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왕실의 취향] 문예를 주도했던 효명세자는 학과 돌을 사랑했다

입력
2019.09.21 04:40
13면

※ 조선왕실이라 하면 치열한 궁중암투만 떠올리시나요. 조선의 왕과 왕비 등도 여러분처럼 각자의 취향에 따라 한 곳에 마음을 쏟았습니다. 문화재청 국립고궁박물관 학예사들이 그간 쉽게 접하지 못했던 왕실 인물들의 취미와 관심거리, 이를 둘러싼 역사적 비화를 <한국일보>에 격주 토요일마다 소개합니다.

<2> 21세로 요절한 예술애호가 효명세자

'동궐도' 속 효명세자의 주요 처소인 연영합 앞에 구리 학과 괴석이 놓여 있다. 동아대학교박물관 제공
'동궐도' 속 효명세자의 주요 처소인 연영합 앞에 구리 학과 괴석이 놓여 있다. 동아대학교박물관 제공

순조와 순원왕후의 맏아들인 효명세자(1809~1830)가 성장한 19세기 전반은 정조가 이룩한 문예부흥의 성과가 지속된 시기였다. 순조의 배려와 정치적 고려로 효명세자는 학문과 문예적 역량이 탁월한 문신들의 보좌를 받았다. 정조대 문예부흥의 토양 속에서 배출된 이들이었다.

효명세자의 측근으로는 서예의 대가인 추사 김정희와 그의 아버지 김노경, 김정희와 더불어 금석문의 대가이자 서예로 이름 높았던 조인영, 김정희의 동지로 서화에 능했던 권돈인 등이 있었다. 비록 정치적으로는 견제의 대상이었지만 효명세자의 외조부 김조순과 외숙부 김유근 또한 시문과 서화에 뛰어난 인물이었다.

어린 시절부터 남달리 총명했던 효명세자는 당대 최고 문신들의 보좌를 받으며 짧은 생애에도 문예군주 정조에 버금가는 문예적 성취를 이룩할 수 있었다. 그는 당대 최고급 문화 예술과 취향을 앞서서 받아들이고 유행을 주도하기도 했다.

조선후기 경화사족(서울 근교에 거주한 명문 가문)은 도시에서도 산림에 은거하는 것과 같은 성시산림(城市山林)을 추구했다. 집 주변 경승지나 한적한 곳에 소박한 거처(별서ㆍ 別墅)를 짓곤 했다. 효명세자도 궁궐 한복판에 단청을 칠하지 않은 단아하고 소박한 집과 정자를 조성했다. 이곳에서 그는 왕세자란 무거운 짐을 잠시 내려놓고 고동서화를 감상하고 시를 창작하는 등 문인으로서 고아한 삶을 영위했다. 산거(山居)라는 이상도 구현했다. 현재 창덕궁 후원에 자리한 의두합(또는 기오헌)은 독서인이자 문화인이었던 효명세자의 고아한 취향을 잘 보여주는 건물이다.

서울 종로구 창덕궁 의두합 전경. 국립고궁박물관 제공
서울 종로구 창덕궁 의두합 전경. 국립고궁박물관 제공

의두합과 연경당을 제외하고는 효명세자와 관련된 건물 대다수는 현존하지 않는다. 다행히도 효명세자의 대리청정기(1827년 2월~1830년 4월)에 제작된 궁궐도의 걸작 ‘동궐도’에 이들 건물의 모습과 이름이 상세히 담겨 있다. ‘동궐도’는 창경궁과 창덕궁을 위에서 내려다보듯이 그린 그림으로 국보 제249호다.

‘동궐도’ 중앙에는 왕세자 효명의 교육과 정치, 생활 공간인 동궁 권역이 펼쳐져 있다. 공식 집무 공간인 중희당 뒤편으로 효명세자의 대표적 처소인 연영합이 있었다. 대청마루 기둥 사이엔 연영합 편액이, 동서로 천지장남지궁(天地長男之宮)과 학몽합(鶴夢閤) 편액이, 서편의 누각에는 오운루(五雲樓) 편액이 걸려 있다. 건물의 공간별로 달리 지은 집 이름들은 효명세자의 다양한 자의식을 보여준다. 천지장남지궁은 ‘천하의 장남’인 세자가 사는 거처임을 나타낸다. ‘다섯 가지 구름의 누각’을 뜻하는 오운루는 세자가 거처하는 공간의 상서로움을 강조한다. ‘학을 꿈꾸는 집’이란 의미의 학몽합은 비록 궁궐이지만 산속에 은거하고 싶어하는 세자의 마음을 드러낸다.

