리는 조치 등은, 물론 ‘쇼’에 능한 현 대통령 두테르테의 영향이 크지만, 환경 정의에 대한 국민적 열의가 그만큼 뜨겁다는 방증도 된다. 7,000여 개의 섬으로 이뤄진 필리핀은 기후변화에 취약하다. 마닐라 같은 대도시 시민도 대부분 본가나 외가 처가 어느 한 곳은 어업이나 농업에 종사하기 때문에, 환경은 말 그대로 생계ㆍ생존의 문제다. 그래서 굵직한 환경 이슈가 불거지면 또 뭔가 구린 일이 있나 의심부터 하게 된다는 이들도 있을 정도다.

지나 로페즈(Gina Lopez)는 두테르테 정부 초대 자원환경부 장관이다. 그는 강ㆍ유역 살리기 캠페인, 탄광 개발 저지ㆍ폐쇄 운동 등에 20년 넘게 앞장서 온 운동가 출신 장관이었다. 또 그는 필리핀 최대 미디어ㆍ엔터테인먼트 그룹인 ABS-CBN그룹 창업자의 7남매 중 장녀이자, 현 회장의 동생이다. 94년 ABS-CBN그룹 재단 이사장이 된 뒤 재단 내 환경재단(Bantay Kalikasan)을 신설했고, 97년부터는 가정 폭력 등으로 학대 받는 어린이들을 위한 미디어 기반 긴급 구호 서비스(Bantay Bata 163)를 벌여 세계로 확산시키기도 했다. 그의 환경장관 지명에 필리핀 환경ㆍ인권단체는 물론이고 정부 반군인 ‘신인민군(NPA)’까지 환영 의사를 밝혔다. 두테르테의 정적인 필리핀 공산당 창당 주역 호세 마리아 시손(Jose Maria Sison)도 “공산당의 반 광산 노선과 부합한다”고 논평했다.

재임 중 로페즈는 국내 41개 광산 중 28곳을 환경법 위반 등 혐의로 영업정지 행정명령을 내렸고, 75건의 신규 개발 사업을 환경영향평가 미비 등을 들어 승인 취소했다. 그는 노천광과 하천 및 바다 인근 유역 탄광을 원천적으로 불법화하고자 했다.

그는 취임 10개월 만인 2017년 5월 의회 인사위원회(Commission of Appointments) 불신임 표결(16대 8)로 해임됐다. 상ㆍ하원의원 각 12명으로 구성된 인사위원회는 대통령이 임명한 각료를 불신임할 수 있는 헌법적 권한을 지닌다. 표결 직후 로페즈는 “정부가 거대자본에만 봉사한다면 가난한 이들은 어디서 희망을 찾으란 말이냐”며 분노했다.(cnnphilippines.com) 이미 많이 가진 자들이 욕심만 덜 내면 환경도 살고 마을과 시민들도 가난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게 그의 소박하고도 이상적인 신념이었다. 뇌암을 앓던 그가 8월 19일 복합장기부전으로 별세했다. 향년 65세.

2016년 7월 1일, 장관(서리) 취임 첫날 로페즈의 첫 지시가 광산들의 환경관련 법령 준수 여부를 전수 조사하라는 거였다.(news.abs-cbn.com) 광산 위법 실태와 수법이라면 지긋지긋하게 봐왔고, 시위도 고발도 숱하게 해본 그였다. 앞서 그는 재단과 함께 유네스코 세계자연문화유산으로 지정된 관광ㆍ농어업 지대인 팔라완 섬의 니켈 광산 개발 중지 캠페인을 벌여 약 4년간 1,000만 명의 서명을 받아낸 적도 있었다. 물론 광산은 건재했다.

광산 무더기 영업정지와 신규사업 승인 취소라는 전례 없는 조치가, 2017년 4월 그렇게 내려졌다. 필리핀 니켈 연간 산출량의 약 절반, 세계시장 공급량의 8~10%가 줄게 됐다. 외신은 두테르테 못지않게 로페즈를 주목했다.

필리핀 자원환경부(DENR)가 항공 촬영한 민다나오 섬 북부 수리가오 델 노르테(Surigao del Norte) 해안 주석광산. 로페즈는 심각한 토양 수질 오염원인 노천광산과 유역 광산을 원천 불법화하고자 했다. e360.yale.edu

