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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80> 묵재를 찾은 손님과 정학초의 죽음 
아암유고 표지 사진. 정민 교수 제공
 ◇묵재를 찾은 윤규렴 

다산은 제자 이정의 집에 얹혀 산 1년 8개월간이 그다지 편치 않았던 듯하다. 아니면 훗날 사제 간에 벌어진 모종의 불미스런 사태로 인해 그에 관한 기억 자체를 말소하고 싶었던 걸까. 다산의 기록에서 묵재 시절이나 이정에 대한 구체적 언급은 좀체 찾기가 어렵다.

1807년 4월에 금호(琴湖) 윤규렴(尹奎濂)이 묵재로 불쑥 다산을 찾아왔다. 그는 다산보다 몇 살이 어렸고, 외가 쪽으로 먼 친척이었다. ‘금호 윤규렴이 와서(琴湖尹奎濂至 금호윤규렴지)’란 작품에 이때 다산의 심경이 남아 있다.

궁한 살림 곤핍해서 손님 맞이 성가신데 (窮居畏約厭人過 궁거외약염인과)

눈물 젖어 서로 보니 그대를 어이하리. (沾灑相看奈爾何 첨쇄상간내이하)

말세라 가깝던 이 흙처럼 내버려도 (末路交歡如棄土 말로교환여기토)

문채로운 집안이라 남은 물결 보는구나. (故家文采見餘波 고가문채견여파)

유하혜가 세 번 쫓겨남 슬퍼함을 못 들었고 (不聞展季悲三黜 부문전계비삼출)

굴원이 구가(九歌) 지음 제대로 배웠구려. (頗學靈均作九歌 파학령균작구가)

어이해야 원림 얻어 이웃에 집 짓고서 (安得園林卜隣近 안득원림복린근)

남은 볕 함께 얼려 다정히 보낼거나. (盡將餘景共婆娑 진장여경공파사)

손님이 찾아와도 제대로 접대하기 어려운 열악한 상황이었다. 어렵게 먼 길을 찾아온 손님을 마주 보며 서로 눈시울을 적신다. 예전 가깝고 살갑던 벗들은 안부를 묻는 편지조차 끊어진지 오래다. 이 팍팍한 염량세태에서 옛정을 기억해 나를 찾아준 그대가 고맙다. 그냥 서로 이렇게 이웃으로 지내며 왕래할 수 있다면 이곳이 곧 낙원일 것만 같다.

윤규렴은 아암 혜장과도 진작부터 가까운 사이였다. 혜장의 ‘연파잉고(蓮坡剩稿)’에 실린 ‘윤금호를 그리며(懷尹琴湖 회윤금호)’란 시에 “그대와 나 둘이 다 총각 시절에, 남사(南寺)에서 도학 얘기 나누었었지. 신분 잊은 사귐을 이미 맺고서, 의기 맞아 서로 함께 마음 끌렸네(伊余總丱歲 이여총관세, 南寺話道畊 남사화도경. 已結忘形契 이결망형계, 意氣共相傾 의기공상경)”란 구절이 나온다. 또 “지난 해 호젓한 절 가운데서, 만났을 젠 안면이 생소했었지. 이름 묻곤 그제야 알아보고서, 너무 기뻐 눈물 콧물 흘러 내렸네(往歲蕭寺中 왕세소사중, 相逢顔面生 상봉안면생. 聞名方始覺 문명방시각, 喜極涕泗零 희극체사령)”라고 했다.

젊어 알고 지내던 두 사람은 오래도록 소식이 끊겼다가, 우연히 백련사에 들른 윤규렴이 혜장과 만나 뒤늦게 서로를 알아보고 기뻐한 사연을 담았다. 그 후로 두 사람은 편지를 자주 주고 받았고, 윤규렴은 세 번이나 혜장을 더 찾아왔었다. 그 혜장을 통해 다산과 묵재의 거처 이야기를 듣게 된 윤규렴이 예고 없이 다산을 방문했던 것이다.

‘아암유고’에는 혜장이 윤규렴에게 보낸 짤막한 편지 6통이 실려 있다. ‘답금호(答琴湖)’ 6수가 그것이다. 그중 한편은 이렇다. “아침에 참선을 마치고 문득 일어나 쾌년각(快年閣) 위에 앉아 좋은 차 한 사발을 마시고, 위응물의 시 몇 편을 읊조리니, 이 또한 절로 산가(山家)의 맑은 일이올시다. 돌이켜 세간의 영화로운 이름과 이록(利祿)을 생각하려니 덧없기가 마치 흐르는 물이나 시든 꽃이어서 붙들고 즐길만한 것이 못되더군요.”