효명세자는 학과 돌 같은 자연을 소중히 여겼고, 시 창작의 중요한 소재로 삼았다. 그는 자신의 호(號)를 학석(鶴石), 자신의 시집을 ‘학석집(鶴石集)’이라 지었다. 학과 돌을 유난히 사랑했음을 알 수 있는 대목이다. 연영합 앞뜰에는 구리로 만든 학과 괴석이 마주한 채 쌍으로 배치돼 있다. 효명세자는 이 한 쌍의 구리 학을 주제로 다음과 같은 시를 짓기도 했다.

교묘한 솜씨는 흡사 귀신이 새긴 듯 하고

화려한 나비는 등왕(滕王ㆍ벌과 나비를 잘 그린 당나라 황족 이원영)의 솜씨처럼 신묘하네.

맑기는 마음 깨달은 부처 같고

고요하기는 수행하는 스님 같네.

몸은 푸른 옥탑에 머물러 두고

깃은 구리 철사로 묶어 두었네.

산수 사이에 노닒도 헛된 꿈 되었으니

응당 들판의 학들에게 미움을 받고 말리.

효명세자가 지은 시집 '학석집'.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제공
효명세자가 지은 시집 '학석집'.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제공

대리청정기에 효명세자를 가까이에서 보좌한 신하 김정집(1801~1859)도 세자의 부름을 받고 연영합에 갔을 때 이 학을 감상하고 시를 지었다. 그의 시는 구리 학의 “입적한 승려와 같은 고아한 품위”와 “회화보다도 나은 그림자 형상”을 높이 평가했다.

효명세자는 연영합의 누각에 올라 앞뜰에 세워진 구리 학과 괴석을 창밖으로 내려다보며 즐겨 감상한 것으로 보인다. ‘동궐도’에는 학몽루 편액이 걸려 있는 누각이 있는데, 이곳은 한때 학석루(鶴石樓)로 칭해졌다. 효명세자가 쓴 ‘학석의 작은 모임에 대한 짧은 서문(鶴石小會小序 학석소회소서)’에서 확인할 수 있다.

“거문고와 술동이가 좌석에 널려 있으니, 황홀하게도 난정(蘭亭)에서 열린 계모임과 닮았고, 그림과 책이 시렁에 가득하니 흡사 서원(西園)의 고상한 모임과 같다. 두 마리의 학이 뜨락에서 깃을 너울거리고, 묵은 바위는 우뚝이 방문 앞에 서 있다. 이 누각을 학석(鶴石)이라 이름을 지은 것은 과연 합당하도다.”

이 글은 효명세자가 자신을 보좌하는 세자시강원 관원들과 학석루에서 모임을 갖고선 썼다. 누각에는 거문고와 술동이가 널려 있고 시렁에 그림과 책이 가득하며 창밖의 뜨락에 두 마리의 학과 괴석이 서 있는 풍경은 고아하기 그지없다. 연영합을 고대 선현들이 성대한 풍류 모임을 가졌던 난정과 서원처럼 만들었다.

경복궁 동쪽에 있는 창덕궁과 창경궁을 그린 동궐도. 문화재청 제공
경복궁 동쪽에 있는 창덕궁과 창경궁을 그린 동궐도. 문화재청 제공
'동궐도'에 표현된 효명세자의 주요 거처인 연영합의 전경. 동아대학교박물관 제공
'동궐도'에 표현된 효명세자의 주요 거처인 연영합의 전경. 동아대학교박물관 제공

1830년 5월 효명세자가 갑작스럽게 숨진 직후 창경궁 환경전 근처에서 난 불로 내전 일대가 소실됐다. 주인을 잃은 연영합은 철거돼 영춘헌 등 내전 복구를 위한 자재로 쓰였다. 이때 효명세자가 사랑했던 한 쌍의 구리 학과 괴석도 궁궐 다른 곳으로 옮겨진 것으로 보인다. 1871년 이유원이 쓴 ‘임하필기’에서 주합루 앞에 있는 구리 학이 효명세자 대리청정기에 만든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구리 학에 대한 이후의 기록은 찾아지지 않는다. 지금은 ‘동궐도’ 그림 속에만 전해지는 이 한 쌍의 구리 학이 날개를 펴고 어느 산수 사이에서 노닐고 있는 모습을 그저 상상해 볼 뿐이다.

손명희 국립고궁박물관 학예연구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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