광산업계는 사활을 걸고 로비하고 저항했다. 일자리 23만 4,000개가 일시에 사라져 가족들까지 생계가 막막해졌고, 여파가 연관산업으로 확산돼 최소 120만 명이 피해를 입을 것이라고 업계는 주장했다.(NYT) 행정 절차 위반과 직권 남용 행정소송도 잇달아 제기했다. 여론도 격렬히 엇갈렸다. 라테라이트 같은 니켈광 중금속에 논밭을 망치고 갯벌과 어장을 잃은 주민들은 당연히 환영하며 기존 피해의 보상을 요구했고, 광산 마을 주민들은 일자리도 주고 마을에 학교와 보건소도 지어준 광산업체에 대한 “부당한 탄압”에 거세게 항의했다. 필리핀 정부는 세수 약 700억 페소를 포기해야 했다. 두테르테는, 적어도 겉으로는 로페즈를 편들었다. 그는 항의하는 광산업계를 향해 “XX새끼들(Son of Whores), 니들이 해놓은 짓을 봐라.(…) 우리 그 돈(세수) 없이도 살 수 있다”고 말했다고 한다.

로페즈 청문회는 2016년 11월과 이듬해 3월, 두 차례 결론 없이 정회됐다. 표결 유예는일종의 자제권고(혹은 경고)였겠지만, 로페즈는 쫓겨나기 전에 노천광과 유역 탄광을 원천 불법화하겠다며 오히려 속도를 냈다. 인사위원회는 2017년 5월 3일 로페즈를 불신임했다. 표결 전 로페즈는 위원회의 한 유력 의원을 향해 이렇게 말했다.“의원님 동생이 운영하는 광산입니다. 당연히 의원님도 그 광산이 20년 넘게 채굴해온 사실을 알고, 거대한 산 하나가 사라진 사실도 알고, 그 모든 게 불법이란 사실도 알 것입니다. 당신들이 산을 살해한 것입니다.” 로페즈는 청문회장을 나서며, 지지자들과 함께 자기 애창곡인 R.켈리의 노래 ‘I Believe I Can Fly’를 합창했다. 광업 전문가인 필리핀대 경제학자 시엘로 마그노(Cielo D. Magno)는 “로페즈는 광산 환경 문제에 대한 경각심을 극적으로 불러 일으켰고, 향후 광업과 관련한 결정의 기준을 마련했다”고 평했다.

ABS-CBN은 1953년 개국해 케손시티 본사 외에 전국 25개 직영국과 지역별 71개 TV국을 보유한 필리핀 최대 민영 미디어 그룹이다. 지나 로페즈(Regina Paz “Gina” Lopez)는 그룹 창업자 유제니오 로페즈(Eugenio M. Lopez Jr.)와 전 독재자 마르코스의 인척인 중국계 거부 라오(La’O) 가문 출신 어머니 콘치타 라오(Conchita La’O)의 7남매 중 둘째(장녀)로 1953년 12월 27일 태어났다.

로페즈는 어려서부터 영적으로 예민한 아이였다고 한다. 2016년 에세이에 그는 “자전거를 타고 교회 아침 미사에 참석하는 게 내 유년의 일과였다. 하지만, 기성 종교 조직 안에는 내가 찾고자 하던 게 없었다. 나는 더 깊은 무언가를 원했다”고 썼다. 그 ‘무언가’를 그는, 미국 보스턴 뉴턴 칼리지 유학 중 한 요가 계파(Ananda Marga) 수행처에서 발견했다고 한다. 그는 ‘인류에 대한 봉사가 신을 섬기는 길’이라는 계파의 지침에 따라, 1년 만에 유학을 멈추고 귀국해, 곧장 옷 가방 하나 달랑 들고, 만류하는 가족을 외면한 채 요가 전도자의 길을 나섰다. 그게 18세 때였다. 만 20년 뒤 귀국할 때까지 그는, 집도 절도 없는 가난한 요가 수행-전도자로서 포르투갈과 인도, 아프리카의 여러 나라를 떠돌았다. “케냐에서만 6년을 지냈고, 그 중 2년 남짓은 줄 서서 물을 배급 받고 화장실도 엉망인 슬럼지역에서 살았다. 나는 거기서 물의 가치를 절감했다. 들통 하나로 하루 종일 먹고 씻고, 속옷까지 빨아야 했다.”(rogue.ph)

요가 수행자는 독신서약을 지키고 교단 명령에 무조건 복종해야 했다고 한다. 그건 ‘사람은 규칙이 아니라 원칙을 좇아야 한다’는 그의 소신과 맞지 않았다. 하지만 ‘파계’의 결정적 계기는 케냐 나이로비의 한 상급자(Sona Roy)와 사랑에 빠진 거였다. 그는 첫 아이를 임신하면서 90년대 초 귀국했다. 부부는 아들 둘을 낳고 8년 만에 이혼했다.

