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평선] ‘삭발’과 ‘반삭’

입력
2019.09.15 18:00
수정
2019.09.16 10:23
30면
이언주 무소속 의원(왼쪽)과 박인숙 자유한국당 의원. 연합뉴스
이언주 무소속 의원(왼쪽)과 박인숙 자유한국당 의원. 연합뉴스

패션 전문지 보그(VOGUE)는 2017년 7월호에 ‘삭발, 나도 해볼까’라는 기사를 실었다. 같은 해 3월에 게재된 특집기사의 제목은 ‘삭발에 빠진 여자들’이었다.

7월호 기사의 첫머리는 이렇다. “이번에 한 머리 정말 맘에 안들어. 날씨도 더운데 확 잘라버릴까. 이왕 자를 거면 트렌디하게 밀어보세요.” 넉 달 전 기사는 ‘긴 머리를 싹둑 자르고 엄청난 파워를 얻게 된 스타들’을 다뤘다. 우리 사회에선 아직까지도 낯설지만 여성의 삭발은 이미 시류를 타는 하나의 ‘헤어스타일’로 자리 잡았다.

□ 뭉뚱그려 ‘삭발’이라고 표현하지만 실제로 두피가 보일 정도의 삭발(tonsureㆍ톤슈어)은 흔치 않다. 삭발은 그리스인들이 머리카락을 잘라 신에게 바치는 의식에서 비롯된 것으로 추정된다. 그리스식 삭발은 머리카락을 전부 밀어버리는 것으로, 동양권도 대체로 비슷하다. 고대 로마에서는 가장자리만 남기고 정수리를 모두 밀었다. 머리카락을 일정한 길이로 남겨 놓고 자르는 것은 반삭(buzz cutㆍ버즈컷)이다. 미용 전문가들은 보통 6~12㎜를 많이 권한다는데 보그에 실린 사진은 죄다 반삭이다. 우리나라 남성들은 대부분 군대에서 ‘까까머리’를 경험한다.

□ 역사적으로 삭발 의식은 종교적ㆍ정치적 권위와 맞닿아 있었다. 요즘은 치료나 미용 목적의 삭발도 많고, 때로는 예술적 퍼포먼스로도 확장된다. 근대 이후 정교(政敎) 분리의 일반화로 종교적 권위는 줄었지만, 사회적 약자들의 투쟁 수단으로 정치적 상징화하는 경우는 오히려 잦아졌다. 대개는 ‘(반)삭발한 자’가 자유ㆍ평등ㆍ인권ㆍ공정ㆍ정의를 요구하는 저항의 주체이지만, 2차 대전 후 프랑스 레지스탕스가 나치 부역 여성들을 (반)삭발했을 때처럼 정반대의 경우도 있다. 인종차별주의와 국수주의, 폭력이 연상되는 ‘스킨헤드’도 마찬가지다.

□ 추석연휴 목전에 야당 여성 국회의원 두 명이 잇따라 ‘반삭’을 했다. 조국 법무장관 임명으로 사회 정의와 민주주의가 무너졌다고 한다. 독과점 정유회사 법무팀을 이끌었던 한 의원은 학교 급식 노동자들을 ‘밥하는 동네 아줌마’로 비하했고, 의사 출신 다른 의원은 친인척 보좌진 채용 논란에 공개 사과한 바 있다. 공히 ‘철새 정치인’이기도 하다. 어떤 정의를, 어떤 민주주의를 말하는 걸까. 얼마 후면 공천 논의가 시작될 텐데 이들의 ‘버즈컷’이 동료 의원들의 자녀 논란에 묻힐까 안쓰럽다.

양정대 논설위원 torch@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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