또 이런 내용도 있다. “편지를 받잡고 어루만지노라니 마니보주(摩尼寶珠)가 따로 없습니다. ‘밤 고요해 물은 찬데 고기는 물지 않아, 배 가득 밝은 달빛 싣고서 돌아오네.’ 이것은 선종의 오묘한 경지입니다. 보내오신 글 속에 담긴 심상한 꽃과 새도 모두가 선어(禪語)라서 참으로 보배롭다 하겠습니다.” 글이 맑아 운치가 높다.

윤금호에게 보낸 편지가 실린 면. 정민 교수 제공
 ◇정학초의 갑작스런 죽음 

1807년 7월 19일, 형님 정약전의 아들 정학초(丁學樵ㆍ1791-1807)의 부음이 전해졌다. 17세의 아까운 나이였다. 정약전은 아들 넷을 두었지만, 중간에 모두 잃고 남은 것이 이 아들 하나뿐이었다. 게다가 그는 어려서부터 놀라운 천재성을 보여 집안의 기대를 한 몸에 모으고 있던 터였다.

다산은 학초가 세상을 뜨기 전 정약전에게 흑산도로 보낸 편지에서 “금년 봄에 물어온 한두 조목의 내용을 보니 경악할만했습니다. 제 생각에 올 가을 이곳에 오게 해 가르치면서 겨울을 나고, 내년 봄에 흑산도로 뵈러 가서 4, 5개월 간 모시다가 돌아간다면, 반드시 그 애를 개발시켜 길을 얻게 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학유도 거취를 함께 하고 싶은데 어떠실런지요”라고 썼다.

정약전이 편지를 받고 답장했다. “학초가 보내온 10여편의 시부(詩賦)를 보았네. 학연이 윤색해주지 않았는데도 이미 문장의 바탕을 갖추었으니 걱정할 필요가 없지 싶네. 또 그 애의 어미가 편지에 쓰기를 ‘올 봄 이후 형과 아우가 친동기처럼 밤낮 떨어지지 않는다’고 썼더군. 이와 같다면 내가 다시 무엇을 근심하겠는가. 내가 기뻐서 잠이 오질 않네. 올 가을 데려오는 논의는 내가 권하지도 막지도 않으려네. 다만 모자의 뜻대로 하게 한다면 용기를 내겠지만 여러 의논들이 많이들 말려 반드시 이루어지지는 못할 걸세. 만약 남쪽으로 온다면 얼마나 기쁘겠는가.”

정학초는 이후 관례를 치르고 혼인을 마쳤다. 이어 강진에 들렀다가 흑산도로 아버지를 찾아 뵙기 위해 준비를 하던 중 갑작스레 병을 얻어 세상을 떴다. 다산은 ‘정학초묘지명’의 명사에서 “학문을 좋아했으나 명이 짧아 죽었으니, 하늘이 나를 자르고, 하늘이 나를 망쳤네(好學而短命死 호학이단명사, 天祝予天喪予 천축여천상여)”라며 탄식했다. 다산은 정학초를 자신의 학문적 후계자로 생각하고 있었다.

다산은 1808년 5월에 두 아들에게 준 ‘시이자가계(示二子家誡)’에서 “내가 1802년 봄부터 저서를 업으로 삼아 붓과 벼루를 곁에 두고 밤낮으로 쉬지 않아, 왼쪽 팔에 마비가 와서 마침내 폐인이 되었다. 눈도 갑자기 어두워져서 안경에만 의지하고 있으니 이 같은 것은 어째서겠느냐. 너희와 학초가 있어 능히 전하여 가르쳐서 실추하지 않을 것으로 여겼기 때문이다. 이제 학초는 불행하게 일찍 죽었고, 너희들은 영락하여 함께 하는 벗도 적고, 성품마저 경전은 좋아하지 않고 그저 후세의 시율(詩律)이나 거칠게 알아 대충 음미하는 형편이라, 진실로 ‘주역’과 ‘상례’ 두 책은 마침내 없어져서 세상에 드러나지 못하게 되겠구나”라고 탄식했다.

다산은 평소 자신의 두 아들이 학문보다는 시문에 관심이 더 많은 것을 못 마땅해했고, 그래서 학문의 기대를 온통 학초에게 걸고 있던 터였다. 학초의 갑작스런 죽음은 다산과 정약전 두 사람 모두에게 큰 충격을 안겨주었다. 정약전은 깊은 상심으로 몸져눕고 말았다. 당시 정약전은 열악한 흑산도 유배지에서 들인 소실에게서 갓 두 돌 지난 서자를 하나 더 두고 있었다. 그의 이름은 학소(學蘇)였다. 나중에 개명해서 족보에는 학무(學武)로 나온다.