‘반타이 바타(Bantay Bata, Guard for children) 163’은 1997년 밸런타인 데이에 맞춰 출범했다. 구타 등 아동학대 사례를 보거나 겪은 이가 ‘163번’으로 전화를 걸면 연중 24시간 경찰과 구호단체 활동가가 출동해서 아이를 구하는 긴급구호 프로그램이다. 어느 날 TV에서, 부모에게 맞아 숨지는 아이들 다큐멘터리를 본 뒤 ‘뭐든 해야겠다’고 결심해서 벌인 일이었다. 동생 베르타(Berta의) 말처럼 로페즈는 아이처럼 순진하고 충동적이고 즉흥적인 데가 많았다. 그래도 될 만큼 그는 부유했고, 재단도 든든했고, 가문도 인적 네트워크도 짱짱했고, 무엇보다 소신과 용기가 남달랐다. 로페즈는 그걸 “만일 내가 먼저 계산을 하고 계산에 맞춰 살았다면 나는 나 자신을 용서하지 못했을 것”이란 말로 표현했다.‘반타이 바타 163’은 현재 필리핀 국내 10여 개 도시에 지부와 ‘어린이 마을’이란 이름의 보호시설을 둔, 교육과 의료ㆍ법률 서비스 상설 조직으로 성장했다.

그와 그의 환경재단은 2009년, 메트로마닐라를 관류하는 시궁창 같은 파시그(Pasig) 강 살리기에 나서 6년 만에 47개 지류 중 17개의 수질을 개선, 2014년부터 페리 운행을 재개할 수 있게 했다. 아키노 3세 정부는 2010년 ‘파시그강 재생위원회’를 만들어 로페즈에게 의장을 맡겨 연 100억 페소의 예산을 지원했다. 2015년 로페즈는 “2019년까지 모든 지류와 본류를 되살릴 수 있다”고 장담했다. 강 재생계획에는 강가 주민 2,000여 가구 이주 프로그램이 포함돼 있었지만, 폭력적인 반발이 단 한 건도 없었다. 장관 시절 그는 필리핀 정부 최초로 현안 지역 원주민 대표단과의 포럼을 만들어 운영했다.

그가 쫓겨난 지 5개월 뒤인 2017년 10월, 자원환경부와 재무부 협의기구인 광산개발위원회(MICC)는 모든 광산 영업정지 명령을 철회하고, 승인 취소된 사업들도 전면 재검토할 것이라고 발표했다. 로페즈는 “한 마디로 역겹다. 그들은 악마에게 자신들을 팔았다. 그게 내 진심이다.(…) 이 땅의 광산 개발 역사는 고통의 역사였다. 소수의 시민이 잠깐 일자리를 얻겠지만, 그 비용은 수많은 이들이 긴 세월 동안 치르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manilatimes.net)

ABS-CBN의 환경-여행 프로그램 G-Driaries의 진행자 로페즈. 그는 환경자원만 잘 지키고 보존하면 마을도 주민들도 가난에서 벗어날 길이 열리리라 믿었다. tfc.tv

로페즈는 여러 매체에 칼럼을 썼다. 지난해 4월 한 칼럼에서 그는 싱가포르 등과 필리핀을 비교하며 “수많은 멋진 산과 화산과 산호초와, 단위 면적당 지구 최대의 생명 자원을 보유한 필리핀이 왜 늘 가난해야 한단 말이냐”고 반문하며 “함께 노력하면 우리도 할 수 있다”고 썼다. 그는 2017년 6월 ABS-CBN의 에코투어 프로그램 ‘G-Diaries’를 신설, 직접 진행자로 데뷔했다. 그의 목표는 필리핀 자연을 세계에 소개하고, 그 값어치를 주민들에게, 필리핀 시민들에게 알리는 거였다. 그는 그 해 중앙-지방정부 등과 함께 시작한 지역환경-경제프로젝트 공모 지원사업 ‘ILOVE(Investment in Loving Organizations for Village Economies)’도 시작했다.

로페즈는 필리핀 환경운동가들의 리더이고, 후원자이고, 심리적 보루이고, 물리적 방패였다. 그는 두테르테를 좋은 지도자라고 말하곤 했지만, 두테르테를 최악의 독재자라고 여기는 이들도 로페즈는 두둔했다. 사회사업가 출신 전 상원의원 밤 아키노(Bam Aquino)는 “로페즈는 필리핀의 새로운 환경 전사(warriors) 세대를 낳았고, 시민들에게 공적 가치와 연대의 의미를 일깨웠다”고 말했다.(bbc.com) 로페즈는 “우리는 스스로 작고 보잘것없다는 생각에 사로잡힌 채 살아왔다. 하지만 당신이 스스로 작다고 여기면 생각도 작아지고, 꿈도 작아지고, 할 수 있는 일도 작아진다. 우리는 결코 작지 않다. 우리는 우리가 날 수 있다고 믿어야 한다”고 말했다. 최윤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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