 ◇윤종하와 다산, 그리고 혜장 

넉 달 뒤인 1807년 8월에는 역시 외가 쪽 먼 친척인 윤종하(尹鍾河)가 묵재로 다산을 찾아왔다. 윤종하의 고조부가 다산에게는 외증조부가 되었다. 그는 일찍이 다산의 서울 집 죽란(竹欄)으로 찾아와 가깝게 지냈던 벗이었다. ‘보슬비에 국화를 마주하며 공윤에게 보이다(小雨對菊花示公潤 소우대국화시공윤)’란 작품에 그나마 묵재의 주변 풍경이 어렴풋이 남아 있다.

시의 내용으로 보아, 가을을 맞은 묵재의 마당 한 켠에는 국화가 피어있었다. 처마 끝에 시렁을 내달아 습기를 막았고, 울타리 쪽에는 지난 5월에 심은 대나무 몇 그루가 있었다. 풍경은 쓸쓸했고, 두 사람의 처지는 적막했다. 시 중에 “시든 넝쿨 성(城) 구멍에 드리워졌고, 찬 조수는 나무 위로 올라오누나(敗蔓垂城眼 패만수성안, 寒潮上樹頭 한조상수두)”라고 한 구절이 있다. 묵재는 강진 읍성이 올려다 보이고, 조수가 밀려드는 갯가에서 그다지 멀지 않은 곳이었던 것 같다.

‘또 공윤에게 주다(又贈公潤 우증공윤)’란 시에서는 두 집안의 얽힌 내력과 그 가문의 불우를 담담히 적었다. 그는 공재 윤두서의 손자 윤운(尹惲)의 9남 중 다섯째로 서울 시절 다산과 자주 왕래했던 윤지눌, 윤지범과는 형제간이었다. 그 중 한 대목만 추려본다.

그댈 보니 눈물이 턱에 흐르고 (對汝涕交頤 대여체교이)

애달픈 한 폐부에 얽히는구려. (哀恨纏肺腑 애한전폐부)

외손인 나도 시들고 영락하여서 (外孫且凋零 외손차조령)

부평초로 남녘 땅에 떨어졌다네. (萍梗落南土 평경락남토)

문자는 굶주림을 구제 못하여 (文字不救飢 문자부구기)

목숨만 실낱같이 남아 있구나. (命存僅如縷 명존근여루)

외로이 남은 형제 거의 없어서 (孑然鮮兄弟 혈연선형제)

그대가 울타리 되어 주길 바라나, (望汝或禦侮 망여혹어모)

흉년이라 열 식구 곤궁도 해서 (荒年困十口 황년곤십구)

약한 몸에 병까지 걸리었구려. (脆質纏二竪 취질전이수)

그나마 탕약이 효과가 있어 (湯藥幸有驗 탕약행유험)

지황으로 보양을 하고 있다네. (地黃賴滋補 지황뢰자보)

당시 윤종하는 황달을 앓아 요양차 귤동에 머물고 있었다. 혜장은 윤종하와도 가깝게 지내던 사이였다. ‘아암유고’에 ‘답윤공윤(答尹公潤)’이라 한 짧은 편지 6통이 따로 실려 있다. 그 중 한 통은 내용이 이렇다.

김의원이 들른 참에 황달병이 있음을 알고서 놀라 염려함을 이기지 못하였습니다. 집사께서 평소에 망령되이 부처님을 배척하다가, 오늘에 스스로 장육금신(丈六金身)이 되고 말았으니 스스로를 살피기에 어떠하신지요. 하하! 이번에 여러 승려들을 시켜 인진쑥을 캐어다가 올립니다. 빈도 또한 마땅히 며칠 뒤에 가서 뵙지요.

평소 윤종하가 혜장에게 불교를 배척하는 말을 서슴지 않더니, 자신이 막상 황달에 걸려 몸뚱이가 황금빛 부처가 되고 보니 기분이 과연 어떠냐고 했다. 보통 허물없는 사이가 아니고는 주고받기 힘든 내용의 편지다.

묵재로 다산을 찾아온 윤규렴과 윤종하는 다산은 말할 것도 없고 아암 혜장과 전부터 가깝게 지내던 사이였다. 윤규렴은 혜장을 만나러 왔다가 다산을 찾았고, 윤종하는 그 후 요양차 백련사 너머 귤동에 머물고 있던 터였다. 인연이 인연을 부르고, 우정이 우정을 엮어 이제 다산의 초당 시절이 서서히 마련되고 있었다.

정민 한양대 국문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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